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중(王忠)을 만나는 순간, 여름철에 부지런히 일하는 전형적인 서북지역 농민이라는 첫 인상을 받았다.
커다란 체구, 까맣게 탄 얼굴, 약간 구부정한 등, 전형적인 서북지역 농민 모습이었다. 그가 전에 법륜공 심취자였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지유쵄청(酒泉城)에 아들 집 사주러 갔다가 금방 돌아왔습니다.” 전동삼륜차를 타고 무던하게 웃는 왕중의 얼굴에 흥분이 감돌았다.
우리는 왕중의 안내로 오불꼬불한 오솔길을 따라 지유쵄시 수저우(肃州)구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의 집은 마을 가장 북쪽에 자리잡았는데 독립 주택에 혼자 살고 있고 새로 인테리어한 집이 아니지만 정연하게 꾸며졌다.
한여름, 녹음이 우거져 왕중의 집을 덮었고 노란 살구와 파란 사과가 울안에 주렁주렁 달려있다. 50년이 넘도록 왕중은 내내 이곳에서 살았고 해가 뜨면 일하러 나가고 해가 지면 돌아와 휴식하는 아늑하고 행복한 생활을 이어왔다.
그런데 17년전의 한 우연한 만남이 그의 아늑하고 행복한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마누라도 그의 곁을 영영 떠났다. 지난 일을 생각할 때마다 왕중은 한없이 후회하며 사진속의 젊고 예쁜 마누라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픈 마음을 달랜다.
1998년 왕중이 이웃 마을에 일하러 갔다가 /‘법륜공/’이라는 공을 수련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 공을 수련하면 병을 없애고 백업이 흥성하며 좋은 운이 계속 따른다고 소개 받았다.
권유에 못이겨 왕중도 /‘법륜공/’을 수련하는 행렬에 가담했다.
/‘대원만/’, /‘좋은 운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왕중은 많은 시간을 “법을 학습하고 책을 암송하고 베끼고, 홍법하는 데” 투입하고 친지들의 권유에도 마다하고 정부에서 법륜공을 법적으로 금지한 후에도 그 속에 심취되어 헤어나오지 못했다.
왕중은 혼자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동원해 법륜공을 함께 수련하고 법륜공이 세상사람들을 병통에서 해탈시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고집했다. 소박하고 가정 살림을 잘 하는 살림꾼 마누라도 왕중의 선동하에 그와 함께 수련하며 비옥한 농토를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고 어린 자식도 돌보지 않았다.
2002년7월, 왕중은 /‘대원만/’을 이루기 위해 숨어 다니는 10여 명의 /‘동수들/’과 함께 지우쵄시 북교공원에서 비밀집회를 가지고 홍법을 했다. 그리고 그해 8월, 란저우(兰州)에서 열린 /‘법륜공/’ TV삽입방송기술전수회에 참가하고 삽입 설비 한 세트를 들고 와 자기 집에서 기타 /‘동수/’들에게 학습시켰다. 11월, /‘법륜공/’ 전단지를 배포하고 부치다 사회질서 교란 누범으로 소저우구 공안국에 검거되었다.
2003년3월, 마누라가 세상을 뜨고 이로 인해 가족들이 그와 원수 사이가 되었다. “연마하는 사람은 약을 먹지 않는다”는 /‘법륜공/’의 선전을 믿었기에 마누라가 약을 거부했고 애초 발병 초기부터 왕중이 약을 먹지 말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약을 먹으면 요력을 키워 결국 자신을 철저히 파멸시킨다”는 /‘사부/’의 말을 믿고 지금의 병통이 /‘사부/’가 그들을 도와 /‘소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두 사람은 가족의 극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편단심으로 기공 연마를 통해 병을 치유하려 하다 결국 참사를 빚었다. 마누라가 치료 최적기를 잡지 못해 30대 나이에 세상을 떴다.
마누라의 별세, 가족들의 질책, 구치소 간부들의 교육과 구원으로 왕중은 갑자기 뉘우치고 /‘법륜공/’사교의 근원적 본질을 충분히 인식하고 다시는 수련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법륜공/’의 영향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선후로 여러 명의 반사교자원봉사자들이 그와 심리적 상담을 하고 정부에서 조직하는 과학치부강습반과 기능양성반에 참가시켜 사교와 철저하게 결별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정부에서 출자해 생산과 생활속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치부의 길로 이끌어 생활의 신심과 용기를 다시 얻고 생활의 강자로 되도록 노력하게끔 도와줬다.
각성한 왕중은 자신이 법륜공을 믿지 않고, 듣지 않고, 수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反)사교법치(法治)선전지원자로 자진해 나섰다. 법치선전 현장에서 그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50 이 넘지만 법륜공을 이탈한 후 많이 씩씩해졌습니다. 20여 무의 땅을 정성껏 가꾸면서 농한기엔 삼륜차를 몰고 시내에 들어가 가구 운송 등 일을 통해 1년에 4-5만원 수입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웃들이 왕중을 치하했다.
현재 왕중의 아들 딸은 다 어른으로 성장했다. 딸은 이미 결혼하고 아들도 대학 졸업 후 시내에서 마땅한 일자리를 찾았다. 이 모든 것에 그는 특별히 만족했다. “아들한테 시내에 집을 사주고 이제 결혼까지 시키면 저 평생의 원이 다 실현되는 겁니다. 돌아간 마누라 볼 면목도 서고요. 향후 다시는 아무 공법도 믿지 않을 것이고 수련은 더 하지 않을 겁니다.” 왕중의 태도가 단호했다.
(책임편집:쉬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