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페이지  >  谣言与真相  >  法轮功侵犯人权案例

아버지 목숨을 앗아간 흉수는 어머니?

2014-11-20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이효려

내몽고 포두(包头) 고양(固阳) 하습호(下湿壕)진에 살고있는 이효려(李晓丽, 28)입니다   

2011 6 3 오후, 저와 아버지는 렌트카를 이용해 가출한지 보름 되는 어머니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집중력을 잃고 급커브에서 속도 조절을 못해 차가 도로를 벗어나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뒷자리에 앉은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꼼짝달싹 몸을 가눌 없고 아버지는 무거운 밑에 깔려있었습니다. 날은 저에게 가장 암흑한 날이었습니다. 과다 출혈로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아 떠난 길에서 생명을 마감했습니다/…/…    

오늘도 저의 귓전에는 그날 길에서 하시던 말씀이 생생히 들려옵니다. “효리야, 엄마는 교를 믿은 후부터 몰라보게 변했다. 모든 포기하고 신밖에 모른다. 그런데 잘못도 있어, 화난다고 손찌검을 했으니까, 엄마가 우릴 따라 올까?”그때 저는 물론 따라와요. 엄마가 이렇게 오랜 세월을 살면서 언제 한번 정말로 아빠한테 화를 내던가요?”라고 위로했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보기에 엄만 이번에 마음을 단단히 먹은 같다. 잘못하면 나와 이혼하자고 수도 있어, 지난번에도 내가 신을 믿지 않으면 같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 엄마를 찾아 구슬려야 ! 다시는 따위 교를 믿지 말고, 우리 백성들이야 살기만 하면 아니겠니?” 길에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아 모시고 와야 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어머니 유수란(刘秀兰) 1958 출생인데 아버지보다 세살 어립니다. 분은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함께 자란 죽마지우입니다. 두분은 종래로 싸운 없고 기껏해야 말다툼 몇마디 하다가 아버지가 누그러들면 어머니도 따라 웃고 끝났습니다. 90년대 아버지가 년간 외지에 나가 공사현장에서 차를 몰았고 어머니 혼자 고향에 남아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셨습니다. 그러다 고생하는 어머니가 걱정돼 아버지가 돌아왔고 이웃 여러 집의 땅을 도맡아 비닐하우스 야채 농사를 시작했고 고생끝에 돈을 모아 시내에 집을 사고 저를 현성에서 공부시켰습니다. 가정 형편이 부유하지는 않았어도 별로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분의 억척스런 노력 덕분에 냉장고, TV 장만하고 식구들이 만족하면서 화기애애하게 살았습니다   

 악몽의 시작 

 

사진 출처: 사이버   

그런데 세상일은 예측 못한다고 2009 겨울, 아버지가 물건을 부리다가 왼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치료 받고 회복하는 동안 아버지가 짜증을 많이 냈지만 어머니 혼자서 모든 집안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밤이면 아버지 상처입은 다리를 주물러 드렸습니다. 어머니의 정성어린 간병덕에 아버지의 기분도 많이 전환되었고 저는 사이가 너무 좋아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상처 치료 때문에 주변 여러 마을의 의사를 찾아다니며 병을 보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아화/’라는 아줌마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화는 어머니에게 언니 명이 극부(克夫). 언니 전세는 남편의 채주이고 금세에 고생시키는 빚을 갚는 건데 아마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겨우 소학교를 졸업한 어머니는 이런 것에 미신적이었습니다. 겁을 먹은 어머니가 어떡하면 좋으냐고 묻자 아화가 나와 함께 교를 믿으면 아무 일도 없다. 교를 믿으면 신이 언니를 보호해주고 가족이 복을 얻게 되고 언니 일가를 재앙에서 벗어나고 무사하게 지켜준다 말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아화의 얼토당토않는 말을 믿고 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어머니가 아무 내색도 내지 않고 예전과 같아서 우리는 어머니가 교를 믿는 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2010 신정부터 구정전 사이에 어머니의 외출이 잦아졌습니다. 2010 여름에 이르러 다리 상처가 완쾌되어 현성에 야채 배달을 갔던 아버지가 마을에 살던 어머니와 함께 교를 믿는 고향 사람을 만나서야 어머니가 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교인가고 물었더니 최신 유행인 기독교인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공부는 얼마 못했지만 바깥세상을 많이 아버지는 기독교는 국가에서 법적으로 허용하는 종교임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최신 유행인 기독교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고향 사람의 말도 어눌했습니다. 어머니의 종교 신앙에 의혹이 아버지는 집에 돌아가서 영문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안/’ 지켜주는 전능신?   

