핵심 제시: 소녀 마리 마오니가 순진했던 꽃다운 시절에 “하느님의 아들”(Children of God)이란 사교집단에 잘못 빠져 상상할 수 없는 암흑 생활을 했다고 미국 salon인터넷 잡지가 10월25일 전했다. 마약 복용, 가족과 친구 포기, 정조 상실, 세상과 단절, 전전 도주,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 30년 후에야 비로소 깨우치고 과거를 뉘우쳤다!
(마리 마오니 사진)
나는 소속감을 지극히 갈망하는 천진한 소녀였다. 하지만 내가 30년 동안 살아온 “집”이 결국 공포의 집으로 확인되었다.
나는 2000년 초에 “하느님의 아들”을 떠났다. 그러고 나서 30년 짙게 드리웠던 먹장 구름에서 헤어나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해냈지만 지³날의 자신이 무섭기만 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이러하다. 어째서 이런 일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그 곳에 남게 되었는가? 자신의 지난날의 죄와, 뉘우침과 수치를 연상하면 스스로도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2003년, 벌써 성년이 된 큰 아들을 통해 3페이지에 달하는 “하느님의 아들” 아동보호사건 관련 1990년 영국고등법원의 치밀한 조사보고를 받았다. 이런 법정기록을 통해서야 나는 비슷한 공포적인 경력을 가진 사람이 나뿐 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워싱턴 특구 외곽에 사는 중산층 천주교 가정에서 7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우리 가정은 행복이 충만했고 부모들은 그들이 몸 담고 있는 교회에서 책임을 맡았다. 우리 집은 아주 깨끗하고 정갈했으며 “거실을 지날 때 카펫에 남긴 네 발자국을 깨끗이 닦고 소파에 앉기 전에 패드를 깔고 앉으라”가 어머니가 늘 하는 당부였다. 오빠 언니가 집을 떠난 후 나는 아주 고독했다. 내 나이 16살 되던 해, 여름철 구조대원으로 일하는 시간과 수영하는 시간을 마약 복용에 할애했다.
이것이 내가 정신적인 추구를 시작하게 된 원인일 수도 있고 단지 그 징조뿐일 수도 있다. 나는 생명의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소속감을 찾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친구가 성경을 읽는 것을 봤다. 그녀가 “하느님의 아들”에 참가한 직후인데 나에게 그들의 출판물 한 권을 줬다. 좀 찝찝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내 마음속의 어딘가에 와 닿았고 그날 방과 후 나는 그녀와 함께 “하느님의 아들”에 참가했다.
인생 길을 찾던 중 그것이 내 인생 길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곳에 독실한 그리스도 신념을 가진 젊은 이들이 많았는데 코뮌식의 “가정”생활과 일체를 함께 누리는 방식을 통해 순결한 기독교 신도로 전변하려 했다. 나는 사랑 받고 수용되고 그리스도의 한 “신생아”로 이 대 가족의 환영을 받으며 내 인생의 신생을 얻었다고 느꼈다. 나는 그것이 “사교”라고 느끼지 못했고 하느님과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이로써 생활을 빛나게 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 젊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9년 후 나의 대뇌 전두엽이 완전히 발육되고 대뇌 중 결정에 참여하는 그 부분이 사건의 결과 예견이 가능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 것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자신이 악몽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알지 못했고 이런 압도적인 사랑과 수용의 배후에 철두철미한 농간이 있음을 확실히 간파하지 못했다.
나는 새로운 이름을 가졌고 나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비록 이런 갑작스런 변화가 나의 친구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나는 여전히 무심하고 그들과 거래를 끊고 완전히 이 일에 열중했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히피족이 유행되기 시작한 환경 속에서 세속생활 이탈은 아주 인기 있는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하느님의 아들/’에 가면 안 된다”고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항상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방법이 있다. 내 나이 18살 생일 날, 나는 현지의 코뮌에 들어갔다. 그들인들 나를 어쩐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렇게 큰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결정일 줄은 몰랐다/—/—나와 친근하게 지내던 모든 사람과 거래를 끊고 내가 아는 유일한 세계를 포기해야 했다. 세인트 프랜시스 노인과 마찬가지로 나도 자신이 그리스도 구세주의 확고한 추구자라고 인정했다. 나는 그곳을 나의 “새 가정”으로 인정했다. 후에 발생한 많은 일들이 나의 애당초 충동적인 행동이 정확하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일단 깊은 물에 뛰어들고 나면 자신이 수영할 줄 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도리다.
