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월선 생전
유연령(刘艳玲), 왕건위(王建伟)부부는 악정현 강각장진 오중장촌 시골 농민이다.
1997년 8월, 당산에서 오중장촌 친척집에 놀러왔던 주봉금(周凤琴)이 친숙한 유연령의 집을 찾아 법륜공을 연공하면 강신건체할 수 있다 소개했다. 주봉금의 누차 권유로 유연령은 법륜공수련을 시작했다.
얼마 후 유연령은 법륜공에 깊이 빠져 딸과 집안일과 농사를 모두 포기하고 일심으로 성선성불(成仙成佛)하기만 바랬다. 남편이 그 따위들을 믿지 말라고 항상 권유했지만 유연령은 번마다 화를 내며 자기가 수련하여 원만한 후 일가족을 데리고 천국에 가서 복을 누린다고 했다.
1999년 7월 국가에서 법에 의해 법륜공을 취체한 후 왕건위과 친척들이 모두 연공하지 말라고 유연령을 권했다. 이에 유연령은 말로만 대답하고 실제는 낮에 연공하기가 불편했으므로 밤에 집에 숨어서 연공했다.
1999년, 유연령은 11살의 딸 왕월선에게 법륜공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2005년 11월 하순, 왕월선의 몸이 불편해 두통과 구역질이 나고 온 몸에 맥이 없었다. 아빠가 딸을 데리고 병원에 진찰받으러 가려했지만 유연령은 사부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약이나 주사가 아니더라도 낫게 될거라 했다. 기자에게 그때 자기는 딸이 보통 감기에 걸린 줄 알고 며칠 지나면 나을거라 생각하고 더 고집하지 않았다고 왕건위가 말했다.
며칠 지나도 왕월선의 병세는 호전이 없이 더 심해갔으며 저열, 기침 등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유연령은 여전히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그칠 줄 모르게 기침을 하는 딸을 보며 아빠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11월 26일, 유연령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아내 몰래 마을 의사 왕광동(王光东)을 청해왔다. 왕광동은 왕월선이 감기에 걸렸는데 지체하고 제때에 치료를 받지 않아 증상이 심해지고 있으므로 어서 링게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한창 치료준비를 서두를 때 유연령이 집에 돌아왔다. 딸은 사부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링게주사가 필요없다고 소리지르며 의사들은 다 사기꾼이라며 왕광동을 내쫓았다. 유연령의 태도가 강경하여 그녀의 어머니와 남편 왕건위가 계속 권했지만 문을 닫아건채 듣는 척도 안했다.
12월 6일, 왕건위는 유연령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딸을 데리고 현성에 진찰받으러 갔다. 상세한 검사를 끝낸 후 병원에서는 입원치료를 제의했다. 왕건위가 큰형에게 입원보증금을 준비해오라 전화를 하고 안절부절 기다리고 있을 때 유연령이 병원까지 쫓아와서 자기 따라 집에 가자고 딸을 강요했다.
왕건위의 누나 곡홍하(曲红霞)의 말에 따르면 왕건위는 나약한 편이고 유연령이 하도 드세고 강세여서 감히 그녀와 맞서지도 못하고 모든 일에 유연령이 하자는 대로만 따르고 반대 의견을 감히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딸이 그토록 중하도록 치료를 받지 못한 원인의 하나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 딸이 /‘시련/’을 이겨내게 하기 위하여 유연령은 날마다 딸에게 어머니를 믿고 법륜공을 믿고 사부를 믿으라는 세뇌교육을 진행했다. 어머니를 무조건 믿고 어머니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의지하는 왕월선은 자발적으로 어머니의 결정을 수호했고 다시는 아빠를 따라 병원에 가지 않았다. 따라서 왕건위는 더더욱 어쩔 방법이 없었다.
2006년 1월, 마을의 법륜공수련자 왕숙련(王淑莲)이 공우 여럿을 데리고 유연령의 집을 찾아와 그를 격려하고 응원했다. 왕숙련은 그들이 왕월선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왕건위가 들어가 보려 했지만 왕숙련이 문을 지키고 서서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월선이는 사부의 보호가 있으므로 며칠 지나면 곧 나을 것이라”고 했다.
2006년 2월, 왕월선의 병이 갑자기 악화됐다. 유연령의 어머니가 애를 데리고 병원에 가달라고 유연령의 앞에 무릎을 굻어서야 유연령은 할 수 없이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기자가 당시 왕월선의 병을 봤던 의사 장총(张聪)을 찾아 갔는데 왕월선에 대한 인상이 깊었다. “그때 그 애의 병이 아주 위급했습니다. 흉부투시를 했는데 폐부에 음영이 있어 폐염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입원하여 심층적인 검사와 치료를 받으라고 했는데 유연령은 집에 일이 있다며 입원을 거절했습니다”. 장의사는 그녀에게 약을 처방하고 반드시 하루빨리 애를 데리고 입원치료를 받으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유연령은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숨겨두고 딸에게 먹이지 않고도 먹였다고 거짓말을 했다. 왕월선이 죽은 후 식구들은 그의 유물에서 봉지도 뜯지 않은 약들을 찾아냈다.
2006년 3월, 왕월선의 기침은 점점 심했고 고열이 나고 얼굴이 창백했으며 말할 맥도 없어했다. 애를 데리고 병원에 가려하면 유연령은 “지난번 병원에 갔었는데 의사가 입원할 필요가 없다며 약을 처방했는데 그리 많이 먹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다. 병원은 다 사기꾼들이여서 돈만 챙긴다”고 하였다. 유연령의 강경한 태도와 악담 때문에 친지들 발길이 다 끊겨 왕건위는 고립무원이었다.
2006년 4월 하순, 날씨가 빈번하게 변하면서 왕월선의 병세는 점점 위독해졌다. 끝내 용기를 낸 왕위건이 몇몇 친지들을 모아 억지로 왕월선을 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했다.
고모 곡홍하가 질녀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왕숙련 등 공우들을 쫓아내고 유연령을 크게 꾸짖었다. 비록 유연령이 여전히 우기긴 했지만 딸의 병이 정말로 위독해지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4월 22일 왕건위는 왕월선이를 데리고 당산인민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 왕월선의 병은 최초의 감기에서 폐염으로 넘어갔고 또 여러가지 합병증이 유발됐다.
2006년 5월 3일, 고집불통 유연령은 왕숙련 등 공우들에게 미혹되어 금방 호전을 보인 딸을 슬그머니 데리고 집에 왔고 치료를 절대 거부했다. 유연령의 마음을 돌리려고 친정어머니가 재차 땅에 무릎을 굻었지만 그녀는 끔쩍도 안했다. “그때 유연령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딸 왕월선이도 엄마편에 서서 병 치료를 가지 않겠다며 어머니가 자기를 속일 수 없다”고 했다며 왕건위이 회억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 왕월선의 병은 급속히 악화됐다. 딸이 그렇게 빨리 견디지 못할 줄은 그때 생각도 못했다고 왕위건이 회억했다. 앓기 시작해서 이미 반년이나 넘었으니 더는 악화되지 않을 줄 알았다고 했다. 5월 12일 18세의 왕월선은 긴긴 반년동안 병통의 시달림을 받다가 영원히 이 세상과 고별했다.
왕월선이 사망후 외할머니는 울며 몇번씩이나 혼절했다.
비록 6년이 지났지만 왕위건은 딸 생각만 하면 여전히 칼로 가슴을 에이듯 아파난다고 했다. “법륜공을 미신하지 않았다면 유연령도 그토록 마음이 독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 친딸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고 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