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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순의 참회

2017-12-22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이영순(李永顺)

나의 이름은 이영순(李永顺)이며 올해 59세로 사천성 남충시 영산(营山)현 사람이다. 중등사범학교 문화수준에 시골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1998년 8월 부터 2000년 4월까지 나는 사천성 영산현 법륜공보도소 명덕(明德)분소 소장을 맡았었다.

숙부의 영향으로 중년에 들어 나는 풍수보는 재주를 조금 익힌 관계로 주위에 이름이 꽤 알려졌다. 1998년초 영산시내에 살고 계시는 유세전선생의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누군가 묘지를 봐달라 나를 추천했다. 고인을 안장하고나서 며칠 더 놀다가라 재삼 만류하는 바람에 호의를 거절할수없어 나는 그의 집에 3일간 더 머물렀다. 저녁이 되자 유선생의 모친 호소벽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10여명을 모아놓고 테이프를 틀어놓고 바닥에서 연좌연공을 하는것이었다. 재삼 권유에 못이겨 나도 그 속에 끼었다. 그곳을 떠나기 전날밤 유선생의 모친은 자기는 사천성 영산현 법륜공보도소 소장이고 그의 남편도 그의 도움으로 “원만승천”되었다 했다. 그는 나를 사천성 영산현 법륜공보도소 명덕분소 소장으로 임명한다고 하며 나한테 <전법륜>, <법륜대법> 등 서적과 테이프를 주며 빨리 보도소를 설립하라 재삼 당부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있었던 일 자초지종을 아내한테 말했다. 아내는 “그따위것들을 아예 믿지도 마세요. 인민교사인 당신이 밥통을 잃고 싶어서 그러느냐”고 나를 경계했다. 내 생각에도 아내의 말에 일리가 있어 보였으므로 덮어둔채 더 진행시키지 않았다.

1999년 3월의 어느날 밤, 갑자기 쏟아져 내린 폭우로 우리집 거실에 비가 샜다. 이튿날 일찍 일어나 비 새는곳을 손보던 중 처마도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지붕에서 떨어져 나는 오른팔에 골절상을 입었다. 아내는 골과기술을 아는 시골 의사 한명을 불러 깁스붕대를 감아주었다. 이튿날 유선생의 모친은 또 전화를 걸어와 보도소 설립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었다. 아내는 “보도소는 아직 설립하지 않았고 어제 집을 수리하다 이선생이 오른 팔을 다쳐 골절상을 입었다”전했다. 한참 불평을 토하고 나서 그는 “내일 내가 책임지고 치료해 줄테니 이선생을 일찍 통근차에 태워 우리집에 보내라”했다.

이튿날 나와 아내는 그의 집으로 갔다. 유선생의 모친은 차를 따른다 물을 떠온다 밥을 짓는다 한참 분주히 돌아쳤고 퍼그나 친절했다. 감동된 아내는 나한테 “이 분은 믿을만한 언니고 아주 후한 분인것 같다”했다. 저녁 그는 나에게 연좌연공을 가르쳤고 “소업”치료를 해 주었다. 그러나 나의 팔은 뜨끔뜨끔 뼈속까지 아파났고 부종이 점점 심해갔다. “이 팔이 심상치 않으니 내일 병원에 가봐야 되는것 아닌가”는 나의 물음에 그는 “괜찮아, <전법륜>에 /‘병은 병이 아니라 업력이고/’ /‘사람이 생생세세에 쌓아내려온 업력이므로/’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아서는 병을 치료할 수 없고 병을 되돌아 짓누리게 할 수 밖게 없으므로/’ 진정으로 병을 고치려면 반드시 /‘법륜/’을 쉴새없이 돌려 신체속의 /‘흑색물질/’을 체외로 배출하고 근본적으로 병근을 없애야 하오. /‘업/’이 있으면 반드시 /‘소업/’을 해야되고 /‘소업/’을 하려면 당연히 병이 생겨도 약을 먹을 필요도 주사를 맞을 필요도 없는거고 병원에 갈 필요도 없소. 연공을 통해 이홍지 /‘대사/’가 /‘소업/’을 해줄 수 있고 질병을 없애줄 것이오. 이대사가 계시는 한 요까짓 병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것을 믿어야 하오, 소업만 하면 뼈는 자연히 아물어 붙을것이고 완전히 나을것이오”라 했다.

