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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목격한 법륜공

2013-12-10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손봉량(구술)왕서민(정리)

북경시 해정구 사계청(四季青)가도에 살고 있는 52세의 손봉량(孙凤良)입니다. 저와 남편은 지인의 중매로 사귀면서 마음 맞아 결혼했고 아들을 얻어 더 행복했습니다. 호적도 농촌에서 도시 주민 호적으로 전환되어 안락하게 살았습니다. 1996년 언니가 법륜공을 연공한 후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는 효능이 있다며 저에게 <전법륜> 한권을 주었습니다.

법륜공에 가입한 후 저는 애써 /‘진선인(真善忍)/’의 요구대로 하려 했고 생활에서 남편과 마찰이나 갈등이 생길 때면 가능껏 참고 마음이 편안하지 않더라도 불화를 피하며 저의 변화로 법륜공이 좋다는 남편의 인정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전법륜>을 한번 읽고 난 남편이 “이홍지란 사람은 자기를 기껏 추켜올리고 타인을 폄하하는 소인이다. 이런 사람이 무슨 고덕대법을 전수한다고 그래! 거기에 속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선생님을 비방하는 남편의 말에 마음속으로 불쾌한 저는 서로가 법륜공을 믿던 말던 다시는 상관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정부에서 법륜공을 단속한 후 남편은 저에게 연공하지 말라 당당하게 권했고 병원에 가서 봐야 할 병이면 병원에 가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스스로 건강이 전보다 좋아졌다고 느끼며 하루라도 법 공부와 연공을 중단하면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연공장의 공우들이 “은혜는 배로 갚는다고 우리가 사부를 위해 청원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때부터 점점 수습할 수 없는 경지에 치달았습니다.

한번은 공우들과 함께 소란 피우다 경찰에 잡혀 구치소에 끌려갔는데 건강 검진에서 혈압이 220까지 올라 심장박동 그래프가 꺼꾸로 된 U자형으로 그려져 병이 중하다고 판단한 구치소에서는 저를 집에 돌려 보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몸에 병이 있다는 가상으로 법적 형벌을 면하도록 /‘사부(师父)/’가 도운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귀가 후 남편과 아들이 무릎을 꿇고 병원에 가자고 빌었고 “진료만 받으면 어떤 요구든 들어주겠다”는 아들 말에 저는 “내가 하는 법 공부와 연공을 절대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를 제출했습니다. 남편은 침묵을 지켰고 아들이 그러겠다고 선뜻 대답했습니다. 할 수 없이 저는 공우들 눈을 피해 강압약을 복용했고 건강이 좀 회복되자 또 공우들과 연락했습니다. 어느 날 공우 2명을 집에 불러 함께 법을 공부하고 연공을 하다가 갑자기 귀가한 남편에게 발견됐고 공우들이 돌아가자 남편이 다짜고짜로 저의 뺨을 두번이나 힘껏 후려치며 호통쳤습니다. “죽어도 고치지 않는 당신 차라리 내가 때려죽이는 게 법륜공에 당해 죽는 것 보다 낫겠다.” 그 말에 저는 “난 대법제자다. 이선생님의 법신의 보호가 있다”며 추호도 잘못을 뉘우치는 태도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또 저에게 줄매를 안겼습니다. 아들이 돌아온 후 저는 “난 살 재미가 없다. 네 아빠가 법륜공을 연공 못하게 할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서럽게 울었고 아들은 절망에 찬 저에게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고 물었습니다. “출국할테다. 미국에 가서 사부를 찾을 테다. 외국에서는 법륜공을 단속하지 않는다더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빡빡한 일정에 서둘러 준비한 저는 아들 며느리 신혼 여행을 따라 간다는 명의로 간신히 미국 로스앤잴레스에 갔습니다.

