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요녕성 대련시 법륜공 심취자 필대홍(毕代红) 소업설을 믿고 자궁암임에도 치료하지 않아 37세의 한창 나이에 요절, 사망후 같은 법륜공심취자인 남편 왕성양(王成阳)과 공우 조설(赵雪) 등은 <전법륜>을 펼쳐들고 시신을 둘러싸고 10일간 발공, 사부 이홍지에게 필대홍이를 소생시켜 달라 간청,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필대홍(毕代红), 여, 1968년 5월 출생, 대련시 사하구(沙河口)구 천용가(泉涌街)에 거주, 1992년 대학졸업후 대련경제기술개발구 만리(湾里)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젊고 아름다운 필대홍
1995년 8월, 필대홍은 대련경제기술개발구 모 외자기업에 근무하는 장격헌(张格轩)과 결혼, 부부는 서로 아끼고 사랑했다. 출퇴근 편리를 위해 이들 부부는 개발구 임대방에서 생활하며 공동노력으로 직장 부근에 내집 마련할 꿈도 키웠다.
장격헌은 승부욕이 강한 남자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 얼마후 총경리 보좌로 승급했다. 승급과 함께 수입이 늘긴 했으나 대신 업무가 바빠 늘 필대홍 혼자서 집을 지켰다. 자상한 장격헌은 아내가 심심해 할세라 공원에 나가고 해변가에 가서 신체단련도 하고 친구도 사귀라 권했다.
1997년 여름, 필대홍은 퇴근후 공원에 산책하러 자주 나갔다. 번마다 그는 법륜공을 연공하는 사람들 옆에 서서 한참씩 구경을 했다. 연공장의 책임자 조설이 그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조설은 필대홍의 외로운 마음을 꿰뚫고 주동적으로 함께 연공하자 제의했고 법륜공을 연습하면 모든 고민을 던다 했다. 이렇게 그는 법륜공을 연공하게 됐다.
호기심에서 시작을 했지만 필대홍은 점점 심취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연공하고 점심 시간에도 연공을 했고 저녁 퇴근후 또 연공을 했으며 모든 여가 시간을 법륜공연공에 바쳤다. 연공을 더 잘하기 위해 그는 <전법륜>, <홍음> 등을 사서 반복으로 학습하고 외우고 심득을 썼다. 점차 학교 일에도 전념할 수 없었고 가정에 대한 관심도 줄었다. 남편 일이건 내집 마련이건 법륜공을 제외하고는 일체가 그와 무관했다. 필대홍의 변화를 발견한 남편이 입이 닿도록 연공을 그만두라 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1999년 봄 그녀는 임신을 했다. 태아를 위해 더는 법륜공을 연공하지 말라는 남편의 말도 뒷전으로 듣고 하루빨리 층차를 제고하기 위해 VCD과 녹음기를 사놓고 매일 보며 연공했고 이홍지의 설법을 반복으로 듣고 심득체험을 썼다. 그 과정에서 /‘법리/’를 /‘깨닫게/’되면 비바람이 몰아쳐도 당장 나가 공우들과 교류하고 토론을 벌였고 자신의 심경을 제고하기에 애썼다. 분통이 터진 남편이 애를 위해 남편과 법륜공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 최후 통첩을 내렸다. 이에 필대홍은 우리둘이 헤여지는 한이 있어도 법륜공은 그만 두지 못한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1999년 /‘5.1/’을 앞두고 필대홍은 혼자 친정집에 왔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아버지 필헌림과 어머니 두교운이 깜짝 놀라 왜 혼자 왔느냐 물었을때 필대홍은 이혼했다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당장 장격헌에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전화로 물었다. 장격헌은 사실이며 필대홍이 법륜공에 집착하여 가정을 버렸기 때문이라 했다. 어떻게 이럴수 있나 딸에게 따졌을때 필대홍은 법륜공은 자기가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고 법륜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다 대답했다. 이때부터 필대홍은 친정집에서 살았고 수련이 그의 생활의 전부로 됐다.
1999년 7월 나라에서 법륜공을 취체하자 필대홍은 불만이 컸다. 부모의 권유도 마다하고 남산처럼 부른 배를 안고 연속 3일간 법륜공수련자들이 정부청사를 둘러싼 /‘호법/’활동에 참가했고 또 다른 수련자들과 함께 북경에 /‘호법/’을 갔다. 10월 아들이 출생하자 이름을 필홍(毕洪, 후에 왕홍으로 변경)이라 지었다. 부모들은 필대홍이 애한테 발목잡히려니 생각했는데 한달도 차기전에 다른 공우들과 함께 재차 북경에 /‘홍법/’갔고 북경에서 돌아와서는 애를 부모한테 맡기고 계속해서 나가서 /‘진상을 알렸다/’. 외손자를 돌보기 위해 어머니는 미리 퇴직을 할 수 밖게 없었다.