거기에서 나는 연좌연공을 3일간 더 견지했다. 정말로 하루를 1년같이 보냈다. 나흘째 되는날 아내는 내 얼굴색이 너무 좋지 않다는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밤새도록 신음을 해대는 내가 심상치 않았는지 슬그머니 나한테 “오늘 호언니의 이웃이 언니 남편이 위암말기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목을 매고 자살했다 했어오. 아무래도 내일 병원골과에 가서 검진을 받아야 시름을 놓을가봐요”라 했다. 아내의 말을 완전히 믿을수는 없었지만 이튿날 일찍 나와 아내는 슬그머니 영산현인민병원을 찾아가 검진를 받았다. 의사가 붕대를 벗기자 다들 깜짝 놀랐다. 팔에는 더덕더덕 수포가 일었고 근육이 돼지간 색갈로 변했으며 골절처 부위의 상처는 이미 짓물러 있었다. 의사는 “즉시 절단수술을 해야지 그렇지 않다간 생명위험이 크다”했다. 당일 오후로 절단수술을 받았다. 깨어난후 후회막급으로 울려고 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호소벽은 소식을 듣고 병원에 병문안을 왔다. 불평외에 과일, 영양품들을 적지않게 사들고 왔다. 그는 “이선생은 병원에서 치료받고 나는 집에서 계속 이선생을 위해 기도로 /‘소업/’을 할것이오. 내가 이홍지한테 당신의 정황을 미리 보고했기에 말이지 이홍지가 아니었더라면 수술하던 그날 깨어나지 못했을것이요”라 했다. 퇴원하는 그날 그는 재차 나를 자기집에 데려다 놓고 후한 대접을 했다. 떠날때 나한테 보도소 설립건을 거듭 당부했으며 보도소를 설립하지 못하면 큰 재앙이 내릴것이라는것을 이선생도 알지 않느냐는 말 한마디를 덧붙혔다. 원래 심약한 나는 정신적 의탁을 위해, 원만을 위해, 그리고 그의 후의에 보답하기 위해 법륜공에 대해 반신반의하던데로 부터 모든 의심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꼭 보도소를 잘 꾸려나가리라 굳게 다짐했다.

돌아온후 나는 계속 집에서 상처를 치료했다. 공허한 마음에 그의 부탁이 떠올랐고 그도 하루가 멀다하고 부지런히 재촉전화를 했다. 나는 집에서 VCD로 법륜공CD를 보고 법륜공서적을 읽었다. <전법륜>이란 책을 통해 우주, 시공, 에너지 등에 대한 과학술어로 된 “새로운” 기술을 읽은후 특히는 “진,선,인”이 우주의 최고특성이고 좋은사람 나쁜사람을 구별하는 유일한 표준이며 이 특성에 순응하는 자는 진정한 좋은 사람이고 이 특성을 어기는 자는 진정한 나쁜 사람이며 이 특성에 동화된 사람은 곧 도를 얻은자라는 등등 말들은 나의 가슴속에서 강렬한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나는 “진,선,인”의 특성에 순응하고 동화하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하여 홍지의 “명,리,정을 닦아버리고 원만하여 하늘로 가네”란 미혹에 못이겨 마침내는 인민교사라는 이 신성한 직업의 한계를 철저히 넘어서고 말았다.

이로부터 나는 “층층의 고비를 넘고 층차에 오르기”에만 전념을 했다. 나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이홍지라는 주불밖게 없었다. 나는 시골환자들이 병보는데 돈을 아끼는 심리와 퇴직간부들이 건강장수에 유난히 신경을 쓰는 심리, 그리고 퇴직간분들의 대중속에서의 종래의 위신을 이용하여 얼마지나지않아 곧 법륜공보도소를 설립했다. 보도소는 우리집 대청에 거점을 두고 인원수가 가장 많을 때는 60여명에 달했으며 내가 책임지고 법을 전수했다. 법 전수를 위해 나는 왼손으로 글쓰기를 연습하여 흑판에 글을 썼고 전단지와 표어 등을 작성했다. 나는 또 수련자들마다 반드시 집식구, 친척, 친구들한테 전수해야된다고 규정했다. 내가 법륜공보도소를 잘 꾸려나간다는 말을 들은 호소벽은 차를 타고 특별히 우리집까지 다녀왔고 이홍지대사를 대표하여 나한테 “위임장”를 발급, 그 외에 500원 활동경비도 보내왔다. 물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로부터 나는 정식으로 영산현 법륜공보도소 명덕분소 소장이되었고 법륜공보도소에서 “인기좋은 사람”으로 되었다.

1999년 7월 정부에서 법에 의해 법륜공사교조직을 단속했다. 사천대학 금융수학학과를 전공하는 아들이 1999년 여름방학때 집에 왔다가 내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법륜공을 연공하는것을 보더니 죽어라 반대해나섰다. 그는 법륜공은 사교조직이므로 과학을 믿어야된다면서 법륜공 CD를 마구 짓밟아버리고 나의 법륜공서적박스를 소각해버렸다. 그날도 점심밥상에서 나와 아들은 또 변론을 벌였다. 이유가 제대로 서지 않아 말문이 막혔던 나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가 치밀어 밥상을 뒤집어엎었고 그릇들을 다 박산냈다. 나는 아들을 삿대질하며 “너 잘난척 하지마, 그까짓 대학 며칠 다녔다고 대단한줄 알아. 법륜대법마저 믿지않는 무지막지한 놈! 난 너같은 놈을 아들이라 인정하지 않으니 어서 집을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아들은 화김에 눈물을 흘리며 여름방학 절반도 채 지나지않았는데 학교로 돌아가 성도의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여름방학을 보냈다.

