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23일,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왕진동(王进东) 등 7명의 하남성 개봉(开封) 법륜공 수련자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하여 세계를 경악시켰다. 지금까지 13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사실이 확연하지만 이홍지를 두목으로 하는 법륜공 사교(邪教)조직은 오늘까지도 오리발을 내밀며 여러 가지 이유를 날조하여 사실 진상을 부인하고 책임 회피를 시도하고 있다. 필자는 천안문 사건의 전후 맥락을 아래와 같이 요약함으로써 진실을 바로잡고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분신자살 살건/’의 발생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은 2001년 1월 23일 오후 2시 45분에 발생했고 천안문광장 인민영웅기념비 동북과 정북 두 방향에서 총 2건의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분신자살 참여자는 7명, 그 중 1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4명이 화상을 입었으며 2명이 분신자살 시도 중 근무중인 경찰에게 발견되어 제압당했다. 분신자살자 5명중 유춘령(刘春玲)이 현장에서 숨졌다. 화상을 입은 5명은 유춘령의 딸 유사영(刘思影), 학혜군(郝惠君), 진과(陈果) 모녀, 왕진동 등이고 분신자살 미수자 2명은 유보영(刘葆荣)과 유운방(刘云芳)이다. 부상자 모두가 북경 적수담(积水潭)병원으로 긴급 이송돼 응급치료를 받았다. 유사영과 왕진동이 중급 화상, 학혜군과 진과 모녀가 대면적 화상을 입고 네 사람 모두 얼굴과 손에 화상을 입었다. 12세 어린 나이인 유사영은 후에 심한 화상으로 치료 과정에 사망했다.
/‘분신자살 사건/’ 발생 원인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의 발생은 이홍지가 발표한 일련의 경문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홍지는 2000년 6월 16일 “원만으로 향하여”를 발표, 법륜공 인원들에게 “압력을 맞받아 나오라”고 요구했고 2000년 8월 12일에 “최후의 집착을 버리자”를 재 발표, “생명에 대한 집착을 포함한 일체 속인들의 집착을 버리라”고 요구했으며 2001년 1월 1일에 다시 “참을래야 참을 수 없다”를 발표, 법륜공 인원들에게 “진리를 위해 일체를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잇따라 발표된 이홍지의 경문들은 실질상 법륜공 인원들에게 중국 정부와 법률에 맞서 생명의 대가도 아끼지 말라는 선동이었다. 바로 이홍지의 이런 경문의 선동하에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유운방이 최초로 이홍지의 /‘경문/’을 통해 천안문광장의 /‘분신자살/’이 /‘원만/’을 실현할 수 있다고 깨닫고 또 이런 사설을 전단지로 만들어 왕진동 등에게 배포했다. 그녀는 “내가 천안문광장에 분신자살 간 목적이 바로 나 자신의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대법/’이 진(真)이라는 진상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다”라고 말했고 왕진동도 이홍지의 경문들이 “자아를 포기하고 분신자살의 방식으로 /‘정법(正法)/’을 하려는 신념을 굳게 다지게 했다”고 자백했다.
/‘분신자살/’ 준비
이홍지의 “원만을 향하여” 등 경문이 발표된 후 유운방이 매혹되어 왕진동 등을 선동했고 최종 2001년 음력 섣달 그믐날 분신자살 방식으로 육신이라는 이 누추한 /‘석(夕)/’을 제거하고 /‘원만/’의 념원을 실현키로 결정했다. 2001년 1월 16일, 설홍군이 유운방, 왕진동, 유보영, 유춘령 모녀, 학혜군 등을 북경행 열차에 까지 데려다 주었다. 북경 도착 후 중앙음악대학에서 진과를 만났고 유수근(刘秀芹)이 제공한 방에 입주했으며 비닐 백, 휘발유, 면도날, 라이터 등 분신자살 도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월 23일 10시 30분, 그들이 천안문광장에 도착, 오후 2시 30분에 동시에 불을 달아 분신자살을 하기로 약정했다. 휘발유를 넣은 비닐 백이 새는 바람에 임시 플라스틱 사이다 병을 구입해 대체하고 1인 당 두 병의 기름을 들고 때가 되면 몸에 부어 분신자살하기로 결정했다.
/‘분신자살/’ 당사자 신분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된 후 이홍지의 미국 대변인 장이평(张尔平)과 법륜공 홍콩 책임자 간홍장(简鸿章)이 즉각 뛰쳐나와 분신자들이 법륜공 수련자가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나 법륜공 매체에서 중국 내 법륜공 비밀조직에 위탁하여 조사한 결과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었다. 분신자살자 전부가 법륜공 인원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사자 풍해군(冯海军)은 그 중의 유운방, 왕진동, 유춘령, 유사영 등4명과 지인 사이였다. 이 조사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다. 사실 분신자살자들은 모두 개봉시 법륜공 인원이다. 학혜군이 개봉 회민(回民)중학교 음악 교사, 진과는 중앙음악대학 민악학부 99급 학생, 유춘령이 개봉 평과원중로(苹果园中路)소학교 교사, 유사영이 평과원중로소학교 5학년 1반 학생, 유보영이 개봉 염직공장 퇴직인원이었다. 유운방은 개봉 모 페인트상점 임시 직원이고 왕진동은 개봉 일용화학공장에서 기사로 일하다 미정년 퇴직 후 아내와 함께 /‘취보재(聚宝斋)/’라는 관광용품 매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분신자살 사건/’에 대한 국내외 주요 매체들의 반응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된 후 법륜공 매체들은 분신자살자들이 법륜공 수련자가 아니라 정부 간첩들이 분장한 것이라고 요언을 퍼뜨렸다. 그들은 또한 왕진동이 가짜고 “중공이 분신자살 참사를 만들었다”며 유춘령의 사망 원인이 화상이 아니라 구타라고 했다. 그러나 종이로 불을 쌀 수 없듯이 요언은 궁극적으로 대중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
중국 언론사들이 천안문광장 분신자살 사건에 대해 연속적인 공개 보도를 진행했고 외국 언론사들의 중국 입국 보도를 허용했다. 미국CNN 기자가 분신자살자들이 법륜공 수련자라 확인된 어투로 보도했고 미국의 소리도 보도에서 분신자살자가 법륜공 수련자라고 확인했다. 로이터도 “법륜공이 1999년에 /‘사교/’로 금지된 후 몇 명의 /‘법륜공/’ 정신운동 추종자들이 2001년 천안문광장에서 분신자살 했다”고 확고하게 보도했다. 결국 /‘1.23/’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에 대한 서방 주요 매체들의 보도는 법륜공이 유포한 각종 요언을 인정하지 않고 비교적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2011년 1월 5일 미국의 저명한 사교 전문가 Rick Ross가 “사교 뉴스” 홈페이지에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의 생존자 학혜군과 진과 2인에 대한 단독 인터뷰를 공개, 문자와 사진 등으로 그들의 현황 및 법륜공을 반대하는 마음을 여실히 보도했다. 특히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 당사자인 왕진동은 “우매, 사망, 신생”이란 저서를 출간해 천안문관장에 분신 자살하러 가게 된 전후 맥락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법륜공 인원이 참여한 /‘분신자살 사실/’ 진상을 덮어 감추고 책임을 중국 정부에 전가하려는 시도는 기필코 달성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