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지난 11월 중순, 한국 기독교 관련 A신문사의 김영훈기자가 서울시 금천구에 거주하고 있다는 중국동포 파룬궁 수련 피해자를 여러 번 취재하였는데, 당사자가 편지 형식으로 쓴 글을 본지에도 보내와서 이를 게재한다.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 주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됐다. 사업에서도 순조롭지 못했고, 의사라지만 자기 몸도 챙기지 않아 건강마저 악화됐었다. 그때 나는 저도 모르게 파룬궁에 빠져 들기 시작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에 완전 현혹돼 세뇌 당하였고 통제됐다. 수많은 파룬궁 수련자들의 감정상의 체험은 아마 나와 비슷할 것이다.
지난 세기 90년대에 법륜공이 생겨나서 폭발적으로 전파되어 나갔을 때는, 마침 중국 국유기업의 체제변경 및 사회변혁의 시기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을 당하고 경제가 어려움에 처하였으며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렸었다. 병을 치유하고 몸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선전해 왔던 법륜공은 이때라고 거대한 기만술을 부려 “생활을 개선하고 보람된 인생을 추구하며 생명을 살리고자”라는 백성들의 소원을 악용해서, 파룬궁 수련을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만들어 놓았다.
나의 이름은 박명수인데, 조선족으로서, 연길사람이다. 지식인 집안 출생인 나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 학습 성적은 우수하여 중점대학인 베쮼의과대학에 순조롭게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에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셨다. 효자인 나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대학졸업 후 연길로 돌아가서 연변의 모 병원 유아과에 취직했다.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겠다는 다짐과 어머니에게 효도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크나큰 차이는 인차 나를 소극적적인 사람으로 만들었고, 파룬궁 이단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만들었다.내가 파룬궁에 연류된 것은
우선, 사업에서의 좌절과 허무의 원인이 컸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병원은 연변주의 유일한 3급 우등병원으로, 연변병원과 의료수준이 비슷했지만 많은 환자들은 연변병원 문 앞에 줄을 서서 병을 볼지언정, 우리병원에 오려 하지 않았으며, 유아과에는 환자들이 더욱 없었다. 희망의 비누거품은 이내 꺼졌다. 나는 인차 참혹한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하며, 술과 도박으로 시간을 낭비했다. 정신적으로 공허하여 다른 무엇으로 채우고자 할 때 마침 “진실, 선량, 인내성”과 “원만함”을 선양하는 파룬궁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파룬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정말 후회스럽다. 만약 내가 세간의 변화를 정확하게 보아내고, 정확한 인생관과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었더라면 절대 파룬궁의 침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파룬궁의 창시인인 이홍지는 파룬궁 선양을 통해 금전을 갈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파룬공 수련자들로 하여금 운명의 풍파를 겪으며 기로에서 헤매가 만들었다.
다음, 어머니의 악착같은 유혹과 주입이 나를 파룬궁 수련자로 만들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파룬궁에 완전 빠져있었다. 1994년 이홍지가 연길에 와서 선전할 때에도 어머니는 활동에 동참했다. 완전 세뇌가 된 어머니는 나를 권고하여 함께 파룬궁을 수련하였고, 나로 하여금 아침훈련과 교류에 반드시 참가하도록 강요하였다.
당시 가정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은 연변 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부모들이 파룬궁에 세뇌되면 “원만함”과 “진실, 선량, 인내”라는 거짓으로 자녀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었다. 이는 가정의 재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조작된 병 치료 의학증명과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거짓 설교가 나를 이단(異端)에 입문하게 하였다.
처음 나는 “병이 있어도 주사를 맞지 않고 약을 먹지 않으며 다음 생을 수련하여 복을 받으며 원만함을 얻는다.”는 이론에 콧방귀를 뀌며, “병이 있는데도 주사를 맞지 않고 약을 안 먹으면 우리와 같은 의사들은 왜 있겠느냐?”고 반박했다. 그러자 이들은 나를 어느 파룬궁 /‘을형간염/’ 환자에게 데리고 가서 조작된 병원 검사기록을 내보이며 “파룬궁을 수련했기에 을형간념을 치료할 수 있었다”고 속이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바로 을형간염 환자이기 때문이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오늘날의 의료기술로서는 그 병의 치유가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완전 무장해제 당한 기분이었다. 파룬공에 대한 의심이 싹 가셔졌다.
