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산시(陕西)성 다리(大荔)현 청관(城关)진 시치(西七)촌의 얀완리(闫万里)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팡다왠(方大圆) 일대에서는 무던하기로 소문 난 분들입니다. 고생스레 4 남매를 키우신 부모님께서 행복한 만년을 보내시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선후로 전능신에 가담하는 바람에 저희들의 희망이 파멸되고 주변 분들이 우리 집 이야기를 할 때면 애석해하고 탄식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 집 이야기를 하자면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 네 남매를 모두 시집장가 보내고 임무를 완성한 그 해부터 두 분이 여유롭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유로움/’이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전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저희 아버지를 노렸고 어떤 방법을 썼는지 고지식한 아버지가 /‘그리스도/’ 신자가 됐습니다. 기독교가 이 지역에 오래전부터 있었으므로 아버지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노인에게 정신적인 기탁이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종래로 기독교 교회에 나가지 않고 삼삼오오 몰려다니기만 해 이상해서 큰 형이 물으니 최신 그리스도를 믿는데 전능의 신이고 교회당의 그리스도는 한물 지나갔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리둥절했지만 더 묻지 않았습니다. 실은 아버지가 믿은 것이 나중에 알게 된 악명 높은 전능신이었습니다.
전능신에 가입한 후 아버지는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농사철이면 아무리 말려도 우리를 도와 일을 하셨는데 지금은 일손이 아무리 딸려도 그들떠 보지 않고, 조용히 지내며 어디 나가 삐치기 싫어하셨는데 지금은 /‘복음을 전달/’ 한다면서 외출시간이 집에 있는 시간보다 많고, 말수 적고 과묵하시던 분이 쉴 새 없이 말하시는데 화제가 모두 /‘신/’에 관한 것들, 그리고 /‘신/’을 믿으라는 동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변화에 자식들이 뭐라 하기도 그렇고 특별한 바램도 없는데 본인이 즐겁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의 /‘즐거움/’에만 만족하시지 않고 우리를 전능신에 가입시키는 게 더 큰 목표인 것 같았고 /‘신/’이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늘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 남매들이 실망을 안기자 아버지는 /‘복음전달/’ 목표를 어머니쪽으로 돌렸습니다. 아버지에게 많이 의지하고 모든 일에 잔소리 없이 따르기만 하던 어머니이기에 /‘그리스도를 믿는/’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들 종교를 믿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생활이 느긋해진다고 하는데 두 분의 전능신 가입은 정반대로 우리 가정의 악몽의 시작이었습니다. 두 분이 함께 /‘신/’을 믿으면 동무되어 아버지의 외출이 적어 걱정을 덜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어머니가 /‘신/’을 믿은 후 아버지의 외출이 더 잦아지더니 이어 두 분이 동행해 우리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자물쇠가 집을 지키군 했습니다. 우리마을이 국도에 인접하여 오가는 차들이 끊임 없는데 두 분이 전동차를 타고 다니기엔 너무 위험해 자식들 의견이 많았습니다. 이런 갈등 때문에 두 분의 외출이 한동안 줄더니 후엔 신자들을 불러 우리집에서 집회를 가지고 기도하느라 집안에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변소 가겠다는4살난 조카를 변소 입구까지만 데려다 주고 집회에 참석하느라 급히 들어가는 바람에 조카가 변소 구덩이에 떨어졌는데 다행이 이웃이 제때에 발견해 구조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온순한 형수가 처음으로 형과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늘 /‘신/’을 믿으면 이게 좋고 그게 좋다고 하셨지만 2010년 구정 후 어머니 체중이 갑자기 줄어들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설 명절에 체중이 떨어질리가 없고 마을 의사가 혈당을 검사해보라 제의하기에 현 병원에 가서 검사하니 “혈당이 높은 편”, 말하자면 당노병인데 약을 복용하고 음식을 가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후 어머니는 약이고 음식 주의사항이고 다 뒷전으로 하고 더욱 경건하게 기도하며 /‘신/’이 보우해주고 /‘은총/’를 내려주기를 기다렸습니다.
후에 보니 전능신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거짓이고 /‘복음전달/’이란 신도를 끌어들이기 위한 빌미인 것 같았습니다. 두 분에게 임무량을 배정한 것 같은데 /‘복음전달/’은 영원히 밑도 끝도 없어 보였습니다. 어머니가 앓은 후 /‘복음전달/’ 임무가 거의 아버지 혼자 몫이었습니다. 2011년 7월 어느 하루 점심, 공기가 불덩이처럼 따가워 시원한 곳을 찾아 더위를 피하느라 거리에 다니는 사람도 드문데 아버지는 /‘복음전달/’에 분주했습니다. 아버지가 전동차를 타고 현성의 성서 2환로에서 역행하다 맞은 켠에서 달려오는 트럭과 정면 충돌했습니다. 전동차와 트럭의 충돌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어서 전동차가 박살나다시피 되고 전능신 홍보자료들이 길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지고 아버지의 상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복음을 전달/’하는 길에서 순식간에 숨졌는데 그해 67세였습니다.
아버지의 비참한 별세에 더없이 비통해하는 우리를 어머니는 위로했습니다. “아버지가 신을 위해 일하니까 죽지 않는다. 곧 부활할거다.” 우리 남매는 슬프면서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도 어머니의 병을 소홀이 할 수 없어 약과 당뇨병 전문식품을 떨군 적 없지만 사람이 지키지 않으면 어머니는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4남매가 번갈아가며 당직을 서 어머니가 제때에 약과 음식을 드실 수 있도록 감시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 지나니 어머니의 생활이 규칙적이고 건강상태도 좀 좋아진 것 같고 /‘신/’이야기도 별로 꺼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조용한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다고 얼마 후 전능신 신자들이 다시 찾아왔고 어머니는 또 다시 예전의 /‘그리스도를 믿는/’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좋은 말로 권하고 집회에 참석한다고 찾아온 사람들을 쫓아냈지만 어머니에게 무언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2012년1월, 어머니가 말 없이 가출했는데 갈만한 곳을 다 찾아다녔지만 소식 전무였습니다. 실종된 게 아니라 어느 신도와 같이 있으리라 짐작은 갔지만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됐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불행하게도 현실로 변했습니다. 2013년3월의 어느날 아침, 날이 희붐이 밝고 마을에 행인 하나 없는데 승용차 한 대가 우리집과 멀지 않는 곳에 멈춰서더니 몇 사람이 어머니를 부축해 내렸고 집앞까지 모셔다 놓고 급급히 자리를 떴습니다. 이웃이 어머니를 발견하고 우리집 문을 두드리기에 문을 열고 보니 피골이 상접한 사경에 이른 어머니였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당뇨병이 이미 고혈압, 시력감퇴, 족부 짓무름 등 합병증을 유발해 별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가련한 어머니를 보며 우리 남매는 더없이 괴롭고 어머니가 곧 우리 곁을 떠나게 된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2013년7월28일, 공기가 마냥 화로 같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날, 어머니는 66세를 일기로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마쳤습니다.
떠나신 부모님은 우리 가족 몇 세대에게 크나큰 아픔을 남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능신이 우리 가정에 준 보답입니다!
얜완리 부모님 유상
이야기하고 있는 얜완리
(책임편집:친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