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금은
란소위와 아내 위지화
란소위(蓝绍维), 위지화(魏志华) 부부의 고향은 사천성 면양(绵阳)시 삼대(三台)현이다. 1992년 심천으로 일하러 왔고 1996년 10월부터 동시에 법륜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2001년 2월 20일, 남편 란소위가 아내 위지화의 몸에 부착된 /‘마귀 제거/’를 돕겠다며 그녀의 입과 코를 틀어막아 질식사시켰고10여명의 법륜공 심취자들이 이 참사에 참여하거나 참사를 목격했다. 그 해 위지화의나이가 겨우 35세였다.
사건 발생 1년 전, 란소위의 어머니가 심천 아들 집에 왔다가 아들 며느리를 따라 법륜공 연마를 시작했고 사천에 돌아간 후에도 계속 심취되어 병이 있어도 치료를 거부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2000년 8월, 어머니의 병이 위중해지자 란소위는 아내를 어머니 병 간호로 고향에 돌려 보내며 수련을 더 잘 하라고 당부했다. 2개월 후 노모가 병사했는데 임종직전 체중이 25킬로밖에 되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후사를 처리한 후 고향에 잠시 남아 애를 돌보던 위지화는 시어머니 사망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인지 이홍지와 법륜공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고 날로 불안해졌다.
2001년 2월, 심천으로 돌아온 위지화가 남편이 북경에 호법(护法)을 떠난 사실을 알고 나서 더더욱 긴장해 친구 왕금은 (王金银)이 임대한 룡강(龙岗)구 포길(布吉)진 대분(大芬)촌 분룡(芬龙)6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그곳도 법륜공 심취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얼마 후 위지화의 표정이 날로 얼떨하더니 심지어 예봉을 돌려 “이홍지 개 자식, 그리 착한 우리 시어머니도 구해주지 않았다”며 욕을 퍼부었다.
어느 날 점심, 위지화가 방에서 불쑥 나와 왕금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나방금 한 사람과 연락했는데 다른 공간의 사람이야. 이홍지도 우리를 데리고 어머니를 제도하러 간다고 했어”라고 말했다. 이에 이신휘(李新辉), 왕금은 등은 위지화의 몸에 /‘마귀/’가 부착됐다고 인정했고 그녀 몸에 부착한 마귀를 쫓아 내기 위해 다른 법륜공 심취자 여러 명을 더 불러왔다. 이들은 일여덟 명이 두 팀으로 나뉘어 번갈아 위지화의 주변을 맴돌며 경문을 읽어 주다가 사부의 법상을 그녀 앞에까지 옮겨 놓았다. 그래도 위지화가 계속 고함을 지르며 아무런 변화가 없자 이신휘 등은 북경에서 돌아와 하남에 숨어 있는 란소위에게 빨리 심천에 와서 마귀를 제거하라는 전화를 하기로 결정했다.
2월 18일 오후, 란소위가 법륜공 심취자 구양걸(欧阳杰)과 함께 급히 기차 편으로 심천에 도착하니 위소화는 이미 정신 붕괴 직전이었다. 남편을 만나자마자 위지화가 “란소위, 우리 속았어!”라고 말했지만 아내의 몸에/‘마귀/’가/‘붙었다/’고 단정한 란소위는 그녀의 말을 듣는 척도 안 했다.
2월 19일, 점점 더 많은 법륜공 심취자들이 불려 왔고 그날 밤 10여명의 법륜공 심취자들이 위지화를 에워 싸고 소리 높게 경문을 읽었다. 위지화가 거듭 뛰쳐 나가려 시도했지만 번마다끌려 들어왔다.
어느 새 날이 점점 밝아오기 시작했다. 구양걸이 도망가려는 위지화가 대법을 파괴한다는 사람이라고 하자 란소위가 그녀를 묶어 놓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왕금은, 이신휘, 구의향(丘宜香), 구양걸 등이 란소위와 함께 그녀의 두 손을 뒤로 묶고 두 발도 묶었다.
구양걸은 위지화에게 이홍지 법상 앞에 무릎 꿇고 “사부에게 구원을 청하라”고 명했다. 위지화가 몸부림치며 거부하자 이신휘 등이 달려들어 그녀를 억지로 눌러 무릎 꿇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주변에 가부좌하고 앉아 이홍지의 경문을 읽으며 그녀를 도와 /‘마귀 제거/’를 실행했다.
