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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공사건이 나를 깨우쳤다

2012-03-21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유진리

유진리(刘晋莉), 49세, 중경(重庆)시 대도구(大渡口)구에 살고 있다. 본적이 산서(山西)성 후마(侯马)시인데 1992년 남편이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남편따라 중경에 왔고 그때 부터 우리는 계속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남편이 일에 바삐보내는 만큼 다달이 넉넉한 수입이 들어오는 덕에 나는 중경에 온 후 일자리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전업주부로 살았다. 1996년 3월 매일 할일없이 집에 있던 나는 이웃에 사는 오씨의 소개로 법륜공을 알게 됐다. 그는 법륜공을 수련하면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며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가정이 득을 얻게 되고 /‘원만/’후 천국으로 갈수 있다며 연공후 “득을 얻은” 많은 실례를 들었다. 이렇게 나는 연공을 시작했고 인차 심취됐다. 여유시간이 충분하고 가정조건이 좋고 법륜공 신앙에 극히 집착했으므로 주변 공우들은 나를 높이 받들고 늘 우리집에 몰려와 연공심득을 교류했다.

이런 환경에서 나는 자신만만하여 법륜공 공부에 더더욱 열중하게 됐고 남편의 감수도 헤아리지 않고 아내로서의 책임을 철저히 포기했다. 사부의 말대로 나는 철저히 명리정(名利情)을 내려놓고 집착심을 버렸다.

1999년 7월, 정부에서 법륜공을 취체했다. 3년 남짓이 연공을 하던 나는 그 갑작스런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진,선,인/’을 선양하고 사람들을 /‘좋은 사람이 되라/’하는 법륜공이 사교라고는 절대 생각지 못했다. 남편이 연공을 그만두고 정 심심하면 내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노라며 마땅한 일을 찾아하라 했다. 그 말에 나는 화를 내며 연공이 그래 마땅한 일이 아닌가? 많고도 많은 /‘큰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했다. 일상 업무에 바쁜 남편은 몇번 권하다 말을 듣지 않자 다시 관여하지 않았다.

그후 오랫동안 나는 시종일관하게 사부의 각 단계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수련하여 자신을 제고하고 /‘원만비승/’, /‘성선성불(成仙成佛)/’의 목표를 향해 분투했다. 주변의 많은 공우들이 연공을 그만뒀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신념을 동요하지 않고 오직 이 길을 따라 계속 나아가야만 광명을 볼 수 있다 굳게 믿었다. 이런 아름다운 미래를 동경하며 나는 연공을 견지하는 주변의 몇명 밖에 남지 않은 공우들과 함께 결연히 /‘정진/’의 길을 걸었다. 이렇게 8년간이나 걸었다.

2007년 11월 25일 오후, 공우 장여(张茹) 등이 나를 찾아와 공우 이옥금(李玉琴)이 심한 폐결핵을 앓는데 집단발공으로 그녀를 도와 병을 치료해주자 했다. 이옥금은 병에 걸린후 병원 한번 가지 않고 소업을 위해 죽음으로 남편을 협박했다 들었다. 나는 두말없이 공우들과 함께 이옥금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옥금 남편이 우리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종종 구실로 우리를 돌아가라며 이옥금의 병이 전염성이 아주 강한 병이라 겁을 줬다. 너무나 허약하고 위급한 난에 처해 있는 이옥금을 보며 “대법제자의 수련은 개인 /‘원만/’을 위해서만은 아니다/…/…/‘중생을 구도함은/’ 대법제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란 사부의 말을 떠올리며 기어이 공우의 생명을 구해내리라 결심했다.

그날 이옥금의 남편이 애써 우리를 돌려보내고 옥금이를 병원으로 가자 재촉했지만 이옥금은 대법을 믿고 사부를 믿고 공우들을 더 믿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남편을 거절하고 우리를 자기 옆으로 가까이 오라 했다. 이렇게 우리 네 공우는 이옥금의 침대 주위를 둘러싸고 집단발공으로 그녀의 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한번, 두번, 세번/…/…2시간 남짓이 어두워질때 까지 발공했지만 이옥금의 상황은 아무런 호전도 없었다.

다들 발공을 다시 시작하려고 준비할 때 이옥금이 갑자기 심한 기침과 함께 벌건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정경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우린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쩔바를 몰라 떨었다/…/… 이옥금의 남편이 언제 120을 불렀는지도 몰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응급차가 도착했다. 의료일군들이 환자를 들것에 들고 나가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후과에 대한 강한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주눅이 들어 얼른 자리를 피해 나왔다. 치료 지연으로 이옥금은 입원한지 얼마 안돼 인차 불행하게 사망했다. 이 비보에 발공에 참여한 우리들은 후회막급이었다. 양심적 가책은 물론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최종 우리 넷은 그 누구도 이옥금의 장례식에 참가할 엄두도 못냈고 또 그럴 체면도 없었다.

이 사건후 나와 기타 세 공우들은 점차 법륜공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고 사부의 공능에 질의를 들이댔다. 대체 사부의 말이 효력을 상실했는가? 법신이 소용없는가? 아니면 우리들이 처음부터 속임수에 넘어갔는지, 그후 사회지원자들의 도움으로 나는 /‘대법/’을 멀리하고 평범한 행복한 삶을 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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