코뮌의 생활은 시간적으로 엄격한 규제가 있다. 종교 신앙을 바꾸는 일이 우리의 대부분 시간을 차지했는데 나는 날마다 2-3시간 들여 “성경”과 그 조직의 출판물을 읽어야 했다. 대니얼 카너먼이 그의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을 거짓말을 믿게 만드는 좋은 방법이 끊임없이 중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귀에 익은 말과 진짜 말을 구분하기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그것이 나의 일상 생활인 줄로만 알았고 “모세서한”을 천 통 넘게 읽고 창시자 다윗 버거의 저작을 담론하고 그의 가명 모세 다윗으로 명명했다.
생활이 공정하고 오직 하느님만이 공정하다고 주입 당했다.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하든 우리는 그 발생의 원인만을 캐려 들었다. “모든 일이 영문 없이 하느님의 자녀들 몸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교육을 받았다. “감기 걸렸어? 하느님을 찾아가 왜 이렇게 너를 대하는가 물어라”, 우리는 이런 경고를 받았다. “그리고 참회문을 써서 구원을 빌라”, 이런 이른바 “공정 세계” 신념의 자연적인 연장은 사실상 음모론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출판물에 널리 전파되어 선각자들이 사물간의 연계를 이어놓아 사악한 가해자가 버거와 우리들 신변에 있어 우리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반드시 시시각각으로 경계심을 가져야 했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모든 일을 받아들이기 전에 반드시 잘 가늠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의심은 유죄므로 그 집단 내부에서 그 어떤 일에 의심이 가더라도 우리는 감히 제출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다윗 버거가 미국의 멸망을 예언할 때 이렇게 경고했다. “미국의 사악 때문에 일종의 질병, 궤멸과 하느님의 심판이 떨어지기 전에 미국인은 반드시 1월(1974년) 전에 미국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버거는 모든 예언가로 자처한 자들이 예언에 실패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말을 합리화시키고 이 단체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떠들었다. 그는 자신을 “성경” 속의 요나에 비유하고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원인이 사람들이 참회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사람들에게 사악에서 벗어나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라며 큰 공덕을 쌓아 하느님이 이번에 미국을 괴멸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이 기필코 오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선지자란 사람이 자신의 착오적인 세계종말의 예언을 해석한다는 것은 아주 머쓱한 일이다. 그때 그는 사색에 잠겨 있는 실내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모두 알았는가?” 그런데 내가 보기에 모든 사람들이 그 이유를 접수하는 것 같아 나도 당연하게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전에 내가 사회적 공감 원칙을 공부한 바 있는데 사람은 몰래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고 자신의 행동을 그들과 일치시키려 든다. 마치도 그들이 우리 자신보다 무엇이 정확한지 더 아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사교의 운영방식인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건 속의 많은 사람들이 당초의 나처럼 아둔하다.
1976년, 내가 펜실베이니아의 한 비밀 거처에서 “하느님의 아들” “대주교”의 아이들을 돌봤다. 버거의 또 다른 공포스런 예언/—/—얼마 후 미국이 핵무기에 궤멸되고 세계는 그리스도 반대자들에게 인수되고 우리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제3세계 국가에 옮기게 되는데, 결국 나는 열대의 어느 도시에 정착했는데 그곳의 기온, 빈곤, 지저분함, 바퀴벌레/—/—나에게 커다란 타격이었다.
관례대로 1년 동안 모금과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 후 “하느님의 아들”의 성원들은 “사랑의 법”에 따라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하느님의 아들”의 고위급에서만 비밀리에 실천되었다. “사랑에 기인해 이루어진 모든 일들이 하느님이 보기엔 모두 합법적이다”고 규정했다. 성 자유가 코뮌의 일종의 표준과 규범(기실 그것은 “사랑의 봉헌”을 동기로 했을 뿐이다)이고 모르는 사람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이/—즉 “추파 조어법 (调情钓鱼法)” (매음) /—조직 성원을 유치하는 극히 좋은 수단이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에 가입할 때만 해도 조직적으로 혼전 순결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있었는데 이 “사랑의 법률”은 단번에 그 이전의 모든 규정을 뒤엎어버렸다. 당황했지만 나는 규정에 따랐다. 내 나이 20살 때 나는 정조를 잃었고 “추파 조어법”을 이용하여 중동의 한 남성과 관계를 발생했다. 물론 그때 나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나는 다른 한 고위급의 애들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이 번에는 한 비밀 주택단지였다. 이곳의 고위층은 전에 만난 사람들과 달랐고 그런 위선적인 정의감이나 영성(灵性)이 없고 사람들이 재미있고 착했다. 그들의 거처가 상당히 은폐되어 그들은 “하느님 아들”의 기타 성원과 연락이 아주 드물고 밖에서 진행되는 혼잡한 성관계에 비하면 이곳은 완전 안식처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가정”에 4년 동안 거주하면서 나는 그들의 애들을 봐주고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공부를 가르치고 그들과 사랑했다.
