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치푸(蒋其福)와 바이아이즈(白爱芝)는 항저우(杭州)시 위항(余杭)구 황후(黄湖)진 왕워이산(王位山)촌의 평범한 부부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아들은 군에 갔다가 제대 후 은행 현금 호송원으로 일하고 있고 딸은 저쟝(浙江)중의약대학 빈쟝(滨江)학원을 졸업하고 순리롭게 풀리면 침술사로 되어 병원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딸이 /‘전능신/’에 매혹되어 가출한 실종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고 가정의 평화로운 삶이 /‘전능신/’에 의해 산산쪼각이 났다.
3년동안 쟝치푸가 실종자 찾는 광고를 온데 붙혔으나 종무소식이다. 그의 핸드폰에 아직도 피끓는 청춘의 방실방실 웃는 딸 모습을 저장하고 있지만 목소리는 들어본지 너무 오래다.
4식구 가정 한 사람 줄어
쟝치푸의 집은 항상 짙은 한약 냄새가 풍긴다. 딸을 찾기 위해 심신이 지질대로 지친 이들 부부가 건강이 갈수록 떨어져 쟝치푸는 내내 한약으로 몸을 조리해야 했다. 거실 한복판에 십자가가 걸려있는데 부부가 기독교를 믿는다. 딸 쟝샤진(蒋霞金)도 원래는 기독교를 믿었는데 후에 잘못 된 길에 들어섰다.
딸 말이 나오자 바이아즈가 눈굽을 찍고 옆에 있는 남편도 표정이 쓸쓸하다. 식구 한 사람의 실종으로 온 가정이 항상 우울한 기분에 휩싸여 있다. 부부는 3년이 넘도록 딸을 보지 못했다. 2012년 12월 4일 딸 쟝샤진이 글 한 통 남기고 가출했는데 아직까지 종무소식이다.
화목했던 가정
쟝치푸의 가정 조건은 좋은 편이 아니다. 연거퍼 이어진 교통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진 쟝치푸는 경비실을 지키는 일 밖에 할 수 없고 아내 바이아이즈는 공장 식당에서 일하는데 종업원들 아침식사 때문에 새벽 3-4시면 출근을 해야 한다. 출근의 편의를 위해 부부가 가끔 직장에서 자기도 했다. 아들 딸이 일찍 철 들어 부모가 집에 없으면 저절로 빨래하고 밥을 지어 먹었다. 특히 딸 샤진이 거의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생활이 여유롭지는 못했지만 가족들은 좀 더 참으면 생활이 차츰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2004년 샤진이 대학에 진학, 저쟝중의약대학 빈쟝학원 침술맛사지학부에 입학했다. 그런데 해마다 만원 넘는 학비가 부부 한 달 수입 합쳐 3000원인 가정에는 거액이나 다름없다. 설이나 명절이면 아내가 악세살이 등을 구입해 자전거에 싣도 핑요우(瓶窑)진에 가서 팔아 가정살림에 보탰다. 군에 간 오빠가 매달 받는 생활보조금 800원에서 절반은 누이동생 용돈으로 사용됐다. 온 가족이 유일한 대학생 뒷바라지에 힘을 모았다.
운명은 2011년에 큰 변화를 겪게 돼
2011년, 딸 샤진이 쇼산(萧山)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에 돌아와 직업의사자격증 시험 준비에 달라붙었다. 11월에 시험을 마친 후 부모에게 설 대목을 틈타 돈 벌라 떠나겠다고 했다. 철 든 딸이라 부부는 큰 걱정 없이 살아왔다. 지금까지도 쟝치푸는 딸이 그때 어느 회사로 떠났는지 모르고 딸이 간 곳이 빈쟝인 것만 알고 있다. 부부가 내내 후회하고 있지만, 말 잘 듣는 효녀 딸이 바로 그곳에서 /‘전능신/’을 접했기 때문이다.
2012년3월, 쟝치푸가 샤진의 상태가 이상한 데 /‘나쁜 길에/’ 들어선 것 같다는 기독교 신자의 전화를 받고 급급히 딸에게 전화했더니 짜증을 내며 사표 내고 집에 돌아오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바이아이즈가 앓는다는 핑게로 딸을 속여 집에 오게 만들었다. 그런데 종래로 말대꾸 한마디 할 줄 모르던 딸이 이번에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어머니와 한바탕 다투고 부모 말을 듣지 않았다. 딸이 주회입마되었다고 판단한 어머니는 화김에 샤진을 한바탕 때리고 집에 가뒀다.
“제가 막일을 하다보니 화가 나 손을 댈땐 꽤 맵짠 편입니다.” 지금도 바이아이즈는 그때 일시적인 충동을 후회한다. 딸에게 상처를 줘 마음 아프다. 모녀간의 냉전이 한달간 지속되었다.
딸이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평소에 많이 나가다니지 않아 부부가 여태껏 안심했다고 바이아이즈가 말한다
조용한 나무에 바람이 자지 않는다
모녀간 냉전이 바이아이즈의 굴복으로 끝났다. 바이아이즈가 샤진을 데리고 상점을 돌며 옷을 사주고 금 목걸이를 사주려 했다. 금목걸이 살 형편이 아니지만 딸 기분 좋으라고 돈을 빌릴 타산이었다. 필경은 모녀간에 혈연의 정이 있어 어머니가 양보하자 딸의 태도도 바뀌고 목걸이를 사양하고 꼭 고치겠다고 어머니에게 약속했다.
