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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거부로 세상 뜬 시누이가 나를 정신차리게

2011-03-22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우화

나의 이름은 우화(于华), 1979년 출생, 하남성 안양시 은도(殷都)구 주민, 현재 안양시 모 상점에서 정수기제품을 대리하고 있다.

1997년 안양강철기술학교에 입학한 나는 어느날 방과후 안양시 안양강철영화관 광장을 지나다가 숱한 사람들이 가부좌하고 앉아 음악 리듬에 맞춰 연공하고 있기에 호기심에 앞으로 다가갔다. 한창 멋부리는 나이여서 자신의 몸매와 맵시에 신경을 꽤 쓰던 중이라 현장에서 법륜공을 연공하는 사람이 연공을 하면 자신의 소원대로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신바람나게 인근 일용품 상점에 달려가 둥근 방석을 사 들고 연공대오에 가입했다.

연공과정에서 나는 지금의 남편을 알게 됐다. 외모가 출중한데다 직장도 좋았고  나한테 각별히 좋게 대했고 게다가 우리들에게는 법륜공연공이란 공동취미가  있었으므로 우리 둘은 곧 사랑에 빠졌다. 마침 그때 그의 누나 이하화(李荷花)가 우리 연공장의 책임자로 있었다. 누나는 공우들앞에서 내가 접수능력이 강하고 법 학습이 빠르다 자주 칭찬했고 사랑에 힘 입은 나는 법륜공연공에 더더욱 열을 올렸다. 결국 공부성적이 좋지않아 안양강철회사에도 입사하지 못했다. 법륜공에 미쳐버린 당시의 나는 뉘우치기는 커녕 법륜공을 끝까지 따르려는 신심만 더욱 굳게 다졌다.

1999년 7월 정부에서 법륜공을 취체한후 대부분의 공우들은 연공을 그만뒀다. 그러나 나와 남편은 더/‘전심수련/’했고 가정이고 사업발전이고 전혀 념두에 두지 않았다. 천진에 계시는 친정부모가 내가 집에서 백수로 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양시 제1백화점 국미전기상점에서 정수기 제품을 대리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줬으나 법륜공에 심취된 나는 영업개시도 전에 몇만원 손실을 냈다.

그러다 시누이 이하화가 병치료 거부로/‘원만/’승천한 후 우리 부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게 됐다. 


 

이하화

이하화, 1956년 출생, 고중 학력, 안양시 모 국영기업의 퇴직 종업원, 고혈압을 앓고 있던 그는 1996년 법륜공수련이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연공을 시작했고 안양강철영화관광장 법륜공연공장 책임을 맡았다. 이홍지와 법륜공조직의 “나오라”는 부추김과 선동으로 그는 탕음(汤阴)현 법륜공조직에서 조직한 소동에 참여했고 선후로 정주, 북경 등지를 다니며 /‘호법/’을 진행했다.

법륜공수련후 이하화는 약을 먹지 않았고 2005년 초 고혈압 가중으로 노출혈이 발생했다. 중병중에서도 그는 가족들이 아무리 권해도 병원치료를 거부했고 “사부님이 신변에 있으므로 사부님이 나를 구해줄것이다”고 고함질렀다. 일단 사람부터 구해야겠다 조급해난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줄로 묶어 병원으로 호송했다. 병원의 구급치료로 생명을 건지긴 했으나 건강회복기간 치료에 협조하지 않아 병세는 재차 악화됐고 전신마비를 초래했다. 2007년 6월 중병중인 이하화는 두번째로 병원 호송중 /‘사부/’ 이홍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51세에 영영 눈을 감았다.

그가 돌아간후 정신타격으로 형편없이 초췌했진 남편은 지금까지 양로원에 거주하고 있고 성격이 활달하던 딸도 어머니를 잃은 고통에 우울해 있더니 어딘가 멀리 떠나버렸다.

우리부부는 법륜공이 시누이 일가에게 가져다 준 비극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법륜공 수련 14년간의 득과 실을 따지게 됐고 법륜공을 믿지 않게 됐으며 최종 법륜공사교의 속박을 벗어나 새롭게 정상인의 생활궤도로 돌아왔다. 남편은 직장 대가정에 다시 융합됐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으며 내가 하는 일도 노력끝에  안정적으로 운영돼 가고 있으며 우리 일가는 행복을 되찾았다.

(Kaiwind.com, 201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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