이“가정”의 “보살핌(성)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 집 남성들이 몇 개월 건너 나와 한동안씩 함께 있었다/—/—그들 아내의 기도하에, 내가 그들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하느님이 나에게 나도 그들 “가정”의 일원(모든 일이 “발생의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부다처가 “하느님의 아들” 조직에서는 아주 흔해 빠진 일이다/—/—버거에게도 첩이 있었다.
그런데 나의 아들이 걸음마를 떼자 버거한테 보내져 그와 함께 살게 했고 나도 그 “가정”을 떠나 다른 핵심조직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 후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다시는 애 아빠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살던 그 조용한 침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애들과 달리 지금 나는 많은 애들과 한 쌍의 새로운 “부부”와 큰 침실 하나를 함께 이용해야 했다. 침실 중간의 장식품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커다란 더블 침대가 침실 한 복판을 차지하고 나와 애들의 침대가 벽 쪽으로 붙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가 휴식을 강요당하는 시간(오찬 후 두 시간)에 그들 부부는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성자유가 그들에게 가져다 주는 쾌락을 즐겼다. 그때마다 나는 그 지극히 머쓱한 광경에서 도망갈 수 있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애들을 데리고 근처에서 산책하며 비좁고 절제 없이 성욕에 탐닉하는 “집”을 빠져 나왔다. 절망, 무력감, 고독, 혼자 있을 때면 나는 늘 눈물을 흘렸다.
내가 이곳을 떠나야 하나?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느님의 아들”의 단체에서 우리는 일자리가 허용되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모든 계획이 금지되었다. 이런 것들이 하느님에 대한 불충이다. 내가 남다른 재주가 있는가?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부모는 내가 집을 떠난 지 얼마 후 선후로 암으로 세상 떴다. 이 세상에서 나는 홀몸이다/—/—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느님을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그 후 1년간 동반자에 대한 갈망과 내 자식에게 아빠 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는 조직 내 우수한 독신 남을 만났고 6주 내에 그와 결혼했다. 신혼의 희열을 겪은 뒤 상대방이 나에 대한 관심을 완전 잃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집요하게 몇 년을 견지하면서 우리 관계가 신혼 때로 돌아가고 그가 내가 찾고자 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희망했다.(그와 함께 있을 때면 난 스트레스만 받았지만) 우리는 종래로 맞대고 싸우지 않았고 줄곧 냉전을 벌였다. 아, 내 불쌍한 자식이여!
나중에 공포스런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박해가 들이닥쳤다. 나와 같이 있던 상급이 사교 두목으로 신문의 톱뉴스에 오르면서 우리는 즉각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우리는 새로운 도시로 도주했지만 그곳에서 다시 한번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바로 이때 조직 내 예방 접종을 받지 않은 애들 사이에 백일해가 퍼지고 이어 홍역, 풍진, 이하선염이 전염되었다. 몇 개월 동안의 검역과 격리 후 상급이 그녀의 애들을 모두 딴 데로 옮겨갔다. 내가 6년 넘게 그들과 같이 살고 그녀를 어머니와 같은 사람으로 모셨는데 그녀는 밤새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애들을 데리고 갑자기 모두 떠나버렸다. 나는 감정상 큰 상처를 입었다.
버거가 선포한 “사랑의 법률”은 모든 음욕에 통행증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엄한 체벌로 애들을 학대하거나 그의 신변에 있는 많은 애들을 상대로 성적 학대를 실시했다. 새로 추진한 공포적인 “가정학교”는 엉덩이를 때리고 간판을 걸어 다른 사람에게 자신과 말을 걸지 말라고 알리는 “금언”방식을 통해 어린이 특히 청소년에 대한 체벌을 보강했다.
버거의 서한 “한 아내”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조직내의 애들을 “우리 모두의 자식”으로 간주했다.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려는 부모에게는 “그들의 자식을 사랑한다”는 딱지가 붙는다/—/—이 사교 내부에서는 중죄다. 많은 애들이 부모와 같이 있지 못했다/—/—어떤 애들은 심지어 지구의 반대편에 살게 된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내 자식을 보호하려 했다. 학대가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나는 우리가 거주하는 곳에는 이런 상황이 없기를 바랬다. 우리는 진공 환경에서 살았다/—/—책도, TV도, 잡지도 모두 없다. 물론 인터넷도 없다.
