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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을 과시하기 위해 5층에서 뛰어내려 장애자로

2011-11-04 기원 하 다:Kaiwind Auteur:등헌여

내 이름은 등헌여(藤献茹), 여, 1958년 5월 출생, 고중 학력, 길림성 송원(松原)시 인쇄공장 출납으로 일했고 송원시 녕강(宁江)구 남진(南进)가에 살고 있다.

전에 나는 법륜공 중독자로 이홍지의 /‘법신설/’을 깊이 믿고 우리집5층에서 뛰어내려 중상을 입었고 지금까지도 오른 팔을 움직이지 못하고 오른 손가락을 펴지 못하며 두다리 관절이 뻣뻣하고 무릎 관절이 변형, 지팽이를 짚어야만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

나는 1996년 봄부터 법륜공을 연공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금방 이혼하고 딸애가 유치원에 다닐때다. 출근하면서 혼자서 애를 데리고 사는 내 생활이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기분까지 울적해서 가슴이 갑갑하고 숨이 찼으며 협심증이 동반됐다.

바로 이때 이웃에 살고 있는 왕언니가 찾아와 출근이 힘들고 혼인생활이 여의치 않는 건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니 모든 것을 개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법륜공을 수련하는 것이다. 연공인은 병이 생기지 않고 병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업/’하는 것이므로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갈 필요가 없으며 또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가정이 덕을 본다” 했다. 마디마디 내 심금에 새겨졌고 그날로 왕언니네를 찾아가 <전법륜>을 사왔다.

얼마간의 수련을 통해 나는 눈에 띄게 활력이 넘쳤고 살살 아파나던 명치 부위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대법이 현령했다 믿은 나는 더더욱 전심전력으로 법륜공을 연공했다. 딸을 짐이라 생각한 나는 부모에게 맡겨버렸고 출근도 부담이라 인맥을 통해 의사 진단서를 떼서 장기 병가를 냈다.

그때 나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먼저 이홍지 /‘법상/’을 향해 연속 삼배를 올리고 나서 연공을 하고 비디오를 보고 녹음을 들었으며 밤이면 /‘경서/’를 늦은 새벽 1시까지 탐독했고 어떤 날은 17-18시간을 투입하고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기억을 심화하고 사부에 대한 존경과 충성을 표달하기 위해 나는 또 대량의 시간을 허비하여 <전법륜>을 베끼고 또 베꼈다. 평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생각과 언행을 법륜공의 법리로 비추어 단속했고 행여나 뭘 잘못해서 /‘업력/’을 추가할가, 층차 제고에 영향을 받을가 조마조마했다.

이래도 나는 자신이 진취적이지 못하고 깨달음이 차하고 집착심이 많아 높은 층차로 제고하지 못할가 걱정됐고 최종 정과를 수련하지 못하고 /‘불도신/’이 되지 못할가 걱정했다. 나는 /‘법/’에는 어련히 황금옥이 있을 것이니 하루빨리 원만하고 하루빨리 /‘비승/’하기를 바랬다.

연공에 착실하고 동작이 규범적이고 법공부에 솔선적이며 더우기 <전법륜>의 장절들을 줄줄 외울 수 있었기에 나는 연공장 /‘법공부팀/’ 팀장으로 당선됐다.

이때부터 나는 더더욱 열을 올려 연공하고 법을 공부하고 출근이요, 애요, 부모요, 인지상정이요 죄다 수련에 자리를 양보했다. 나는 연공장의 법공부 솔선분자로 수차 시에서 혹은 구에서 열리는 법회에 참석하여 심득을 교류했다. 공우들의 부러워하는 눈길에서 그리고 그들의 아부하는 어투에서 나는 자신이 수련에 점점 더 정진했고 점차 /‘고층차/’로 발전하고 원만과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다 자신했다.

대법중의 정진한 일원으로 국가에서 법륜공을 취체했다는 소식을 접한후 나는 더더욱 걸어나와 /‘호법/’과 홍법을 진행할 의무가 있었다. 1999년 7월 21일, 22일 송원시 법륜공보도소에서 조직하는 성위원회와 성정부 주변을 둘러싸고 소란을 피우는 활동에 참가했다. 송환되어 집에 돌아온 후 직장 상사와 동사무소에서 나를 찾아와 설득했지만 나는 조금도 회개하지 않았다. 장기 무단결석으로 직장에서는 나와 근로계약를 해지하려 했지만 나는 코웃음을 치며 내가 넘어야 할 고비로 간주했다. 두려워하고 주춤하면 곧 “천년의 기다림이 하루 아침에 무너진다”. 금빛 번쩍이는 천당으로 갈 사람이 그까짓 일자리가 뭘 그리 대단해서, 직장 상사와 버젓이 말하며 당장에서 사직 보고서를 공장장의 테이블위에 던졌다.

직장이 없었으므로 홍법과정에서 걸림돌 하나가 없어진 셈이다. 1999년 하반년과 2000년의 상반년 나는 두번이나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북경에 가서 홍법을 진행했다.

2000년 9월 나는 이홍지의 <원만을 향해 나가자> 등 /‘경문/’에서 말한 “남이 당신을 사교라 정했는데 당신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 “관건적일 때, 내가 당신들더러 사람과 결별하라고 할 때, 당신들은 오히려 나를 따라 가지 않는다. 매 한 번 기회가 더 있을 수 없다”,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법이 있고 사부가 있는데 머리가 떨어져도 몸은 여전히 가부좌를 하고 있을 것이다” 등을 읽고나서 2000년 12월 재차 북경으로 달려갔다.

