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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분신자살 사건 관련 진과모녀 보고회를 듣고(포토)

2012-04-18 기원 하 다:Kaiwind

저는 금년에 58세며 중원유전에 근무하다 퇴직한 두경범(杜景范)입니다. 전에 저는 유전소재지 복양(濮阳)시 법륜대법보도소 소장이었습니다. 2002년 분신자살 사건후의 진과(陈果)모녀 참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학혜군(郝惠君)이 말하는 비참한 경과를 현장에서 들으면서  불현듯 깨닫고 뉘우치게 됐습니다.1994년 6월 저는 정주에서 이홍지가 조직하는 학습반에 참가했고 1995년 복양시 보도소 소장으로 임명됐습니다. 1999년 7월 국가에서 법륜공을 취체한후에도 저는 법륜공을 벗어나라 권유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을 자르는 한이 있어도 회개서를 쓰지 않을 것이고 혀를 깨물어 끊는 한이 있어도 사부와 결렬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우주에 진수(真修)가 단 한사람이라도 남는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나 두경범일 것이라” 당당해서 말했습니다. 자신을 엄연한 /‘영웅지사/’로 알고 아주 위대하게 생각했으며 “생명이 살아 숨쉬는 한 호법은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입장을 완고하게 견지할 때었습니다.2001년 1월 23일, 몇명의 법륜공심취자들이 천안문광장에서 소름끼치는 분신자살 사건을 일으켜 유춘령(刘春玲), 유사영(刘思影)이 사망되고 진과, 학혜군, 왕진동(王进东) 등이 심한 화상을 입은 참극을 빚어냈습니다. 이 참극은 세계를 경악시켰고 우리 지역 법륜공인원들도 정신적으로 큰 의혹을 가지게 됐으며 해외 법륜공총부는 분신자살자들이 법륜공수련자가 아니라 했습니다. 사부의 명령대로 저도 동수들에게 /‘1.23/’ 천안문분신자살 사건은 날조한 것이라 거듭 말했고 신념을 지키고 절대 동요하지 말라 선전했습니다.2002년 9월, 유전에서 진과모녀를 복양에 초청해 피해 경과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처음 남편과 딸이 들으러 가자할때 저는 거절했습니다. 사부님은 그들이 대법제자가 아니며 정부에서 꾸며낸 것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변명하나 들어보고 회의장에서 그들에게 발정념을 보내 사악을 소멸하려 현장에 갔습니다.

저는 고개 뻣뻣이, 가슴 쭉 펴고 떳떳하게 회장에 들어섰습니다. 사부님께 먹칠해서는 안되고 그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서는 안되며 더더욱 옛날 동수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줘야 했던 것입니다. 회의장에 들어서자 직원이 열정적으로 좌석을 배정했고 저는 그들을 경멸하며 곧장 회의장 중앙으로 걸어들어 갔습니다. 많은 동수들이 얼른 일어나 저한테 눈인사를 보냈고 회의장은 잠간 소동이 일었습니다. 저는 쭉 훑어보고 나서 동수가 비워준 좌석에 앉았고 사회자는 선의의 미소를 지으며 조용하라 손짓했습니다. 저는 자신의 존재가치와 무게를 느끼며 옷맵시를 정리하고 허리 굿굿이 앉았습니다. 위풍당당, 마치 회의장이 우리들의 /‘기장/’으로 충만된 느낌이었습니다.잠시후 직원이 잔잔한 꽃무늬 잠옷을 입고 머리에 손수건을 얹은 두 사람을 조심스레 부축해서 주석단에 모셨고 회의장은 삽시에 쥐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500여명을 용납하는 회의장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만큼 조용했습니다. 사회자가 직원에게 그들의 머리에 얹은 손수건을 제끼라 눈치했습니다. 언녕 TV를 통해 진과모녀를 보긴했지만 직원이 그들의 머리에 얹혀있는 손수건을 제끼는 순간 잠간 소동이 일었고 경탄과 탄식, 지어 “어마나”하는 낮은 비명소리도 들려왔습니다.

까까머리에 곰보딱지 얼굴, 눈이 없고 코가 없고 입술도 없는 것 같고 작은 코구멍 두개와 두줄의 이발이 드러나고, 얼굴이 보기 무섭게 흉측했습니다. 절대 실태를 보여서는 안된다 자신을 강요했지만 가슴이 뜨끔하고 등골이 섬뜩해 났습니다.


