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국지 생전 사진
나국지(罗菊芝), 내몽고자치구 포두시 사람, 청산구 청산동로에 살았고 퇴직전 국영 대기업에서 종업원으로 근무했다. 2009년 3월 작은 아들에 대한 깊은 모성애와 끝없는 실망속에서 집에서 손목정맥을 자르고 자살했다.
그럼 그녀는 왜 자살을 했을가? 법륜공에 심취되어 있는 작은 아들 이경녕(李敬宁)의 무정무의로 생활의 무의미와 절망을 느꼈고 끝내는 기대가 철저히 무너지면서 불귀의 길을 선택하게 됐던 것이다.
이경녕, 나국지의 작은 아들, 한족, 1968년 포두에서 출생, 포두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북경의과대학에 입학, 졸업후 북경에서 근무, 1997년 미국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났고 그후 미국 메릴랜드주 모 생물연구기업에 근무, 2000년부터 2002년간 미국 천주교대학 중국학생학자친목회 주석을 지냈고 법륜공 수련자며 법륜공관련 매체들인 대기원, 신당인TV방송국에 여러편의 글을 발표했고 인터뷰에 출연하기도 했다. 아내 마서금(马瑞金), 한족, 1969년 출생, 포두사람, 포두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북경에서 졸업, 졸업후 북경에서 근무, 이경녕 출국직후 뒷이어 미국생활 시작,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법륜공에 심취되여 빈번한 활동을 벌임과 동시에 인테넷을 통해 법륜공을 선전했다.
북경의과대학 학생시절의 이경녕
이경녕의 아내 마서금
2002년이후 나국지와 남편 이홍구(李鸿球)는 모두 건강이 좋지 않았다. 나국지는 골 다골증으로 병상에 누워있어야만 했고 남편은 2006년에 위암진단을 받았다. 부부에게 가장 그리운 사람이 바로 멀리 미국에 있는 작은 아들 이경녕이었다. 이경녕은 1997년 출국후 세계 여러나라를 빈번히 드나들면서 한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부모들은 그가 귀국하기를 고대했지만 아들은 여러가지 구실로 한번도 귀국하지 않았다. 전에 그의 형님이 동생 이경녕에게 경제적인 협조를 요청했지만 높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회신에 일언반구 언급조차 하지 않고 부모들에게 법륜공을 연공하라 하고 약이나 치료가 필요없이 연공만 하면 여러가지 병을 치료할 수 있으므로 약 먹는것 보다 돈이 절약되고 효과가 좋다 했다 /…/…
남편 이홍구가 암으로 돌아갈 무렵 형님은 이경녕한테 한번 다녀오라 전화를 했다. 하지만 이경녕은 “생노병사는 자연규칙이고 사람의 육체는 단백질 무더기므로 운명을 하늘에 맡기라/…/…”했다.
남편 이홍구의 병세는 아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더 악화됐다. 임종전 그렇게 아들 얼굴 한번 보고 싶어했지만 아들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2007년 겨울 이홍구는 세상을 떴다. 임종까지도 그는 이경녕의 이름을 부르고 불렀다. 법륜공을 연공한 탓에 이경녕부부는 양심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이홍지의 말과 같이 “당신은 이 한 생에 당신들이 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전(前) 한 생에 당신들이 가족이 아니었음을 당신은 아는가? /…/… 이 한 생에는 당신의 자식이지만 전 한 생에 누구의 자식이었는지 당신은 아는가?”(2006년 <로스안젤스시 법회 설법>)
이경녕부부는 바로 법륜공의 이런 부추김 속에서 가족에 대한 걱정을 철저히 내려놓고 자녀로서의 책임을 포기하고 인륜의 비극을 빚어냈다.
남편이 떠난후 종일 누워 있어야만 하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활이 가능한 나국지 혼자만 남게 됐다. 가장 장래성이 있고 능력이 있다는 작은 아들 이경녕이 이렇게 사람으로 지켜야 할 기본 효도도 없자 생각하면 할수록 절망스러웠고 우울했으며 건강이 악화됐다.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안 그는 마지막 환상으로 다른 사람한테 경녕이를 한번 왔다 가라 전해달라 부탁했다. 죽기전에 아들을 한번 보고 싶었고 남편을 대신해서 한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경녕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최종 나국지는 불귀의 길을 선택했다.
나국지 자살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