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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공이 내 딸 꿈의 날개를 부러뜨려

2015-11-23 기원 하 다:개풍망 Auteur:한진시우(구술) 정루(정리)

산둥(山东)성 주청(诸城)시 미저우(密州)가도 랜펑(连丰)촌에 살고 있는 한진시우(韩金秀)라고 합니다. 저는 처녀시절 배우자를 고르는 눈이 높아 일반 시골 처녀들보다 결혼이 늦어 35살에야 딸을 낳았습니다. 1989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던 그 해 딸이 겨우 3살이었습니다. 저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겼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모녀는 서로 의지하며 살며 저는 하나 딸 잘 키우리라 모든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총명하고 귀여운 딸은 5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8살에 성 8급 시험을 통과하고 공부성적도 반에서 상위권에 들었습니다. 커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여 좋은 곡을 들려주겠다던 딸이 저에겐 큰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법륜공을 수련하고 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딸이 풍습성 심장병에 걸리고 심부전 합병증을 유발하여 2010년에 제 곁을 떠났습니다. 피아니스트가 되려던 딸의 꿈은 법륜공을 수련한 저 때문에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애당초 저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법륜공을 수련했습니다. 딸을 낳은 후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산후더침으로 머리에 바람만 맞으면 편두통으로 고생해야 했고 겨울철이면 꽁꽁 싸야 감히 외출을 시도했습니다. 1년 동안 한약을 먹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1997년 겨울, 이웃 집 정칭머이(郑清美)가 동네 마실 나왔다가 /‘법륜공/’이 집안의 평안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는데 수련해보라고 저를 권했습니다. 딸의 평안과 저 자신의 몸 건강을 위해 저는 그냥 해 본다는 심산으로 /‘법륜공/’을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법륜공/’ 책을 사서 읽으며 책에서 가르친 대로 동작을 익히고 날마다 새벽 4시 반에 연공장에 나가 공을 연마하고 6시 반에 귀가하여 애 아침 밥을 챙겨주고 애를 학교에 보내고 나서 다시 인근 방직공장에 출근했습니다. 방직공장의 사장이 돌봐준 덕에 창고 관리를 맡았습니다. 아침 7시반 출근, 점심에 귀가하여 딸 점심밥을 챙겨주고 오후 6시 퇴근, 집에 와 애 공부를 가르치고 애가 잠든 후 이웃 정칭머이네에 가서 연마체험을 교류했습니다. 생활이 규칙적이어서인지 연공 8개월 만에 편두통이 경감되고 추위도 그렇게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법륜공에 심취되었습니다. 점차 연마시간이 갈수록 길어지고 딸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줄어들어 밥도 챙겨주지 않아 딸이 길가에서 사 먹거나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고 시간이 급하면 아예 굶을 때가 많았습니다. 저녁이면 집회에 출석하느라 딸의 공부를 지도 못해 가끔 불만을 토로해도 못 들은 척 했습니다. 1998년 겨울부터 딸이 감기가 잦아지고 식욕이 떨어지고 호흡이 짧고 급하며 기침을 할 때면 가래에 피가 섞여나와 부득불 자주 학교에 병가를 내야 했습니다. 선생님이 여러 번 집을 찾아와 애를 데리고 병원에 가보라고 했지만 저는 말로만 간다 해놓고는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딸의 병이 업력 탓인데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고 스스로 소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뜩이나 연마에 바쁜데 그럴 시간 여유도 없었습니다.

1999년7월, 나라에서 법에 따라 법륜공을 단속하자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업무 사고를 자주 빚어 할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였습니다. 그러면서 딸이 대충대충 끼니를 때우게 되고 가끔 맛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면 잔소리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늘 “이렇게 좋은 법륜공을 나라에서 왜 못하게 하는가? 꼭 나라에서 사정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칭머이에게 물으니 그녀도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연공장 소장 린더화(林德华)가 우리에게 베이징에 호법하러 가라고 했는데 정칭메이의 남편이 절대 가지 못한다 말리더니 혹시나 우리 함께 갈까 걱정되어 집을 이사해 버렸습니다. 수입이 없는 저는 남편 사망 배상금으로 페인트를 사서 현수막을 만들어 공우들과 함께 어둠을 타서 곳곳에 구호와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10월에는 공우들과 함께 운수차량을 타고 베이징에 가서 천안문광장주변을 몇 일씩 맴돌다가 겨우 “법륜대법 좋다”라는 현수막을 펼쳤는데 즉석에서 공안기관에 잡혀 고향으로 송환되기도 했습니다.

