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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사망일기(포토)

2011-11-24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이충조


딸 이천(李倩)의 생전 사진


이충조(李忠朝), 55세, 고중 학력, 사천성 성도시 용천역(龙泉驿)구 대면진(大面镇) 사람이며 농촌 의사다.


지금도 죽은 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고 자살 전 딸이 남긴 유서는 나를 평생을 두고 뼈저리게 후회하게 했다. “아빠, 엄마, 당신들은 왜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하나요? 이 딸은 당신들이 더는 연공하지 말기를 빌어요. 우리 가정, 그리고 저의 대학 꿈은 죄다 법륜공때문에, 당신들 때문에 파멸됐어오. 당신들이 진정으로 법륜공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그날이 있기를 바래요. 그렇다면 저는 죽어도 원이 없겠어요/…/…” 

자초지종을 말하자면 전에 나는 개인 진료소를 경영하며, 귀엽고 말 잘 듣는 딸, 순박한 아내 세식구서 살았고 평시에 환자들 병을 봐주는 외에 추가로 과수원을 운영해 매년 상당한 수익을 올려 남들이 부러워하는 풍족하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

나는 대대로 전해오는 비법으로 사람들 병을 봐 줄 따름이지 자격증이 없는 의사다. 가업을 잇기 위해 나는 딸 교육을 잘 시켜 의과대학에 보내 정식 의사로 키우리라 결심했고 이 역시 우리 가정의 가장 큰 소원이었으므로 딸 공부가 나의 제일 큰 관심사었다. 1998년 7월 딸은 전교에서 2등으로 현지 가장 좋은 중점중학교--용천중학에 입학했고 우리 일가는 기쁨과 기대에 부풀었다.

바로 그해 하반년, 내가 지인의 소개로 법륜공 연공을 시작했고 점차 심취되어 일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시초 나는 호기심으로 연공이나 하고 신체단련이나 하자 시작을 했지만 점차 심취되면서 연공할때면 자신의 경계가 승화돼 마치 다른 세계에 진입한것 같았고 그러면서 주변의 /‘속인/’들을 얕잡아 보고 공우들과만 내왕을 했다. 하루빨리 공덕을 쌓고 층차를 제고하기 위해 나는 진료소를 찾아오는 환자 한명 놓칠세라 /‘홍법/’을 진행했다. 천성이 순박한 아내도 내 동원하에 수련에 가담했다.

집안 형편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딸에게 주는 생활비가 줄었고 연공전 처럼 딸의 이모저모를 일일히 관심하거나 챙겨주지 못하고 거의 무관심하다 시피 했다. 이런 심각한 변화를 느꼈는지 딸은 최초 호기심을 갖던데로 부터 기를 쓰고 연공을 반대했고 엄마, 아빠가 연공을 시작한후 부터 집이 집 같지 않다는 말 입버릇 처럼 했다. 딸은 우리를 애써 권해 소용없자 더 권하지 않았고 우리와 어쩌다 한번씩 연락을 했다.

1999년 7월 국가에서 법륜공을 취체하자 딸은 흥분해서 우리에게 그 소식을 알렸고 우리가 그날부터 당장 연공을 그만두는 줄 알고 기뻐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한사코 그만 둘 생각없이 사람들 눈을 피해가며 연공했다. 딸은 귀가때마다 하루하루 퇴락해 지고 있는 우리가정과 괴이쩍게 횡설수설 늘어놓는 우리 모습을 보며 깊은 실망에 빠졌다. 

2000년 6월의 어느 하루, 찜통더위를 무릅쓰고 집에서 한창 가부좌 연공에 집중하고 있는데 우체부가 편지 한통을 배달해왔다. 딸이 나한테 보내는 기긴 편지, 난생 처음 받아보는 딸의  편지었다. 편지에서 딸은 제발 더는 연공하지 말라 애절하게 빌고 빌었고 권하고 또 권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법륜공에 너무 깊이 빠졌을 때라 글이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강 훑어보고는 분노에 차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딸을 수련노정에서의 /‘마(魔)/’로 취급했다.

그러고도 분이 삭지 않아 전화로 또 한바탕 야단을 쳤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지금 우리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너한테 좋으라 연공하고 있잖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들처럼 함부로 허튼소리 하지 말아, 우리는 /‘진선인/’을 말하고 좋은 사람이 돼, 네가 함부로 사부를 존중하지 않고 법륜공을 모독했다간 보응을 당할 줄 알아 !”


그러자 성토를 시작하는 딸의 울음섞인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아빠가 밤낮 그렇게 연공해서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을 가져왔는지 모르겠어요. 아빠는 연공하면서부터 우리집 돈을 다 가져다 법륜공자료들을 잔뜩 사서 무더기로 무져놓고 내 생활비를 줄이고, 난 반반한 옷 하나 없이, 식당에서 제일 싼것만 골라 사 먹고 있어요. 당신들이 법륜공에 심취된 꼴과 멀쩡하던 우리 가정의 오늘 이 꼴 생각하며 나 혼자 숙사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아세요? 당장 내야 할 복습자료 비용과 다음학기 학비를 마련할 대책 하나 없이 아빠는 법륜공밖게 몰라요. 언녕 나를 잊었고 우리 가정을 잊었어요. 나를 그렇게 아끼던 옛날의 아빠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요/…/…”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수련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 빨리 사부따라 /‘원만/’하기 위해  결정적인 순간에 대법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는게 무엇보다 더 중요했다.

이렇게 나와 아내는 예전과 다름없이 사람들 눈을 피해 연공했고 차로 반시간 거리 밖게 안되는 학교에서 딸이 거의 집에 오지 않아도 대학입시 준비에 바빠서려니  생각하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2001년 3월 6일 밤 9시가 지나, 공우와 함께 집에 숨어 경문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당신의 딸이 큰 일 났습니다. 어서 학교에 와 주십시오/…/…”라는 담임선생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연공이고 뭐고 다 제쳐놓고 일종의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당장 택시를 타고 학교로 달렸다.

그제야 우리는 딸이 투신 자살로 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피범벅이 된 딸의 시신을 보며 청천벽력 같아 삽시에 눈앞이 아찔해나며 혼절해 버렸다/…/…금이야 옥이야 키운 내 딸이 열일곱 꽃 나이에 이렇게 우리곁을 떠날줄이야, 아무리 애써도 눈앞의 현실이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딸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딸의 일기장에는 행복했던 지난날에 대한 아름다운 회억과 동경, 그러나 더 많이는 부모가 법륜공을 수련하고 있는데 대한 질책과 무기력을 호소하는 내용들이었다. 딸은 임종전의 마지막 한편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아빠, 엄마, 당신들은 왜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하나요? 딸은 당신들이 더는 연공하지 말기를 빌어요. 우리 가정, 그리고 저의 대학 꿈은 죄다 법륜공때문에, 당신들 때문에 파멸되고 말았어오. 당신들이 진정으로 법륜공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날이 있기를 바래요. 그렇다면 저는 죽어도 원이 없겠어요/…/…” 

우리 부부는 언녕 법륜공의 사교본질을 철저히 인식했다. 그러나 딸을 생각할때마다, 딸이 자기 목숨으로 부모를 구할 생각까지 했다는 그  대가를 우리는 너무나 감수하기 힘들다. 얼마나 우리가슴 갈기갈기 찢어주는 아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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