두 손과 두 발을 묶인 채 억지로 꿇어 앉은 위지화는 여전히 “당신들 이러지 마, 난 이홍지의 좋은 제자 될 수 없어, 이홍지가 사람을 해쳐, 난 그 사람의 제자 될 수 없어, 당신들이나 그의 제자 되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위지화가 사부를 욕하자 그 자리에 있던 여러 명의 법륜공 심취자들이 노발대발하며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손으로 그녀의 입을 힘껏 틀어막고 있던 란소위는 구양걸이 넘겨준 타월을 받아 위지화의 뒤에 서서 손과 타월을 교체해가며 욕이 나오지 못하게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았다. 네댓 시간이 흐르고 10여명의 법륜공 심취자들의 고저장단의 경문을 읊는 소리속에서 위지화는 몸부림과 고함을 차츰 멈추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몸부림 치던 위지화가 쓰러지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법륜공 심취자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위지화 몸에 부착된 /‘마귀/’가 제거됐다고 구양걸이 알리자 다들 그 말을 진짜로 믿고 사부가 /‘신통력을 발휘/’해 위지화의 /‘원신(元神)/’이 되돌아 오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그제야 란소위, 구양걸과 이신휘가 손발이 묶인 위지화를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소생을 기다렸다.
그러나 위지화는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밤 21시경 법륜공 조직의 지시에 따라 란소위와 구양걸이 건물 아래 공중전화를 이용해 심천시 120응급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위지화가 숨진 지 20시간 훨씬 넘은 후였다.
용강구 남령(南岭)병원에서 120응급센터 지령을 받고 즉각 응급구원에 나섰다. 몇 분 후 응급차가 현장에 도착, 전화에서 말한 /‘환자/’가 젊은 여성였고 이미 숨진후임을 종우명(钟宇明)의사가 발견했다. 그가 소식을 사자의 남편 란소위에게 알렸을 때 그는 처가 죽지 않았다고 고집했다. 병원 검사 과정에서 의사는 위지화의 팔에서 끈으로 묶였던 흔적을 발견했고 숨진 지 비교적 오래 됐음을 발견했다. 이에 근거하여 현지 파출소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된 룡강구 공안분국 라강(罗岗)파출소 경찰이 즉시 사자에 대해 법의 감정을 실행, 병리검사를 통해 위지화의 사인이 타인에게 코와 입을 막힌 질식사임을 입증했다. 사건발생 현장에서 사자를 묶었던 붉은 포장 끈 6개를 발견했다.
이 정황을 보고 받은 심천시 법륜공 간부 하견(何坚), 정호(程浩), 이연(李艳) 등이 크게 경악했다. 사부의 /‘지의/’에 따르면 대법을 수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마귀를 제거하느라 사람을 숨지게 한 이 사건이 대법의 명성을 파괴할까 우려된 그들은 “매체들이 사실대로 보도한다면 정부에서 뭐라 말하지 않아도 군중들이 금방 알게 되니” 천방백계로 보고 들은 것을 혼돈시키기 위해 “공안기관에 병사라고 말하라 가족들을 설득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누나 사망소식을 접하고 달려온 위지화의 동생 위귀군(魏贵军)과 친척들이 빈의관에 누워 있는 시신에서 팔이 묶였던 흔적과 무릎 상처를 발견했고 병으로 사망했음을 믿지 않았다. 공안국에서 남편 란소위를 구속했지만 위지화의 사인에 관해 입을 열지 않아 그녀의 죽음이 미스테리로 남았다.
사천의 친척집에 살고 있던 세 아이는 내내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듣지 못했다. 2001년 여름, 란소위의 생질 이봉휘(李逢辉)가 심천에 일하러 갔다가 외삼촌 집에 거주했는데 그제서야 외숙모가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숙모의 사인을 몇 번 물었지만 란소위가 입을 열지 않았고 끈질기게 물으면 피하다 못해 겨우 “일이 너한테서 발생하지 않았으니 너는 알리 없다”고만 대답했다.
2001년 7월에 이르러 사건에 참여하고 진상을 덮어 감추던 법륜공 간부 이연이 스스로 심천시 공안국에 신고해서야 이 사건의 심리가 획기적인 진전이 있게 되어 듣기에도 끔찍한 법륜공 심취자들이 마귀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을 질식사시킨 이 사건의 진상이 차츰 드러났다. 결국 란소위는 법에 의해 징역 13년을 구형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