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이름은 류일평(廖一萍), 74세, 중앙재정대학 퇴직교원입니다.
1995년 11월, 유방암 수술을 받은지 3년이 되는 저는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방법을 애써 찾고 있던 중 마침 우리학교 주숙청(朱淑清)선생이 저한테 법륜공을 추천, <중국법륜공(수정본)> 한권을 주며 읽어 보라 했습니다. 읽은후 저는 책속의 “기공이 바로 수련이다”에 관심이 생겼고 그후 그는 저한테 <전법륜> 한권을 더 줬습니다. <전법륜>에 “법륜공은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할뿐만 아니라/…/…나에게 무수한 법신이 있고 학원들이 절대 편차가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으며/…/… 현세에 당신을 원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썼습니다.
책속에서 큰 감동을 받은 저는 주선생과 함께 북경사범대학 교직원 아파트단지에 연공장을 설립, 주선생이 보도원이고 저는 녹음기를 들고 연공동작을 지도했으며 우리들은 매일 대부분 시간을 법을 공부하고 연공하는데 쏟았습니다. 이홍지는 “우리 연공장의 보도원은 사원(寺院)에서 수련하는 주지(主持), 방장과 같다” 했고 대법을 위해 일을 하면 더 많은 덕을 쌓을 뿐만아니라 보통 학원들보다 제고가 빠를 수 있다 했습니다.
1998년 법륜공수련자들이 북경TV방송국 주변을 둘러싼 집회에 저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이홍지의 <뿌리를 캐다>에서 “내가 당신들더러 사람과 결별하라고 할 때 당신들은 오히려 나를 따라 가지 않는다. 매 한번 기회가 더 있을 수 없다”라는 글을 읽으며 속으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르며 금후 원만의 기회가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불안스럽게도 당시 우리 북경사범대학 연공장은 학원이 20여명이었는데 그중 3명이나 선후로 병사했던 것입니다. 공우 장여여(张丽茹)는 감기증상인데 사부가 자기를 도와 소업을 한다 믿고 참으며 병원에 가지 않아 최종 간암으로 사망했고 학원 유(刘)모 역시 병이 있으면서 치료를 받지 않아 폐암으로 사망했으며 보도원인 주숙청선생은 두통이 있은지 오래고 나중에는 학원들의 법 공부도 조직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도 저는 정신 차리지 못하고 그들이 “정과를 수련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저도 중도에서 수련을 그만두게 될가 걱정, 원만에 이르는 그날까지 여생에 다그쳐 정진실수(精进实修)하리라 결심을 다졌습니다.
1999년 4월 24일 오후, 대학교 밀집지역 총괄 담당자 막모(小莫)로부터 저와 연공장 신임 보도원을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화통지를 받았습니다. 저희들이 회의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0-50여명의 보도원들과 팀장, 그리고 지역 총괄 부담당 장보산(张宝山, 전에 이홍지 기사였음) 등이 회의장에 와 있었습니다.
막모가《나는 청소년들의 기공수련을 찬성하지 않는다》란 하조휴(何祚庥)의 문장을 한번 읽어주고 나서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들을 고험할 시각이 다가왔습니다. 학원 모두에게 내일 아침에 중남해에 가라 통지해 주십시오. 명심해야 할 점은 조직이 있다 하지 말고 자원해서 가는 것이고 개인 행위라 말해 주십시오”.
회의후 우리 보도원들은 이 통지내용을 각자 연공장 학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저는 <전법륜> 한권을 몸에 지니고 22선 뻐스를 타고 부우가 중남해 서문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많은 법륜공 학원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중 나서서 질서를 유지시키는 사람이 있었는데 앞에 있는 학원은 서고 뒤에 있는 학원은 힘들면 앉아도 된다 했습니다. 저는 나이가 들고 건강이 좋지 않았으므로 담벽에 기대앉아 <전법륜>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였고 외지의 학원들도 연달아 도착했습니다.
법륜공에서 파견한 대표가 나온후 아무 결과가 없어 두번째 대표팀이 다시 파견돼 들어갔습니다. 점심이 다 될때까지 기다리다 저와 공우들은 배가 고파 간이 식당에서 떡을 사먹고 계속해서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식당에서 돌아오니 누군가 “결과가 있기 전에는 다들 움직이지 말라” 전달했습니다. 저와 공우들은 계속 기다리며 감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저녁 9시 넘어서야 법륜공연구회의 이창(李昌)이 신분을 밝히며 다들 어서 철거하라 했고 우리들은 그제야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과 며느리가 조급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며느리는 “이홍지를 위해 목숨을 내 거는데 그 사람은 왜 밥 한끼 책임져주지 않는가?” 퉁명스럽게 물었고 남편도 “그래 중남해가 당신이 갈 곳인가? 나라 망신 다 시키면서, 당신이 학생을 가르치는 스승이 맞아? 국가 중요 부처 300미터 주변에 재류해서는 안된다는 걸 모르냐?” 화를 냈습니다. 남편의 말에 저는 스스로 꿀려 이홍지가 왜서 고험 장소를 중남해로 정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지금 뒤돌아 다시보면 법륜공은 정말로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홍지는 “법륜세계는 육신을 가지며” 자기가 “진정으로 수련하는 학원들의 신체를 정화(净化)”해 줄 수 있다 했지만 우리 연공장에서는 공우 셋(주선생은 2001년에 뇌종양으로 사망)이나 사망했습니다. 이홍지는 또 “수련인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말했지만 결국은 우리 수련인들을 정치의 격랑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