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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비승’

2011-07-18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주경안

 

2010년 12월 27일 오전, 삼삼오오 사람들이 여유롭게 강변을 거닐때 한 노인이 대판교(大板桥) 다리목의 참대숲속에 가부좌하고 앉았다. 10:22, 노인이 다리위로 걸어올라와 두 팔을 벌리고 창공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한미터도 더 높은 난간을 훌쩍 넘어 15미터 높이의 다리에서 추락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서둘러 경찰을 불렀다. 양안은 구경군들로 에워싸였다.

뒷이어 경찰이 도착했고 사자의 주머니에서 신분증과 퇴직증이 발견됐다. 사자의 이름은 왕복성(王福成), 아안(雅安)농업은행 퇴직증을 소지, 현장에 있던 성서(城西) 쌍하(双河)촌 사람들이 그들과 한마을에 살고 있는 왕복성이라는 오래동안 법륜공을 수련하던 사람이라 확인했다.

왕복성, 남, 1940년 출생, 사천성 아안(雅安)시 명산(名山)현 사람으로 1995년 농업은행에서 근무하다 퇴직한후 금융기업의 풍족한 대우를 받으며 살았고 이듬해 그의 아내 여홍진(余红珍)도 명산현 잠사공장에서 미정년 퇴직, 두 부부는 퇴직후 복잡한 시내를 떠나 현성 부근에 있는 성서진 쌍하촌에서 농가 하나를 매입, 매월 3000원에 가까운 퇴직금을 받으며 닭, 오리들을 기르고 야채를 심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신선같은 나날을 보냈다.

1997년 법륜공이 이곳에 전해왔고 너도나도 그럴듯하게 선전했다. 시초 왕복성 부부는 별로 믿지 않았으나 왕복성의 아내 여홍진이 요근 손상과 풍습 등 직업병으로 고생하던 중이라 실험삼아 법륜공을 수련하게 됐다. 낮에는 활동에 참가하고 밤에는 테이프를 틀어놓고 연공을 했고 일정한 동안 연공후 건강이 호전된 것 같아 점차 법륜공을 믿기 시작했으며 원래 일주일에 한번씩 받던 물리치료도 중지했다. 법륜공의 /‘병 치유/’와 /‘진, 선, 인/’의 유혹에 못 이겨 왕복성도 연공을 시작했다. 부부만이 시골에 살고 있고 자녀들이 모두 성도에 살고 있어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들 집이 연공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됐다.

그러나 1998년 이후 아내 여홍진의 요근통과 풍습성 관절염이 점점 심했으며 연공이 치료에 아무런 도움도 없고 가부좌는 둘째치고 걸음걸이 마저 힘겨웠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사부가 말하는 소위 /‘소업/’이고 /‘원만/’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중요한 고비라 믿고 견지해야 되며 의력이 있어야 된다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이 여러번 그한테 마누라 데리고 병원에 가보라 권했으나 그는 /‘사부/’의 진정한 대법제자로 되는 날이면 약도 주사도 필요없이 백병이 치유될 수 있고 지금 이런 상황이 바로 /‘소업/’이고 전세에 진 죄업이며 병원에 가면 그것은 /‘사부/’에 대한 불경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 했다. 멀리 살고 있는 자녀들이 전화로 근황을 물어오면 그들은 대충 얼버무려 넘겼다. 그해 여름 딸 왕혜가 마을사람들 전화를 받고 여러번 다녀왔다. 그때 여홍진의 건강은 이미 악화되어 행동불편으로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고 돌아눕기도 힘들어 매일 아파 신음소리만 냈다. 딸이 재삼 권유해도 왕복성은 물론 여홍진도 병원에 가려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도 부친이 한사코 막아나섰으며 여홍진도 “이선생님, 전 당신한테 미안합니다/…/…”며 통곡했다. 왕복성은 아예 사람들을 대문밖으로 몰아내고 문을 닫아 걸었고 딸도 애걸하다 못해 발길을 돌릴수 밖게 없었다.

1999년 구정에 큰 아들 왕선기가 시골로 내려와 더는 법륜공을 연공하지 말라 부친을 말렸다. 그때 여홍진은 거의 반신불수로 침대에 누워있었고 옆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밥을 먹을 수 있고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법륜의/‘집착/’을 견지하며 부친이 아들과의 정면 대화를 피하고 숨어 다니는 바람에 구정기간에 아들은 부친을 두번밖게 만나지 못했고 부친은 계속 연공을 간섭했다간 부자관계를 끊자 했다. 할수없이 큰 아들은 부친과 의논도 없이 여홍진을 성도로 모시고 떠났다. 여홍진이 같이 떠나지 않으려 해 퍼그나 애를 먹었고 왕선기의 팔에는 아직도 어머니가 물어 생긴 흉터가 남아있다. 그때부터 여홍진은 왕복성이 세상뜰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1999년 7월 나라에서 법륜공을 취체한후에도 왕복성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다른 공우와 함께 밤에 나가고 낮에 들어왔으며 활동이 빈번했다. 동가어구에 지장암(地藏庵)이 있었는데 왕복성은 그곳을 거점으로 항상 대기하고 있었으며 자기가 지장왕전세고 이홍지의 직계제자라 자칭했다. 법륜공에 심취된 왕복성은 점점 이상하게 번져갔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 불렀다. 그는 자기 손바닥에 /‘법륜/’하나가 있고 이 /‘법륜/’이 무수한 법륜을 복제할 수 있는데 당신의 몸에 부착되기만 하면 백병이 치유되고 자기는 이렇게 중생을 제도한다 했다. 마을 사람들도 그를 멀리 피해 다녔다. 자기가 /‘법륜/’호신(护身) 기능이 있으며 짐승들도 다 자기말을 듣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왕복성은 들개의 꼬리를 잡은 적도 있다. 개한테 발을 물려 신발에 피가 흥건히 고였으나 아프지 않다며 사람들을 향해 대소를 터뜨렸다. 그후 몇년간 자녀들이 여러번 모시러 왔으나 번마다 그의 거절을 당했다.

2010년 12월 22일,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최후의 원만>이란 책을 나는 다 읽었다. 요즈음 나는 늘 이선생의 금신(金身)을 본다. 온몸이 금빛으로 빛나고 그의 몸뒤에 있는 기둥들도 모두 금빛으로 반짝인다. 내가 거의 수련성사 된것 같다 /…/…”라 썼다.

2010년 12월 27일, 왕복성은 명산현성의 대판교에서 두시간 넘게 가부좌후 투신으로 자신의 생명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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