연속 3차나 북경에 갔지만 다 발견되지 않았다. 공우들은 수련이 잘 돼 층차가 높고 사부의 법신이 시시각각으로 나를 보호하고 있으며 원만과 멀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공우들이 치켜세우고 부러워할수록 나는 더 만족스러웠고 지어 득의만만해 스스로 즐거워하기도 했다. 번마다 나는 그들앞에서 뻔뻔스레 자신의 홍법경력을 허풍쳤다. 나는 여러차례 가명으로 사부의 없는 곳 없는 법신이 어떻게 신기한가를 한바탕 늘어놓는 심득을 명혜망을 통해 발표했다. 조금이나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사에 적은 모험적인 경력들이 모두 허구 날조라는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매번 명혜망은 수정없이 그대로 잘만 등재했다.

사부가 내 몸에 법신을 설치했기에 명혜망에도 심득 체험을 낸다는 소식이 사람들의 입에 입을 통해 나는 사방 백리내 가장 정진한 인물로 알려졌다. 적잖은 법륜공인원들이 나를 사부 신변의 사람인줄 알고 사면팔방에서 내 주변으로 몰려왔다.

나를 찾아와 공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처음에는 우리집에 다 재울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너무 많아 다른 공우들 집에 까지 들였고 아예 우리집 근처에서 방을 임대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모여 법을 공부하고 하루빨리 원만하기를 기다렸다.

밥 먹고 잠을 자는 외 우리들은 거의 매일 함께 연공하고 법을 공부했다. 그러나 원만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약 반년 이상 지속되자 일부는 더 억제못하고 함께 뭘 해야 되는것 아니냐 했다.

바로 이때 이홍지가 /‘신경문/’을 발표, 우리에게 나가서 “진상을 알리라” 요구했다. 다들 강심제 주사를 맞은 사람이 되어 각자 주머니를 털어 모아 컴퓨터, 프린터, 복사기, 인쇄기 등 설비들을 사고 법륜공홍보품을 대량 제작해서 배포, 붙이는 일을 시작했고 <명혜망>의 송원판을 편집제작했다. 시내 구석구석, 주변의 현(县)들까지 포함해서 법륜공홍보품이 없는데 없었다.

나는 매번 우리들의 이런 홍법 장거를 명혜망에 보고했다. 명혜망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번마다 우리들이 한 일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고 사부가 우리들의 행동을 보고 있으므로 견지만 하면 원만할 수 있다 했다.

격려에 힘입어 다들 더더욱 열을 올렸다.

경찰의 눈을 피해 우리는 자주 인쇄점을 바꿨다. 한 인쇄점이 강제로 폐쇄되면 장소를 바꿔서 다른 곳에 새로 인쇄점을 냈다.

인쇄점이 여러번 강제 폐쇄되고 홍보품을 배포하는 인원이 수없이 바뀌고 바뀌었지만 나는 여전이 무사했다. 공우들은 내가 수련을 잘했기 때문이라 부러워했다.

공우들이 나를 추켜세울수록 나는 더더욱 사부의 진전(真传)을 받은 것 같이 스스로 느껴졌고 사부가 내 몸에 법신을 설치했다 생각됐다. 그렇지 않고는 경찰이 왜 나를 잡지 못하겠는가?

나는 늘 꿈속에서 사부를 봤고 사부와 함께 법신을 어디에 설치하면 가장 좋을지를 토론했다.

공우들에게 법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 증명하기 위해 나는 홍법시 이전처럼 슬금슬금 숨어다니지 않고 번마다 태연하게 여기저기 인쇄점들을 드나들었다. 몇개월이 흘러도 역시 경찰한테 발견되지 않았다.

사부의 법신보호를 믿은 나는 담이 더더욱 커졌다.

2008년 4월 21일 오후, 몇달동안 자리를 비웠다 집에 돌아온 나는 공우들을 집에 불러놓고 송원시에서 진행될 올림픽 봉화 이어달리기 행사때 뭐든 해야겠다 꿍꿍이를 짜고 있었다.

그토록 침착하게 홍법을 하는 내 담량에 공우들은 더더욱 탄복했고 나의 법신을 부러워했다. 여성공우들은 내 옷을 들어올리고 배를 만지며 법신이 어디에 설치됐을가 물었다. 나는 배꼽밑에 설치했을지도 모른다 허풍을 쳤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아랫배가 뜨거워나고 팽창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금강불괘지체로 수련됐다” , “당신의 법력은 틀림없이 끝없다”, “당신이야말로 사부의 진전제자다”, “당신은 이미 사부와 일체로 됐다”, “당신의 지금의 법력으로 금방 박쥐인으로 수련될 것이고 건물에서 투신하더라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다”/…/…나를 둘러싸고 분분히 축복을 아끼지 않았다.

“맞아, 맞아, 우리한테 표현을 해 보렴, 당장 여기에서 뛰어내려,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 공우들이 덧붙혔다.

뛰어내릴것인가? 아닌가? 솔직히 그때 나는 정말로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공우들의 주목을 받으며 나는 5층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3일후 내가 깨여났을때는 온 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년로하신 부모와 외지에서 공부하던 딸이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전에 매일 머리 맞대고 있던 공우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병원에서 꼼짝 못한채 꼬박 42일간 누워있었다. 그동안 나는 12년 연공과정들을 반복으로 여러번 떠올렸다.

법륜공을 수련하기 위해 12년간 나는 직장을 버리고 가정을 포기하고 부모들과 애를 돌보지 않고 집까지 다 말아먹었다. 절대적으로 생사를 내려놓았고 절대적으로 생명으로 /‘호법/’을 했으며 절대적으로 이홍지가 법륜공인원에 대한 모든 요구를 따랐다. “생사를 내려놓으면 바로 신이다” 했지만 나는 신이 되지 못했다. 만약 정말로 법신 보호가 있었다면 내가 왜 온몸 성한데 없이 여기저기 다 다치고 종신 장애자로 됐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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