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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돌이키기 싫은 시골행

2012-06-11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안기

초봄을 알리는 음력 2월, 압록강변의 산간 마을은 엄동설한을 지내고 봄기운이 느껴지는 포근한 날씨를 만끽하고 있다.

음력 2월 초이튿날이 금방 지나자 시에서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밤 재배 센서스가 시작됐다. 우리 센서스팀이 찾은 첫 마을이 바로 요녕성 단동(丹东)시 진안(振安)구 금광(金矿)판사처의 판석(板石)촌이다.

왕촌장은 우리를 만나자 흥분해서 마을 자랑을 늘어놓았다. “저희 판석촌은 단동지역에서 밤 재배로 소문난 시범촌입니다. 밤 재배 면적이 670여 헥타르에 달하고 단위 면적당 산량이 전시에서 1위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더니 마을 자랑으로 신나던 기색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우리 마을에도 아주 골치 아픈 일 하나 있는데 말하자니 가슴부터 갑갑해 납니다.”

“마을 동쪽 어구에 여애화(吕爱华)라 부르는 여성이 살고 있는데 일찍 1983년 41헥타르가 넘는 민둥산을 도맡아 솔선으로 밤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지식이 있고 열심히 연구에 몰두, 밤나무 접목기술을 익혀 3년 후부터 매년 만원 이상에 달하는 가정수입을 올렸습니다. 밤 재배기술 전문가로 부자가 됐고 기와집 번듯하게 새로 짓고 마을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10여년전부터 법륜공에 심취되는 바람에 가업을 다 말아 먹었습니다. 함께 한번 가봅시다. 형편없습니다.” 왕촌장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왕촌장을 따라 여애화의 집에 왔을 때 눈앞의 정경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두 눈이 실명된 노인이 딸의 부축을 받으며 울안에 높이 자란 밤나무를 어루만지고 있었고 집안은 썰렁하고 지저분했다. 왕촌장이 부르는 소리에 노인은 천천히 몸을 돌리고 찾아온 손님들과 더듬어 악수를 했다.

우리가 찾아온 의도를 알고 노인은 밤나무, 법륜공, 건강, 눈, 근년의 생활을 화제로 떠올렸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메마른 눈에 눈물을 머금은 노인은 반복으로 말씀했다. “그 따위 법륜공을 믿은 게 정말 후회됩니다.  애들 말 듣고 언녕 병원에 갔더라면 제 눈은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고 가정도 이 꼴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딸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여애화의 연공과정을 알게 됐다. 아래는 딸의 구술 내용이다.

“1968년 고중을 졸업한 어머니는 하향지원으로 단동에서 판석촌에 내려왔고 1970년 부친과 결혼, 저와 여동생, 남동생 세자매를 길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유능하고 부지런했으며 1983년 마을 주변의 민둥산을 도맡아 밤 재배를 시작해 생활형편을 크게 개선했습니다. 우리 세 남매는 우월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자라 1992년 선후로 대학을 졸업했고 다들 도시에 남아 결혼까지 했습니다. 가정부담 경감으로 한 시름을 던 어머니는 한가할 때면 자주 시내에 가 동창만회 등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1996년 3월, 동창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옛 동창 성씨를 만났고 성씨는 지금 숱한 사람들이 법륜공을 연공하고 있는데 건강단련에 좋고 약을 복용하지 않고도 병을 치료할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되기/’를 가르치고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가족이 익을 얻는다/’ 연설했습니다. 그후 성씨는 책자와 CD를 어머니 앞으로 보내왔습니다.

어머니는 전에 과로로 허리근육을 다친 적 있는데 가끔씩 발작하군 했습니다. 법륜공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고 인차 따라 연공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더 많은 공우들을 알게 됐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연공하고 낮에 심득을 교류하고 저녁이면 집에 돌아와 책을 읽고 CD를 보고 여간만 바삐 보낸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집안일은 전혀 무관심했구요

어느덧 2년이 흘렀습니다. 1998년에 접어들면서 우리 이곳은 법륜공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연공에 깊이 매혹됐고, 같은 해 3월과 8월, 저와 남동생네가 선후로 아들 딸을 낳았습니다. 동시에 할머니자 외할머니로 됐으니 몹시 기뻐해야 할 일인데 저희들은 너무나 서운했습니다. 경사인데도 어머니는 별 반가와 하는 기색이 없이 애를 봐달라 도움을 요청해도 거절했습니다. 할 수 없이 저희는 아버지를 모셔갔습니다.