송환되어 돌아온 후 단지관리소 일군이 저를 찾아와 교육하며 시에서 조직하는 법제교육 강습반에 참가하라고 동원했지만 저는 끝까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법륜공을 하지 말라는 딸의 권고에도 애가 뭘 알아 어른들 일에 참견하느냐 꾸짖었습니다. 단지관리소에서 저의 가정 형편을 고려해 기초생활수급 신청 수속을 밟아주고 학교에서도 딸의 모든 비용을 면제해 줬습니다. 관리소 왕주임이 저의 딸 낯 색이 좋지 않다며 병원에 데리고 가려 했지만 저는 극력 반대하고 몇 번이고 저의 집을 찾아와 법륜공을 수련하지 말고 딸과 열심히 살라고 권했지만 저는 못 들은 척하며 그분을 저의 /‘층차 제고/’ 와 /‘원만/’을 가로 막는 /‘마/’로 여겼했습니다. 이때부터 기공연마, 법 학습, 진상 알리기 3가지 일이 저의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1999년부터 딸은 제가 집에 없는 생활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혼자서 공부하고 밥 해 먹고 빨래도 하고 몸이 아프면, 특히 겨울과 봄에 자주 감기에 걸리고 숨이 막혔는데 저절로 길가의 진료소에 들어가 주사를 맞고 약을 사 먹었습니다. 진료소의 의사가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심전도와 심장엑스레이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지만 저는 병은 업력으로 생긴 것이고 오직 /‘법륜대법/’을 수련하여 /‘소업/’을 해야 만이 모든 병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딸에게 법륜공을 수련하라 요구하고 딸은 번마다 공부가 바쁘다는 핑계로 발뺌을 했습니다. 딸은 공부에 열심하고 피아노 연주 수준도 대학입시 전에 벌써 여러 개 명문대학의 전공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2003년 고3 때 겨울부터 밥맛이 떨어지며 헛배가 부르고 소변이 줄고 다리가 붓기고 뺨과 입술이 짙은 자색으로 변하고 호흡이 갈수록 거칠어져 할 수 없이 휴학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대학입시 등록이 당금인데도 딸은 종일 반듯이 누워 있지를 못하고 호흡난으로 입으로 숨을 몰아 쉬어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했습니다. 실은 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며 병원에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병원에 가면 대법제자가 아니고 사부님과 동수들을 만날 면목이 없다는 생각에 가지 못했습니다. 대학입시 등록이 시작된 후 담임선생이 딸 신분증 가지러 저의 집에 왔다가 딸의 상태를 보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는데 풍습성 심장병에서 유발된 심부전이라는 병원 진단이 떨어졌습니다. 의사가 3-4년 전에 치료를 받았다면 심부전으로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고 풍습성 심장병도 수술을 통해 치유되었을 것인데 현 상태로 딸이 대학입시에 참가할 수 없으며 수명도 기껏해야 5년 정도 밖에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단지관리소에서 이 상황을 알고 우리 모녀를 중병보험에 가입시켜 주고 우리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고 반(反)사교자원봉사자들이 저를 찾아와 법률지식과 정책을 거듭 설명해 주었습니다. 법륜공을 수련하지 않고 딸을 잘 돌봤더라면 딸이 이런 병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고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제때에 치료를 했으면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될 수 있었을 텐데, 한 동안 깊이 생각한 끝에 불현듯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최선을 다하여 딸을 보살피고 딸한테 진 빚을 보상하고 딸이 누려야 할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게 하려 애썼지만 결국은 딸의 목숨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내 딸아, 엄마가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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