솔직히, 이렇게 순간적으로 받아들이는 견해가 더 무서운 법이다. 나는 다른 그 어떤 검증도 거치지 않고 전적으로 그들의 세뇌를 받아들이게 됐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을형간염이 완치됐다”는 수련자는 간암에 걸렸는데, “법륜공이 병을 치료를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병 치료를 하지 않는 바람에 죽었다고 한다. 그 때 나는 이미 진실을 가늠하는 눈을 잃고 점점 깊이 세뇌당하고 있었다.
총적으로, 파룬궁 광신자가 되어 허송세월한 대가가 몹시 컸다.
파룬궁에 미혹되어서부터 나는 “파룬궁이 있는데 무슨 일자리가 더 필요한가?”라고 행각하며 수련에만 일심전력했다. 젊고 고학력자이며 직업이 좋은데다가 수련에 열심히 하니 나는 자연스레 소조장이 됐다. 교류과정에서 나는 배운 의료지식으로 이홍지의 “원만함”과 “병치료를 하고 건강을 찾는다”는 근거를 조작하였고, 심지어 가짜 화험증명서를 떼서 “나도 파룬궁을 수련해서 을형간염을 완치하였다”고 설교했다. 나는 법륜공의 통제를 받아 거짓을 조작하는 이홍지를 믿을지언정 과학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한번은 열이 나는 어린애가 치료를 받으러 왔는데, 의사인 나는“주사를 맞지 않고 약을 먹지 않으며, 파룬궁만 수련하면 치료가 가능하다”라고 설교하며 애를 사무실에 데려다가 파룬궁 치료를 하였다. 결국 어린애는 열이 과도하게 나서 폐렴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됐고, 이 일로 하여 나는 병원에서 해고당하였다.
중국정부가 파룬궁 이단조직을 단속하기 시작하자 나는 단식투쟁을 하였고, 몇 번이나 교화소에 보내졌다. 그러나 나는 잘못을 뉘우치려 하지 않고 암암리에 수련을 계속하였고 파룬궁 집회도 가졌다.
또 파룬궁 “공산당이 수련자들의 신체기관을 산채로 척출해 간다.”는 가짜 정보를 조작하였으며,교화 중에서도 “체벌 박해를 하고 있다”고 모독하며 시도 때도 없이 정부에 전화를 걸어 소란을 피웠다. 주택단지, 가두마다 법륜공이 좋다는 표어를 붙이고 다니었는바 마치 정신병환자와도 같았다. 그러다가 파룬궁을 믿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간암을 앓고 있던 어머니는 평소 병원 가기를 거부하고 파룬궁 수련으로 환우를 치료하려고 고집하였다.
어머니는 끝내 고통스럽게 세상을 떴었다. 나는 청천병력을 맞은 것 같았다. 이것이 파룬궁을 믿은 결과란 말인가? 이홍지가 말한 /‘원만함/’인가!?/…나는 꿈속에서 막 소스라쳐 깨어난 듯싶었다.
오늘 날 비로소 완전 깨닫고 보니, 지난날이 더없이 후회스러워진다. 16년이라는 세월에 어리벙벙하게 파룬궁에 매혹돼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었다. “파룬궁이 병을 치료하고 주사를 맞지 않고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는 것은 모두 사기꾼의 수법이었다. “위상이 오르고, 복을 받으며,원만함이 이루어진다.”라는, 이 모든 것은 공상에 불과했다.
현재 나는 한국에서 건설공지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미래는 희망으로 가득 차있다. 암흑한 지난날은 모두 지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매번 지하철에서 파룬궁조직이 파룬궁을 선전하며 진실을 얘기하지 않고 혹형전시 등 활동을 벌이는 것을 볼 대마다 나는 그들 때문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그중 수많은 파룬궁 수련자들은 조선족동포들이다. 나이가 많고 몸이 약하며 배를 주리면서도 “원만함”이란 거짓말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들은 사이비 종교인 파룬궁에 빠져있으며 자신이 죄인이고 가족들에게는 더욱 큰 재난인 것임을 모르고 있다. 파룬궁은 자식으로서 효도를 하지 못하게 하고, 어머니로서 교육을 다하지 못하게 하며,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있다. 정말 인생의 큰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이들이 하루빨리 꿈속에서 깨어나기를 진심으로 빈다.
(저의 메일 주소는 ybwei2011@hotmail.com인데 교류, 또는 토론희망자는 연락 바랍니다.)
<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