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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종교 믿어 치료 거부로 다리 절단

2015-07-27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조우융강(구술) 쇼위(정리)

 

네이멍구 우란호우터(乌兰浩特) 근교 훙광(红光) 살고 있는 조우융강(39, 赵永刚)이라 합니다. 부모님은 비닐 하우스 야채 재배와 2660제곱미터 남짓한 한전을 가꿔 생계를 유지합니다. 저에겐 창창한 미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법륜공 탓에 바뀌었습니다.  

 

199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대학입시 성적이 좋지 않는데다 가정 형편도 좋지 않아 재수를 포기하고 의사인 셋째 외삼촌을 따라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의과대학 엘리트 출신인 외삼촌의 자상한 가르침과 열심히 배운 덕에 저는 의학지식을 초보적으로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1996년 베이징에서 1년 동안 체계적인 학습을 마치고 돌아와 보건소에서 의사로 일했고 마을 사람들의 사소한 질병을 고쳐드리면서 점점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후에 저는 보건소 일을 그만두고 개인 진료소를 개업하여 환자들을 극진히 관심하고 주동적으로 약을 배달해 사람들의 존중을 얻고 진료소의 매달 수입도 좋았습니다  

법륜공을 잘못 믿고 로에 빠져     

어느덧 1998 여름이 되었습니다. 어느 , 마을에 사시는 숙모가 찾아왔는데 아프다거나 사겠다는 말도 없이 저에게 <전법륜>이란 권을 건네 주며 /‘기공/’ 수련을 늘어놓았습니다. “강자야, 책을 보거라, 법륜공이란 것인데 수련하면 만병이 치료되고 가부좌 연마만 견지하면 암도 치료된단다. 네가 기공을 배우면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할 약이 필요 없어.” 숙모는 진료소에 쌓인 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습니다. “숙모가 다리 통증을 여러 앓은 네가 알잖아, 아무 약도 효과 없었어, 근데 공을 연마한 후부터 다시는 아픈 없다니까, 좋은 거니까 한번 !”   

동안 의술을 배운 덕에 기공에 대해 다소 알고는 있었지만 하나만 연마해 만병이 치료될 정도로 효력이 신기하리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법륜공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정말 숙모의 말과 같이 신기한지? 반신반의로 한가한 틈을 법륜공을 연구했습니다. 후에 숙모는 녹음 테이프와 경문을 가져다 주며 저를 계속 연습하라 권했고 저를 /‘공우회(功友会)/’에까지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주변 여러 마을에서 공우들을 알게 되었고 수련으로 병을 치료한 그들의 경험담을 듣고, 경건하게 수련하는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법륜공에 일리가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공으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할 있을 같아 기공연마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후부터 저는 /‘공우회/’ 여러 활동에 열심히 참가하고 날마다 열심히 가부좌하고 경을 읽으면서 점점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가족 친지들과 결렬  

고졸 학력에 나이 젊고 학습능력이 강한 저는 어느 새 여러 셋트나 되는 법륜공  

동작을 다 숙지하고 <전법륜> <법륜대법의해> 등 책을 통독했으며 혼자만층차에 오를 것이 아니라사람을 이끌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업력설/’을 터득하면서 저는진료와 약품은 치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약물 부작용을 유발한다 /‘이론/’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부모와 친구들에게 수련을 추천하다 두 마디 안짝에 거절당하자 저는 진료소에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기공을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연마에만 심취되고 업무에 태만해져 아예 진료소를 걷어치우고 수련에 전력했습니다. /‘공우회/’에서 연마에 필요한 비용으로 기부금을 내라 요구하자 저는 주저 없이 몇 년간 모았던 돈을 전부 헌금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가 제가 하는 행동을 보고 입이 닳도록 권하고 외지에서 사업하시는 외삼촌도 먼 길을 다녀와 미로에서 헤매지 말고 정신차리라 밤새껏 권했지만 미쳐버린 저는 그들이 뭐라 하든수련은 전일해야 한다는 사부의 간곡한 당부밖에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가 /‘원만/’으로 향하는 길에 놓인 걸림돌이라 생각하고 수련에 전념하려고 의연히 집을 나갔습니다.  

http://anticult.kaiwind.com/xingao/zqtj/201505/08/W020150508634576311137.jpg   

출처: 인터넷 사이트    

/‘시련/’을 받아들여 침통한 대가를 치러  

집을 나온 저는 이웃 마을에서 허름한 집 한 칸을 임대해 살았습니다. 수입이 없어 생활이 무척 힘들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부가 저를 시험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엄동설한에 석탄 살 돈이 없어 추위에 떨고 배를 굶었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침식마저 잊어가며 수련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오른 발이 저리고 시리고 발가락이 바늘로 찌르듯 아팠지만 저는 수련에 빠져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점차 오른쪽 다리가 온통 벌개지고 오른 발이 변형되고 때론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왔습니다. 소식을 들은 공우들이 권했습니다. “괜찮아, 이것이 소업하고 병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단계라고 사부가 말했어. 그리고 수련인에 대한 시련이기도 해, 이를 악물고 이 관문을 넘으면 새로운 층차로 진입 꺼야!    

이런 연공 이념에 빠진 저는 매일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계속 가부좌 연마하고 /‘소업/’하고 병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하루빨리 발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연마시간을 연장했을 뿐만 아니라 강도도 높였습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도 통증이 완화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종아리 괴사 범위가 점점 크게 퍼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집을 부리며 /‘사부/’의 공법과공 들이면 자연히 성공한다를 믿고 가부좌 연마가 틀림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를 보러 오셨던 어머니가 제 다리 증상을 발견하시고 무작정 병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가 저의 /‘수행/’을 방해한다며 기어이 반대했습니다.    

저의 반대에도 어머니는 친척들을 불러 억지로 시립병원에 저를 끌고 갔고 초보적인 진단을 받은 후 창춘시 큰 병원으로 옮겨갔습니다. 심한 폐쇄성 혈전혈관염이란 전문가들의 진단과 함께 너무 늦게 발견되어 생명위험이 있으므로 종아리 절단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다리 절단 소리에 저는 죽을 것만 같아 통곡했습니다. 몇 년간 열심히 /‘수련/’하고 사부를 /‘신령/’처럼 모시고 각종 시련을 이겨냈건만 결국 얻은 것이란 /‘비승원만/’이 아니라 다리 절단이었습니다!     

이 모든 걸 깨달은 지 오래되지만 오른쪽 다리에 의지를 장착한 저는 마흔이 되도록 결혼 못하고 부모 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수련/’의 나날을 생각하면 회한과 아픔, 죄책감이 뭉클뭉클 치밀어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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