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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딸을 여읜 저의 불행

2013-10-23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왕선전 (구술) 정일 (정리)

산동성 광요(广饶)현에 살고 있는 64세의 왕선전(汪善田)입니다. 저에겐 아들 딸이 있었는데 법륜공에 심취되는 바람에 자식들이 모두 저의 곁을 떠났버렸습니다. 어리석기 그지없던 자신의 지난날을 생각할 때마다 깊은 고통속에서 허덕입니다. 자식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저에게도 손자 손녀가 있을 것이고 인륜의 즐거움을 향수했을 테지만 지금 저와 마누라는 종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1997년부터 법륜공을 연공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다시는 농사에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이홍지가 /‘천년 원만(圆满)/’이라고 했는데 2000년을 겨우 3년 앞둔 시간이니 자신이 모아 놓은 돈으로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데 농사를 지어 무슨 소용 있겠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에 원만이 없고 이홍지가 또 다시 /‘10년 원만/’을 내놓았는데 그게 바로 2012년입니다. 그럭저럭 그때까지 견지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점점 깊이 빠져버렸습니다.

공을 제고하기 위해 저는 책자, 녹음테이프, 호신부, 이홍지의 /‘불상/’, 연공시 걸어놓는 그림 등 많은 물품을 구입해 남에게도 더러 나눠주고 향을 사는데 만도 적잖은 돈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숱한 페인트를 사서 곳곳에 표어를 써 붙이고 전단을 대량 인쇄하여 가는 곳마다 배포했습니다. 농사꾼은 땅에서 돈이 나오는데 농사를 짓지 않고서야 어디에서 수입이 나겠습니까? 당연히 벌어들이는 돈 없이 지출만 늘어 살림이 갈수록 궁핍해지기만 했습니다. 남들은 새집 짓고 담장을 올리는데 저는 여전히 다 헐어떨어진 울안에서 살았고 남들이 칼라 TV를 사고 고급 소파를 사들일 때 저희 집은 낡은 흑백TV에 닳아 떨어진 소파 그대로였습니다. 두 애가 돈을 벌어들이지 않았다면 먹을 밥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모든 심혈을 법륜공 연공에 기울였습니다. 아는 글자 몇개 안돼도 그 <전법륜>만은 두번이나 옮겨 베겼고 몇 번 읽었는지 모릅니다. 그 것 말고는 책이라고는 읽지 않고 TV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도 듣지 않고 완전히 /‘귀 먹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날마다 연공하고 가부좌하고 향을 피워놓고 절하고 하루빨리 /‘원만/’하기만을 기대했습니다. 이홍지가 “명리정(名利情)을 버리고 공을 닦으면 불도신(佛道神)이 된다”고 말하기에 저는 명도, 리도, 정도 모두 버리고 친지들과도 발길을 끊고 주변 만사에 참견하지 않고 아들 딸에게도 무관심했습니다. 법륜공이 저의 생활의 전부였으니깐요.

법륜공이 단속된 후 걸어 나오라는 이홍지의 호소를 받들고 저는 북경에 가서 천안문 청원에 참여했습니다. 말이 청원이지 사실은 교란이었고 정부를 상대로 데모하고 공산당에 먹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한 밤중의 도적마냥 마을과 벌판을 헤매며 남의 집 앞에서 법륜공 전단을 배포하고 남들의 외벽에, 도로변의 나무에, 전봇대에 법륜공을 알리는 표어를 붙였습니다. 나중에 법륜공이 /‘3퇴/’를 실시하자 사람들에게 소선대에서, 공청단에서, 공산당에서 퇴출하라 권유했습니다. 과다 심취로 다들 저를 정신질환 환자라고 했지만 저는 정신차리지 못하고 집착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은 한낱 법륜공의 도구, 움직이는 주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아들 딸이 하루하루 커서 시집 장가 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딸은 어차피 시집 보내는 것이니 좋거나 말거나 시집 보내면 끝이지만 아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내왕하는 사람이 없어 소개자가 적은데다 간혹 중매로 소개가 들어와도 물에 씻은 듯 가난한 우리집에 어느 집 딸이 시집오려 하겠습니까? 법륜공이 단속된 후 여전히 법륜공에 심취된 저에게 연공을 그만두라고 딸이 여러번 권유했지만 저는 듣지 않았습니다. 계속 연공하면 저의 눈앞에서 죽어버리겠다고 딸이 말했어도 그 말이 이홍지가 저더러 /‘정(情)의 고비/’를 넘으라는 것이고 저에 대한 고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딸은 목매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저는 딸이 죽어도 마음 태연자약하게 정의 고비를 넘었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은근히 좋아까지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얼마나 어리석었습니까! 아들은 저의 행위에 마음이 너무 상해 화김에 백리 밖 동성 상무성으로 일자리 찾아 떠난 후 일년내내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후에 아들이 샤시를 설치하는 점포를 차려 장사가 잘 되어 아파트도 사고 여자 친구도 사귀게 됐습니다.  2011년 여름, 결혼을 앞둔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집에 돌아왔었습니다. 제가 법륜공을 연공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여자 친구가 아들한테 연공하지 말도록 권하라고 부탁했고 법륜공을 연공하면 결혼을 포기한다고까지 했습니다. 아들이 여러번 권했지만 제가 듣지 않아 결국 아들은 여자 친구와 헤여졌습니다. 서른이 넘도록 겨우 사귄 여자 친구와 저 때문에 헤어지게 돼 아들에게 충격이 너무 컸습니다. 아버지가 계속 연공하면 평생 장가들 수 없어 독신생활을 해야 한다고 아들이 말했지만 그 말이 들릴리 만무했습니다. 결국 아들은 비통속에서 농약을 마시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비로소 저를 정신차리게 했고 1년이 지나도록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10여년간 제가 저지른 죄들이 모두 법륜공 탓입니다.

 

왕선정 증명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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