그때 딸이 진심으로 회개하려 했음을 바이아이즈는 느꼈다. 년말 전의 시험을 통과해 받은 의사자격증으로 샤진이 황후진 보건소서비스센터의 침술의사로 일하게 되었다. 매일 수업 끝낸 손녀 데리러 지나갈 때마다 바이아이즈는 딸의 사무실에 들려 잠깐 만나군 했는데 모녀관계가 예전처럼 회복된 줄 알았다.
샤진은 황후진 최초의 침술맛사지의사자격증 소지자, 부모의 큰 자랑이었음
그런데 샤진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차츰 딸이 자기를 싫어하는 기색을 발견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직장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샤진인데 휴일이면 이상하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전능신/’의 사람들이 다시 딸과 연락했다고 추측했지만 어렵사리 회복된 모녀 사이를 다시 깨고 싶지 않았다.
2012년12월3일, 딸이 낯선 두 사람을 데리고 어머니가 일하는 곳을 찾아와 언강생심 어머니를 /‘전능신/’에 가입시키려 들었다. 결국은 모녀가 한바탕 다투고 딸이 나가면서 “엄마, 잘있어” 한마디를 남겼지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튿날 딸이 글을 남기고 가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전화 3통이 영별로?
샤진이 가출한 후 집에 전화를 세 번 걸어왔다. 일자리를 찾고 있으니 설 지나고 돌아오겠다 했다. 하지만 섣달 그믐날이 지나고 초닫새가 지나고 딸이 돌이오겠다는 기한이 지나도 쟝치푸 부부는 딸 소식을 받지 못했다.
속수무책인 부부가 딸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런 두서도 잡히지 않았다. 딸 대학동창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딸 소식 있으면 알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헛고생만 했다. 바이아이즈가 /‘전능신/’ 집회장소를 알아내 곳곳을 다니며 딸을 수소문했다. 상하이 주변의 작은 진료소들까지 혹시나 딸이 그곳에서 일하는지 해서 찾아다녔다. 실은 자신도 전혀 가망 없는 수소문인 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소식없자 그들은 딸이 전화를 걸었던 곳을 찾아 실종자 광고을 붙히고 중앙TV에 /‘딸 찾기/’ 구조를 요청했지만 종무소식이다. 집을 나서면 습관적으로 사방을 두리번 거리는데 딸이 불쑥 나타나기를 바라고 바랬다.
/‘전능신/’이 딸을 앗아갔다
이들 부부는 뼈저리게 /‘전능신/’을 증오한다. 쟝치푸에게 종이 한 장 있는데 거기에는 /‘전능신/’의 유래, 두목 조유산(赵维山) 이름과 공안기관에서 벌인 /‘전능신/’에 대한 특별 타격행동 등이 적혀있다. 부부가 뉴스를 보면서 적은 것이다.
고생스레 키운 딸이 어째서 /‘전능신/’에 미혹되여 이토록 깨우치지 못하는지 그들은 이해 할 수 없다. /‘전능신/’이 그들의 딸을 앗아갔고 가정에 지울 수 없는 먹장구름을 끼얹었다. 바이아이즈는 고혈압에 신장병을 앓고 있고 쟝치푸는 면역력이 저하되어 자주 고열을 앓는다. 그들 부부는 해마다 이런저런 병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아니라면 두 부부는 철저히 절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쟝치푸의 핸드폰에 아직도 딸 사진이 저장돼 있고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본다
딸에 대한 부모의 자책감
3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딸 소식은 전무하다. 그들 부부는 딸이 이미 저쟝을 떠났다고 추측한다. 신분증 온라인 조회가 아직까지 저쟝성 성내에서만 가능하다. 범죄자에 한해서만 전국 범위 내 온라인 수배가 가능하다. 파출소는 여태껏 쟝샤진에 관한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바이아이즈는 매년 300원의 딸 의료보험을 계속 내고 있다. 딸 방도 그대로 두고 정기적으로 청소한다. 모녀가 다툴 때 샤진이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었다고 피뜩 말한 적 있다. 그런데 부모가 무관심해 딸의 이런 상황을 전혀 몰랐었다.
샤진의 방, 이를 부부는 아직도 딸 방을 그대로 두고 정기적으로 소제해 방이 깨끗했다
그때 생계 유지를 위해 허덕이느라 딸한테 신경을 못 썼다고 바이아이즈는 몹시 후회한다. 딸을 배불리 먹이고 공부시키기 위해 안깐 힘을 다 해 돈을 버느라 철든 딸 행동 베일에 숨겨진 자격지심 같은 것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바이아이즈는 가정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았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 때 샤진의 학비를 대지 못해 친지 여덟 사람한테 손을 내 밀었다 모두 거절당해 공장 빈터에서 엉엉 울다 눈물을 닦고 집에 돌아 간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다만 이런 결과가 있을 줄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책임편집: 후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