도착해 임대방을 찾은 후 아들은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저는 법륜공을 찾느라 바빴습니다. 그런데 전에 듣던 어디 가나 법륜공을 쉽게 찾을 수 있다던 풍문과 전혀 달랐습니다. 많은 중국계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겨우 한 사람이 “중국슈퍼 문앞에 연공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르켜 주었습니다. 흥분한 저는 가족을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슈퍼를 찾아가니 방대한 연공대오는 보이지 않고 고작 10여 명이 연공하고 있었습니다. 연공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착해 보이고 말을 걸기 쉬울 것 같은 언니 한명에게 다가가 “대륙에서 왔는데 박해 때문에 연공환경이 없어 미국에 사부를 찾으러 왔고 공우들 찾으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황씨 언니가 사부는 로스앤젤레스에 계시지 않고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며 “금방 와서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이 10여명도 여러 파로 나뉜다” 귀띔했습니다. 그 말에 저는 어안이 벙벙하여 다 같이 법륜공을 연공하면서 왜 서로 다른 파로 나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황씨 언니는 저의 사정을 알고 월 60불 임대가격으로 방 한칸을 비워줄테니 거처를 자기네로 옮기라고 열정적으로 도와나섰고 그의 남편은 저의 아들에게 일당 20불짜리 식당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황씨부부가 너무 고마워 “그래도 대법제자들과 함께 있어야 친근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식당에서 일하고 일당을 계산할 때에야 식당은 황씨 남편에게 일당 40불씩 지불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황씨 남편이 중간에서 20불을 떼먹었음을 알고 화가 난 아들이 식당 일자리를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았고 저도 다른 공우의 소개로 현지 /‘대기원보/’ 주소를 알아냈습니다.

불가사의한 것은 제가 대륙에서 금방 왔다는 것을 안 그들이 저를 심하게 경계하는 눈치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법 공부와 연공하는 사람들을 큰 팀, 작은 팀으로 나누는데 작은 팀은 겨우 10여명이고 이 곳에 온지 3개월 미만의 신인들로 구성됐으며 그들은 3개월간의 수습기를 거쳐야만 큰 팀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작은 팀 성원들은 함께 법 공부와 연공을 하는 외에 대기원 신문을 자원봉사로 배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팀의 성원은 큰 팀의 일들을 알려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차츰 가까워지자 임씨란 공우가 제가 날마다 같은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보더니 자기 신지 않는 구두 한컬레를 저한테 주는 것이었습니다. 금방 받는데 저보다 먼저 미국에 온 여공우가 “당신이 신으면 작으니 그만하고 내가 신자”며 제가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어느 새 그 신을 챙겨갔습니다. 내심 불쾌했지만 신경쓰지 말고 /‘진선인/’해야 한다고 스스로 달랠 수 밖게 없었습니다.

저는 “약을 먹으면 업력을 도로 눌러 내려 보낸다”는 이홍지의 말과 그가 <20년 설법>에서 한 “정법이 최후에 이르렀다”는 이론을 믿고 미국에 온 후 한번도 강압약을 복용하지 않았고 최후의 /‘원만/’의 시각이 다가오기만을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2012년의 마지막 날이 왕년과 마찬가지로 그 해를 조용히 넘겼고 /‘신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함께 법 공부를 하면서 /‘법리를 깨닫는/’ 과정에서 공우들 사이에 분쟁이 늘 발생했고 서로가 종종 부딛쳐 저의 심정은 늘 우울했습니다. 출국 시 갖고 온 돈은 얼마 남지 않았고 돈 쓸 일은 많고, 날마다 국수로 끼니를 때울수 밖에 없었습니다. 건강도 날로 악화돼 어느 날 끝내 앓아 눕게 되었고 고열이 날 때면 환각이 나타나 “원만의 시각이 왔다. 사부가 용차(龙车)를 보내 나를 하늘로 데려간다. 아들도 더는 나와 같이 고생하지 않는다”고 헛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아들이 놀라서 어쩔바를 모른 채 저의 병을 치료할 돈을 빨리 송금하라고 국내에 있는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미국에 온지 2개월 넘는 동안 저의 몸 무게는 10킬로나 줄었습니다. 바람에 쓰러질 것 같은 저를 보며 더럭 겁이 난 아들은 국내 조건이 여기 보다 좋으니 귀국하라고 권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저는 할 수 없이 낭패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저를 본 남편이 가슴 아프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저를 도와 진료를 받게 하고 약을 구입해 왔으며 몸을 추슬러 줌과 동시에 반사교(反邪教) 자원봉사자들을 청해 저를 감화시키고 설득시켰습니다. 출국 전 저는 정부에서 법륜공을 단속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원망했지만 미국에서의 보고 들은 체험을 통해 정부에서 법륜공을 단속하게 된 용의를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선인/’의 가면을 쓴 어중이 떠중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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