이와 동시에 일반 신도는 물질적 결핍과 빈곤으로 절망에 빠지고 생존을 위해 늘 쟁탈과 혼전을 벌여야 했다. 거리에 나가 책자나 사교 홍보물을 팔아서 돈을 모아 성 자유와 무절제한 생육으로 인해 끊임없이 늘어나는 애들을 보살폈다. 그들에게는 사고할 겨를이 없다. 사태가 완화되면 버거의 다음 번 새로운 지시가 영락없이 추진될 것이며 우리의 “간증” 기한이 연장되고 뒤떨어진 애들 교육이 다시 뒷전으로 쳐진다. 스트레스가 언제 어디서나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스트레스, 언제 어디서나 복종, 하루하루 이어지는 몸부림, 정신적인 빈곤 /—/—이 모든 것이 정신적인 “전두엽 절제술”을 당하듯 나는 이미 “뇌 사망” 상태에 처해 있었다.
1994년, 버거가 죽은 후 그의 내연 녀 카렌 저비가 “하느님의 아들”의 영도권을 이어받았다. 새로운 기이한 교의가 실행되기 시작했다/—/—“예수와 성교”, 말하자면 우리가 성교할 때 상대방을 예수로 여기고 그에게 사랑을 표시하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신적 유도가 이어진다. 이런 허무한 영(灵)이 사람들에게 각종 스토리를 허구해 낼 소재를 제공하고 이런 방법을 통해 호응과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에 근거하여 한편 또 한편 소설을 써 내려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이런 것들을 들어서는 분명 소화하기 힘들고 나 자신도 어느 말이 더 신빙성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런 엉터리 논거의 소설인지 저비가 말하는 기이한 “정신사실”인지.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그 조직에 몇 년 동안 더 빠져 있었다. 나는 “하느님께 헌신”한다는 나의 애당초 약속이 정확함을 너무나도 증명하고 싶었고 줄곧 자신의 환상과 착각에 집착했다.
나의 큰 아들이 성년이 되어 집을 떠난 후 그가 이 조직을 이탈했다. 나에게 저비가 미치광이라며 이 사교 관련 사건에 대한 영국고급법원의 기록을 보여줬다. 그 기록을 보고 나의 안목이 열렸다. 내가 30년의 생명을 기여한 이 곳이 이렇듯 공포스러웠던 것이다.
이번에 나는 즉각 조직을 이탈했다.
나의 생각이 속임을 당했다. 이는 얼마나 큰 심적인 흔들림인가! 나의 모든 후회와 자괴감도 시간을 되 돌릴 수 없고 성년 애들의 동년도 되돌릴 수 없다. 그 후부터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이 무엇이 그때의 나로 하여금 그렇게 쉽게 속임을 당하게 만들었지 하는 문제다. “존스타운Jonestown”(영화이름, 1978년 인민성전교(The Peoples Temple) 신도 집단자살 비극을 반영)에서 ISIS에 이르기까지 사교에 관한 자료를 나는 많이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한가지 상식을 알게 되었다/—/—한 사람이 독자적으로 생소한 환경에 처할 때 정상적인 행위 의식이 점점 이상하게 변하고 심지어 도덕적인 면에서의 적대가 형성된다. Stanley Milgram가 1960년에 이름난 “순종” 테스트를 진행하고 나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통상 우리가 한 사람이 좋다고 할 때 그 사람 자체가 얼마나 좋아서가 아니라 양호한 환경에서만이 어떤 반응을 할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이미 늙었고 그 허황하게 보낸 공포스러운 나날을 생각할 때마다 깊이 뉘우치고 후회한다. 하지만 내 자식과 내가 전에 보살폈던 젊은이들의 관대와 양해가 나를 크게 격려했다.
나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공부 기회를 놓쳤지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공부다. 나는 최선을 다해 신경학, 심리학, 행위 경제학을 공부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 과학, 언어 수업도 들을 것이다. 나는 행보와 공부를 견지하며 모든 사물에 관심을 충분히 두고 있다/—/—물론 기독교와 신생조직은 제외, 내가 그것들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 지식:
일명 “하느님의 아들” (Children of God) 또는 “천부의 자녀”, “사랑의 가정”이라고도 하는데 미국과 세계 많은 지역에 전파된 미국의 사교조직이다. 다윗 버거(다윗 모세 백이라고도 함)가 1968년에 창설한 이 사교는 전적으로 난교와 세계종말론을 선양하며 매음 유사 방법으로 신도들을 포섭한다. 지난1980년대에 한 때 중국에도 침투했었다.
(책임편집: 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