이홍지의 “진,선,인”과 “좋은 사람되기”의 얼림수에 미혹된 나는 “명,리,정을 닦아버리고 원만하여 하늘로 가기”위해 낮에는 흐리멍텅한 정신으로 수업을 대충대충 끝내고 저녁에는 나서서 전단지를 배포하군했다. 2000년 3월 7일 저녁 달은 일찍 기울었다. 어둠의 장막을 빌어 길가에 나서서 법륜공전단지를 발포하고 명덕가에서 집에 돌아오니 이미 새벽 2시가 다 되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을어구의 이룡묘(二龙庙)다리까지 왔을때 경황중 다리밑의 돌판위에 떨어져 정신을 잃고 쓸어졌다. 한참후 정신차려 보니 왼손은 이미 골절이었다. 이튿날 지나가던 사람이 나의 신음소리를 듣고 나를 발견했고 집에까지 들어다 줬다. 가족들은 내가 전단지를 발포하다 넘어졌다고 다른 사람들이 뒤에서 수근거릴가 두려워 나를 3일간이나 그대로 집에 방치하다 저녁에야 시골에서 골과기술을 좀 안다는 의사를 가만히 불렀다. 의사는 “분쇄성골절이므로 나는 방법이 없으니 즉시 영산현인면병원에 보내 치료를 받아야된다”했다. 이때에야 가족들은 120에 전화를 하여 구급차를 불러 나를 영산현인민병원에 실어갔다. 엑스선사진 검사 결과 의사는 분쇄성골절로 근육, 뼈가 다 이미 괴사되었으므로 반드시 절단해야된다 했다. 재차 절단수술을 받아야된다는 말을 들은 나의 마음은 칼로 에이듯 아팠다. 가족들는 절망속에서 통곡을 했다. 3월 13일 오후 나는 수술실에 밀려들어가 절단수술을 받았다. 깨나보니 오른손이 없었다. 또 보니 왼손도 없었다. 눈물이 베개잇을 적셨다. 소문을 들은 아들도 성도에서 영산현인민병원으로 달려왔다. 병상앞에서 나의 이꼴을 보고 묵묵히 침묵을 치키고 섰던 아들은 나의 머리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끝내 아내, 아들 우리 한집식구는 함께 울며 서로 부둥켜 안았다.

4월 19일 나는 퇴원수속을 마치고 무거운 정신부담과 6000원의 의료빚을 짊어진채 텅텅 빈 두 팔소매로 불안속에서 명덕행 차에 몸을 실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마음속으로 여러번이고 자신한테 물음을 던졌다. 이것이 바로 내가 법륜공수련으로 “소업원만”해서 얻어온 보상이란 말인가? 연 며칠간 나는 집요하게 이 문제만 생각했다. 반사교지원자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이성적인 사고속에서 나는 점차 법륜공이 나의 두 팔을 빼앗아갔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법륜공은 나의 행복한 가정을 파괴했고 인민교사라는 이 영광스러운 이미지에 먹칠을 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나는 법륜공의 악몽에서 깨여났다. 나는 학교상사와 학부형들. 학생들 앞에서 나의 아들보고 “위임장”과 법륜공CD 그리고 이홍지의 경서, 법륜공선전 전단지들과 수련용 녹음기 등을 전부 불태워버리게 했다. 이어 나의 구술, 아들 집필로 검토서를 쓰고 학교지도부에 나에 대한 처분을 청구했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법륜공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라는 이 명덕의 “인기좋은 사람”의 끝장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홍지를 추종한 1년간 나는 고통스럽에 두 팔을 잘리우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법륜공과 이홍지를 성스레 모신 보답이란 말인가? 이것이 그래 법륜공이 추구하는 원만이란 말인가?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당초에 어떻게 돼서 이홍지의 그 어튼소리들을 믿을 수 있었는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나는 자기가 법륜공에 미혹되었던 지나온 그 비참한 여정을 생각할때마다, 불구로 된 나자신의 두 팔을 내려다 볼때마다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새록새록 느끼게 되고 미로에 잘못 빠졌던 자신의 행위를 뼈저리게 후회한다.

나는 곧 퇴직을 하게 되고 아들도 대학졸업후 성은행에서 근무한다. 딸은 복주에서 출근하다 가정을 이루고 부유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내 인생에서의 진정한 원만이 아니겠는가 나는 생각한다. 이홍지의 “원만”이란 바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완전한 꿍꿍이 수작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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