보고회가 시작됐습니다. 학혜군을 위주로, 자신의 경력을 말하고 그들이 법을 공부하고 어떻게 북경에 가기로 모의했고 어떻게 천안문에 오르기로 준비했으며 죽기보다 고통스러웠던 분신자살, 사부에 대한 원망과 통분, 불귀의 길을 선택한 과거에 대한 뼈저린 후회, 끝으로 사람들에게 사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심취되지 말라 경고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들을 저주하면서 띠엄띠엄 주의해 들었습니다. 그들은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해 침이 줄줄 흘러내렸고 손이 없어 팔에 타올을 묶어 그 타올로 아래턱을 훑군했습니다. 입술이 없는 영향을 받긴 했지만 학혜군의 목소리는 여전히 똑똑히 들려왔고 표달도 아주 이성적이었습니다. 눈앞의 이 하남대학 예술학부 엘리트 졸업생을 법륜공 분신자살자의 극단적인 행위와 연결시키기 어려웠습니다. 학혜군은 천천히 진술하기 시작했습니다.“2000년 8월, 이홍지가 <최후의 집착을 버리자>는 경문 한편을 발표했습니다. 경문에서 그는 최후의 집착을 버릴때가 됐으니 세간의 일체 집착과 생사를 내려놓고 그 속에서 걸어나오라 했습니다. 대법제자더러 걸어나와 세인에게 법륜공은 정법이고 정부가 틀렸으며 법륜공을 사교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를 실증하라는 지시고 연공인들이 감히 걸어나올수 있냐, 감히 말할수 있냐를 사부가 고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홍지는 <참을래야 참을 수 없다>는 경문 한편을 발표했습니다. 저희들은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생각하고 일종의 특수한 방식으로 한차례 정법, 정법의 힘을 강화하려 했는바 생각해낸 것이 분신자살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정법이 바로 본체를 버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일심으로 원만만 생각하고 아주 흥분했으며 흥분상태에 빠져 그 후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학혜군은 그때 자기는 이미 이성을 잃었다 말했습니다.“저는 정말 후회합니다. 당시 심취상태라 사람이 그 정도에 이르게 되면 자신을 억제 못하며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잃게 됩니다.

 

저는 아직도 법륜공에 심취돼 있는 사람들에게 어서 정신차리라 특별히 당부하고 싶습니다. 더는 심취되지 마십시오. 법륜공이 사회에 해를 끼치고 인류를 해친다를 진정으로 이성적으로 인식하십시오. 저는 이런 일들이 더는 발생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물론 올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지만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아름다운 생활을 누리지도 못한 진과, 제 딸과 같은 나이, 아직은 어머니의 보호하에 응석을 부려야 할 나이, 그러나 눈앞의 진과는, 지난날 그 예쁘던 얼굴이 영원히 기억속에만 남아 있을 뿐,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던 섬세하고 재주 좋은 손마저도 분신자살탓에 영원히 잃고 말았습니다.“다 같은 부모가 낳고 부모가 길렀으며 피와 살이 있고 감정이 있는 사람들인데 불이 몸에 붙었을때 누군들 고통스럽지 않았겠습니까? 자기 친딸을 서슴없이 순장시킬 사람 어디에 있으며 자기 아들딸을 불구덩이에 밀어넣을 사람 어디에 있겠습니까?” 관중석에 새까맣게 앉은 사람들 조용히 숨 죽인 채, 오직 학혜군의 피와 눈물의 성토소리만 회의장에 울려퍼졌습니다. 보고회가 끝났습니다. 진과 모녀는 직원의 부축으로 힘겹게 회의장을 걸어 나갔습니다. 멀어져가는 그들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저는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사람들은 “아깝다”, “불쌍하다”, “사람 잡는다”, “에미라는게 정말 미쳤다” 너도나도 탄식을 하며 제 옆을 스쳐 회의장을 몰려 나갔습니다.저는 멍하니 좌석에 앉은 채 정신이 흐리멍텅했습니다.


딸과 남편이 꽁꽁 언 제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꼬박 삼일동안 들어누워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텅빈 천정을 올려다 보는 눈앞에 두개골과 딸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습니다. 저는 딸을 꼭 껴안았습니다.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흘러 내렸습니다/…/…“세상에 후회약을 파는 곳은 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후회됩니다” 학혜군이 반복으로 했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영원히 후회약을 사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저는 사회와 친지, 그리고 동료들의 도움으로 이홍지가 억지로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역설의 기편성을 인식하고 법륜공사교조직을 이탈했습니다.

지금 저는 유전에서 헬스클럽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사회를 위해 저그마한 힘이나마 기여하고 있습니다.


분신자살전 진과의 모습

 

 

2002년 9월, 학혜군과 진과 중원유전문화궁에서 현신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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