더더욱 가족들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한 것은 그 해 10월, 밤 수확 후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 가족이 15년간 도맡기로 한 산과 밤 밭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해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종일 연공에 바삐 보냈고 연공이니, 교류니, 소업이니, 층차 제고니, 원만이니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몸에 지닌 병은 호전이 없었습니다.”

딸은 말할수록 울분에 찼고 원망과 무기력 등이 북받쳤다.

예까지 듣는 난 그의 어머니가 한숨을 크게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1999년 국가에서 법륜공을 취체한후 많은 사람들이 연공을 그만뒀습니다. 그러나 저는 드디어 대법제자를 고험하는 관건적인 시각이 다가왔다 싶어 여전히 숨어서 법을 공부하고 연공했습니다. 저는 호법과 연공으로 소업 이 두가지만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병이 있어도 약을 복용하지 않고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권해도 그 말이 저한테는 절대 먹히지 않았습니다.

몇 년간 매일 연공을 견지한 대신 건강은 날로 약화됐지만 저는 제가 업력이 너무 커서라 여기고 사부님이 저의 신체를 청리해주기를 기다렸답니다.

2006년 봄에 이르러 저는 자주 목이 마르고 소변이 잦으며 가슴이 갑갑해나고 온몸이 무기력, 체중도 갑자기 크게 줄기 시작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이 수차 저를 검사를 받아보라 했지만 저는 고집을 부리며 가지 않았습니다. 7월까지 질질 끌다가 마침 심양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큰 딸이 여름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오게 됐습니다. 형편없이 여윈 저를 보더니 억지로 단동시 제1병원에 끌고 갔고 당뇨병이란 진단이 떨어졌습니다.

당뇨병이라는 말에 저는 아둔하게 자신의 몸에 있는 업력이 없어지지 않아 사부가 저를 고험하고 있는 줄로 알았고 자신이 소업을 견지하기만 하면 병은 얼마든지 나을 수 있다 믿었습니다. 의사의 충고나 딸의 권유를 듣지 않고 약과 치료를 거부하고 매일 연공을 견지하고 CD를 보고 법륜이 제 몸에서 돌아갈 그 날을 환상했습니다.

그러나 일의 진행과정이 여의치 못했습니다. 2010년 가을 다리가 붓기고 짓무르고 두눈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딸이 저를 억지로 단동시 중심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했고 의사는 당뇨병 2기 합병증이고 심장과 신장기능이 쇠퇴과정이므로 더 치료를 받지 않다간 생명위험이 있다 했습니다. 3개월간의 전력 치료를 통해 저는 사망선에서 구원됐습니다. 그러나 시력이 많이 감퇴됐습니다.

입원치료기간 의사가 저의 병에 대해 인내를 갖고 자상히 설명해 준 덕분에 저는 그제야 당뇨병의 발병원인과 그 후과를 알게 됐습니다. 의사는 제가 법륜공을 연공한다는 사실을 안후 제가 병을 너무 오래 지체했다 안타까와 했습니다. 4년전에 발견한후 종합치료를 받았더라면 합병증이 유발되지 않도록 차단시켰을 텐데 지금은 악화되어 심한 후과가 초래될것 같다 했습니다.

입원기간, 마침 당초 저에게 법륜공을 권고하던 여동창의 딸을 만났는데 걔 어머니도 심장병임에도 법륜공을 믿어 치료를 포기한 탓에 2년전에 세상을 떴다 했습니다. 구태여 더 묻지 않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법륜공에 심취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로 후회됩니다. 법륜공이 저를 가업을 포기하고 밤나무 재배를 포기하고 병이 있어도 치료하지 않게 만들었고 최적의 치료시기를 놓치게 했습니다. 저는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아들딸과 인륜의 즐거움을 누렸으면 하고 얼마나 간절히 바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소원이었습니다. 2011년 2월 당뇨병합병증으로 저는 두눈을 멀었고 영원히 광명과 고별했습니다.”

판석촌을 떠난 후 나는 무지몽매가 여애화일가에게 남긴 이 쓰라린 추억을 글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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