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은 백옥화(여, 1961년 출생, 초중문화. 원 수녕시 직조인염공장 종업원)며 수녕시 개선중로 37-3-8호에 살고 있다. 법륜공수련은 나의 인생에서 가소롭고 끔찍하며 고통스러웠던 경력으로 지워버릴수 없는 영원한 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지난날을 새삼스레 끄집어 내기 싫지만 나의 과거를 통해 더 많은 법륜공수련자들이 이홍지가 파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와 나처럼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 글을 쓴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우리가정은 전에 구차하게 살았다. 할수없이 초중졸업후 나는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그러나 나는 독서를 즐겼고 특히 <리더스 다이제스트(독자문적)>를 아주 좋아했다. 매기마다 빠짐없이 구입했고 합본도 빠짐없이 사들였다. 잡지에서 위대한 인물들과 그들의 사적을 읽으면서 그들을 공경하게 되었고 평범한 하잘것 없는 여자로가 아니라 지혜롭고 우아한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는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1998년 8월 30일. 나는 헬스기구 다단계판매 판로를 위해 직장 동료였던 수녕시 법륜공보도소 부소장인 료아생(廖俄生)의 집을 방문했다. 료아생부부는 “우린 지금 법륜공을 수련하기 때문에 침을 맞거나 약을 먹지 않아도 신체가 저절로 좋아지므로 기계에 매달려 단련할 필요가 없다”라 했다. 전에 법륜공이란 말은 좀 들어보았지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오곡을 먹는 사람이 당연히 백병이 생기는 법”이라는 말이 있듯이 병이 생기는것은 자연현상인데 어떻게 약을 먹지 않고 침을 맞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간 지체하면 할수록 병세가 더 엄중해지는것 아닌가?
의혹을 채 풀지 못한채 나는 이웃집 엄학벽(严学碧)의 집을 찾아갔다. 엄학벽은 법륜공을 수련하면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할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층차를 제고하고 진, 선, 인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자기도 원래 위병이 있었는데 법륜공수련후 나아서 더는 약을 먹지 않는다 했다. 이어 그는 <전법륜>을 꺼내보였다. 펼쳐보니 제1강에 “진정하게 고층차로 사람을 이끌다”가 눈에 안겨왔다.
“고층차?” 이것이 바로 내가 다년간 악착스레 추구해오던 것이 아닌가? 뜻밖의 흥분을 참지못하고 당장에서 12원을 내고 한권을 구입했다. 그 뒤로 계속해서 <법륜공의해>, <중국법륜불법>과 연공방석, 녹음테이프 등을 샀고 연공을 하면서 열심히 탐독했다.
이렇게 나는 미구에 <전법륜>을 통째로 달달 외울 수 있었고 이홍지가 선양한 “진, 선, 인”, “법신보호”, “요시기능”, ”숙명통공능”, “원만” 등을 철석같이 믿었다. 매일 집에서 법륜공서적을 읽고 연공을 하는 외 나는 또 매일 무소광장(犀牛广场) 연공장에 나가 수련을 견지했고 기타 공우들과 마찬가지로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 앞에서 법륜공의 좋은점을 선전하고 소위 “홍법”을 진행했다. 이로써 “층차에 올라” 자신의 운명을 개변하려 시도했다.
1998년 9월 7일 나는 법륜공의 “불이법문”설을 믿고 모든 서적들을 다 팔아버리고 법륜공서적만 읽기로 결심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아까운 책들이었던가! 교과서외에도 중국 4대명작, <주자청산문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제인 에어>, <3총사> 등등. 물론 거기에는 내가 가장 애지중지하던 <리더스 다이제스트>도 포함되었으며 삼륜차 두대에 실어낼 수 있는 량으로 140원이나 받고 팔았다.
1999년 7월 국가에서 법륜공 단속을 발포하고 법륜공을 사교조직으로 확정했다. 이때 나는 언녕 직장을 그만두었다. 어느날 저녁 어머니는 “나라에서 연공하지 말라면 연공하지 말라”며 정당한 일자리를 찾아 어서 자립을 하라 타일렀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말을 귀전으로 흘러버리고 계속해서 집에서 가만히 수련했다.
2001년 11월 말, 나와 엄학벽은 수녕시 법륜공보도소 부소장 료아생의 집을 방문했다. 료아생은 정부의 법륜공에 대한 단속은 “사부”와 우리학원들에게 불공평한 일이며 대법을 널리 알려야하며 원만하고 층차에 오르려면 멍하니 기다리고만 있거나 다른 사람한테 의지해서는 안되며 생사를 염두에 두지말고 집착을 버리고 나가서 진상을 알려야 된다했다. 그는 “하늘에서 호떡이 떨어지는 법은 없지 않느냐”는 말한마디를 덧 붙혔다.
우리는 엄학벽의 집을 자료집산지로 결정하고 매일 팀별로 시간별로 그의 집에서 자료를 날라다 농민시장, 야채시장, 무소제, 영천사 등 유동인구가 많고 쉽게 몸을 뺄수 있는 지역을 찾아다니며 배포하고 붙히고 소위 진상알리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2005년 6월 23일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임종할 즈음 어머니는 “얘야. 나는 다른것은 별 걱정이 없는데 유독 네가 법륜공을 수련하는 이점만은 시름을 놓을 수 없구나, 더는 연공하지 말거라, 법륜공은 사람을 해치고 있다. 명심하거라, 정부에서 하지 말라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되느니라, 나의 앞에서 다짐을 하거라? 할수 있어?”란 말한마디를 남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신후 비통속에서 나는 살아계실때 제대로 효도를 해 드리지못한 깊은 죄책감에 빠졌다.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임종말씀을 되새기며 연공을 해야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의 고민속에서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내가 최종 법륜공을 연공하지 않기로 결심한 원인은 엄학벽의 죽음때문이다.
2005년 9월, 엄학벽이가 위암말기환자로 집식구들에게 끌려 억지로 병원에 입원한 며칠후였다. 나는 병원에 병문안을 갔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엄학벽은 나한테 “사부가 나를 포기했어. 남은 보호하면서 나는 보호해 주지 않는다”라 말했다. 미구에 엄학벽은 고통속에서 두눈을 영영 감고 말았다.
엄학벽의 죽음으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보다 일찍 법륜공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또 진짜로 수련했다. 지어 죽기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홍법을 위해 자기집을 진상자료 집산지로 만들었다. 이런 제자에게 이홍지법신의 보호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만약 이것이 바로 소위 원만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런 원만이 필요하단 말인가?
나는 갑자기 깨닫았다. 원래 “법신보호”란 가짜고 “원만” 역시 가짜며 “층차에 오른다”는것도 가짜구나! 수련을 통해 운명을 개변시키려던 욕망이 결국은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다니?. 나는 너무 분노했고 마음 상했으며 후회막급이었다. 이 몇년간 허망한 환상속에서 속임수에 넘어갔다는것 마저 모르고 살다니! 이때로 부터 나는 법륜공과 깨끗이 결별하려고 마음 먹었다.
지금 나와 남편은 “중의여의 청결유지회사”을 등록하고 회사의 업무에 분주히 보내고 있다. 비록 힘들기는 하지만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다.
(Kaiwind.com, 2009-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