이렇게 아버지가 캐물어서야 어머니는 자신이 전능신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능신이 사교인지도 몰랐고 다만 어머니 같은 문화지식이 없고 순박한 가정 부녀가 혹시 사기를 당할가 걱정되어 교를 믿지 않는 좋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계속 믿겠다며 전능신이 /‘진신(真神)/’이고 신의 국도를 창조하며 여그리스도를 따르면 평안을 지켜주고 복을 받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신을 믿으면 모든 병통이 나아지고 모든 재앙을 면할 있으며 2012년에 세계 말일이 오는데 그때 전능신만이 우리 가족을 지켜줄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말에 저는 웃읍다고 웃었지만 아버지는 침울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교를 믿는다는 사실이 공개된 어머니는 아예 공개적으로 우리 집에서 그들의 집회를 가졌고 아버지와 저에게도 함께 신을 믿자고 했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행동을 단호히 막지도 않았습니다. 사이 저는 처음으로 전능신이 어머니에게 보낸 자료를 봤습니다. 문화가 없는 어머니가 전능신의 따위 책만은 열심히 밤낮 없이 읽었습니다. 어머니는 /‘여그리스도/’ /‘영화(灵话)/’ 자신의 모든 생활을 지도하려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이런 것들에 날로 반감이 생겨 일하지 않고 먹고 살려고? 당신 같은 사람들은 굶고 말라 비꼬았습니다. 그렇지만 홀딱 반해버린 어머니의 외출 빈도는 날로 잦았습니다.   

차츰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도 예전과 같지 않았고 농사일도 방치했습니다. 안팎이 엉망이 되어도 그대로 방치하고 지어 밥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지난날 가정을 위해 수고했다고 아버지는 말없이 참고 견디며 몸이 불편해도 계속 일을 했습니다. 그때 결혼해 시집에서 때라 제가 있는 일이라면 가끔 아버지를 도와 집안일이나 해드리는 뿐이었습니다.   

2011 상반 , 어머니가 /‘복음 전달/’하러 다니느라 가출을 시작했고 한달이 지나서야 귀가한 적도 있습니다. 참다못해 아버지가 어머니와 한바탕 싸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사람 입교시키면 복보가 그만큼 늘어나고 /‘여그리스도/’ 마음속으로 알고 있어 훗날 만큼 받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더는 억지 부리지 말고 살림이나 하라는 아버지의 충고에 어머니는 가족의 복보, 평안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신의 보호가 없이 당신의 다리가 나을 있었을 아는가 반박했습니다.   

사실 아버지의 다리 상처는 후유증을 남겨 날씨가 흐리거나 오는 날이면  통증이 오군 했습니다. 참고 견뎠는데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니 더럭 화가 나서 다리가 나았는 알아? 당신 맨날 기도해봤자 아무 소용없어!”라고 했고 말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 대한 자신의 마음이 경건하지 못해서이므로 /‘충성/’ 충분히 표현하리라 다짐했습니다.   

2011 5.1 연휴기간을 이용하여 아버지는 비닐하우스에서 실어낸 야채를 팔고 하북성에서 싱싱한 야채를 실어다 팔았습니다. 고생스레 돈을 은행에 입금하려고 갔는데 통장에 있던 1만원이 없어졌습니다. 며칠간 고생해도 고작 4000원인데, 어머니에게 물으니 돈을 /‘/’ 대한 충성으로 /‘봉헌/’했다는 것입니다. 말에 아버지는 노기충천해 어머니와 한바탕 다투고나서 한매 때렸습니다. 그날로 어머니는 복음 전달 보따리를 들고 가출했습니다. 늦게 알고 아버지를 위로하려고 달려온 저는 갑자기 폴싹 늙어버린 아버지를 보며 가슴만 아팠습니다. 

이렇게 어머니가 보름 동안 돌아오지 않아 아버지가 수소문 끝에 다시 고향사람을 찾아갔는데 예전에 아화가 어머니를 데리고 포두 토우기(土右旗) 복음을 전달하러 갔었는데 이번에도 곳에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토우기는 우리 집에서 백리 남짓 떨어진 곳이라 차를 임대해 몰고 저와 함께 어머니를 찾으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모시러 떠난 아버지가 이렇게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날 줄은/…/… 

分享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