장기적인 무단 결석으로 필대홍은 학교에서 제명됐다. 필대홍과 조설 등 법륜공 중견들은 함께 법회를 열고 수련자들을 조직하여 심득을 교류하고 설비를 구입해 법륜공전단지를 제작하고 사처로 배포했다. 2003년 5월 /‘진상을 알리러/’ 외출중이던 필대홍이 웬 남자와 여자애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남자 이름은 왕성양, 고향이 호남성이고 1971년 출생, 법륜공수련탓에 이혼을 당했고 여자애는 그의 딸로 4살이었다. /‘서로 뜻이 같고 생각이 일치/’했으므로 그들은 외지에서 이미 결혼을 했던 것이다. 필대홍의 고집을 못 이긴 부모들은 이 혼사를 동의할 수 밖게 없었다.
애 둘씩 달린데다 경제적 내원이 없고 제집 하나 없는 이 네식구와 부모들은 함께 생활할 수 밖게 없었다. 생활에 보탬하려고 부친은 학원을 꾸리고 중소학생들의 과외를 지도했다. 그러나 필대홍부부는 부모의 답답한 마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 법륜공인원들을 학원에 끌어들여 앉혔다. 그들은 학원을 이용하여 모임을 가졌고 과외공부를 하는 중소학생들에게 법륜공을 선전했다. 필대홍부부는 미성년인 자기 두 애한테도 법륜공수련을 가르쳤다. 애 둘은 부모들의 영향으로 법륜공을 연공하고 천진하게 이웃들에게도 법륜공을 수련하라 권했다.
2004년 겨울 어머니는 점점 초췌하고 병색이 완연한 필대홍에게 어디 아프지 않냐 물었다. 반년전부터 배가 늘 아프고 생리일이 불규칙적이고 늘 하혈한다 했다. 어머니는 필대홍을 끌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진행, 결과 자궁암으로 확진됐다.
어머니는 자궁암이라는 사실을 왕성양에게 알리면서 데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 권했다. 필대홍도 병원치료를 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왕성양이 절대 반대했다. 그는 필대홍의 몸에 업이 있어서므로 연공만 잘하면 모든게 다 잘 될것이며 사부의 말을 듣지 않으면 수련한 공이 다 헛수고로 되고 원만할 수 없게 된다 했다. 왕성양의 추김에 필대홍도 병원치료 생각을 접고 하루빨리 /‘득법/’하고 속인들이 달할 수 없는 경지에 달하기 위해 아픔을 참으며 계속해서 연공했다. 병 치유를 위해 필대홍은 연공에 박차를 가했고 부모들의 권유도 듣지 않았다.
2005년 3월 필대홍과 왕성양은 부모들이 연공을 교란한다며 애들 둘을 데리고 친정집에서 나왔다. 2005년 9월 중순에야 부모들은 어렵게 필대홍이 새로 이사간 집을 찾았다. 어린 왕홍이 외할머니에게 “어느날 엄마가 연공하다 갑자기 침대에서 떨어졌는데 아무리 불러도 깨나지 못해 아빠가 엄마를 친구집에 실어갔어요. 며칠전 아빠가 나를 엄마 보러 간다 데려갔어요. 엄마는 그냥 누워 잠만 자는 것 같았어요. 내가 엄마한테 뽀뽀하려 했는데 엄마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났어요”라 했다.
그 말에 두 부부는 일이 생겼구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왕홍이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시고 화상비나스 주택단지로 향했다. 2호동 3-2-1에 들어서는 순간 썩은 냄새가 뭉클 안겨왔고 왕성양과 조설 등 5명의 법륜공수련자들이 손에 <전법륜>을 펼쳐들고 이미 죽은지 며칠째 되는 필대홍을 둘러싸고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앞의 현실에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넘어졌다.
알고 보니 왕성양과 조설은 필대홍이 죽었다 믿지 않고 공우들을 데리고 필대홍을 향해 /‘발공/’하고 사부에게 소생시켜 달라 간청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10일 동안 발공하고 이홍지에게 10일 동안이나 간청했으나 시신이 썩어 변질할때 까지도 필대홍은 소생하지 못했다.
필대홍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이웃집 장계방(张桂芳)은 필대홍의 시신이 부식돼 이따금 썩은 냄새를 풍기더라며 필자에게 “법륜공이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죽은 사람마저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