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생전 사진
할머니가 내 곁을 떠난지 10년이나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꿈속에서 눈물을 머금고 “니아야, 돌아오너라!”를 애타게 부르는 할머니를 만나뵈군 한다.
나의 이름은 장림(张琳), 39세, 북경시 전람로에 살고 있다. 부모가 지방에서 근무하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나는 할머니 손에서 컸다.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친근한 사람이다. 한때 법륜공에 심취됐던 나는 직장을 잃고 남편한테 상처를 주고 가장 친근하고 사랑하는 할머니를 죽였다. 차마 다시 돌이키기도 싫은 그 기왕사를 회상할때마다 나의 가슴은 칼로 에이듯 아파난다.
어려서부터 나는 언제나 할머니의 보배었다. 내가 자랄 그때만 해도 생활조건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늘 갖은 방법을 다해 나한테 영양보충을 시켰다. 명절때 친척들이 사과나 우유 등을 들고 오면 할머니는 다치지 않고 뒀다가 전부 나한테 먹였다. 여름밤이면 내가 더워할세라 모기한테 물릴세라 밤새 침대곁에 앉아 부채를 흔들며 모기를 쫓았고 나는 저녁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콤한 잠에 들었다. 엄마 아빠가 내 곁에 있어주지 않았지만 나는 너무나 행복하게 자랐다. 커서 대학에 입학한 나를 두고 할머니는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른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 앞에서 “우리 손녀가 출세했다” 자랑했고 방학때 집에 돌아가면 놀러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사온 물건들을 꺼내보이며 “손녀가 나한테 사온것이다. 얼마나 효도하는지 몰라”라 자랑해 이웃 할머니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달콤한 꿈은 길지 않았다. 1995년8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우연하게 친구한테서 <전법륜>이란 책을 봤다. 아주 /‘현오/’하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관심을 갖게 됐고 빌려서 집에 들고 왔다. 점차 나는 책속의 /‘진선인/’, /‘수련 원만/’ 등 설법에 말려들었고 드디어 인생의 진리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법학습에 열중함과 동시에 나는 연공에 필요한 녹음테이프를 수두룩이 사서 가부좌하고 앉아 연공을 시작했다. 할머니와 이야기 나누기도 산책하기도 싫어졌고 시간만 나면 방에 갇혀 <전법륜>을 외웠다. 식사때마다 할머니가 한창 불러서야 나와 먹군 했다. 나를 기다리느라 할머니도 나와 함께 찬밥을 드시기가 일수었다. 미안한 마음에 할머니에게 나늘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드시라 했으나 할머니는 웃으며 “괜찮아, 할머니는 우리 니아와 함께 밥 먹어야 밥이 맛있어!”라 했다. 사실 나는 할머니가 밥 먹는 기회에 나와 말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서둘러 몇 숟가락을 뜨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연공과 법학습을 지체해서는 안되며 /‘수련과 원만/’이 나한테는 제일 중요했다.
그토록 심취되어 있는 나를 두고 할머니는 걱정을 많이 하셨다. 나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할머니는 나와 몇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와의 결혼을 재촉하기 시작했고 쯤만 나면 나한테 누구누구의 손녀는 결혼을 했고 누구누구는 증손자까지 봤다 등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법학습밖게 몰랐다. 사부는 /‘진수/’하려면 /‘집착을 버려야 한다/’ 했는데 이 속에는 당연히 /‘육친의 정의 고비를 넘어야 한다/’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결혼할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태도는 아주 단호했다. 온 가정을 동원시켜 나를 권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너무 상심한 나머지 울기까지 했다. “니아야, 할머니에게 가장 큰 소원이란 바로 살아서 내 보배 손녀가 결혼후 잘 사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죽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가 없단다!”는 할머니의 말에 더는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 없어 결국은 1998년 5월 5일 나는 결혼을 했다. 이때에야 할머니는 한시름을 놓은것 같았다. 이제 결혼까지 했으니 내가 마음을 걷어들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가 어찌 알았으랴! 결혼 첫날 나는 남편에게 “내가 결혼에 응한 이유는 할머니를 위해서다. 앞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당신은 절대 간섭하지 말아 달라”했고 남편은 말없이 그저 피씩 웃기만 했다.
결혼후 남편은 나를 끔찍히 사랑했고 나 요구라면 뭐든지 다 들어줬지만 유독 법륜공수련 문제에서만 철저했다. 계속해서 수련하지 말라 막는 바람에 나는 별라별 입에 다물지 못할 말들을 다 퍼부었고 지어 이혼을 들고 나와 남편을 협박했다.
1999년 7월 정부에서 법륜공을 취체했다. 할머니와 남편은 모두 나를 많이 걱정했고 더는 연공하지 말라했다. 그러나 이미 깊이 빠져버린 나는 그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할머니는 늘 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착한 니아야, 제발 좀 말 듣고 연공을 그만 두렴”했고 그럴때마나 나는 가슴이 뭉클해났으나 이홍지의 “정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고 육친의 정의 고비를 잘 넘어야 한다”는 등 말이 생각났고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가정이 덕을 본다”가 생각났다. 내가 수련을 잘하는 것도 할머니를 위한것이 아닌가, 층차가 제고되어 원만하게 되는 날이면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극락세계/’로 가리라.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이 함께 있을 수 있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마음을 도스르고 할머니의 말씀을 털끝만치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열심히 연공하고 열심히 법학습을 진행했다.
하루빨리 /‘상층차/’하고 하루빨리 원만하기 위해 2000년 9월 나는 디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매일 집에 들어박혀 수련했다. 내가 직장까지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화가 동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던지 난생 처음으로 큰 소리로 나를 꾸짖었다. 깜짝 놀랐으나 나는 인차 이홍지가 말한 /‘마(魔)/’에게 통제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마성(魔性)/’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할머니에게 대들었다. 화가 동한 남편이 나를 와락 방으로 끌어들이며 “네가 미쳤어? 네가 왜 이꼴이냐!”며 호되게 꾸짖기 시작했다. 피뜩 이홍지의 “사악을 질식시키고 사악을 산제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미친듯이 아무 물건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남편을 향해 뿌려치며 남편을 위군자고 아무런 가치도 없이 굽실거리며 살아가는 놈이라 욕지거리를 날렸다. 그러고도 분이 삭지 않아 우리 결혼때의 VCD를 끄집어 내 못쓰게 만들었다. 나는 이런 것들이 모두 나의 수련을 교란하고 내 정과 욕을 조장시키는 /‘마/’라 여겼다. 이때 남편은 묵묵히 지켜 보고만 있었고 온밤 말 한마디 없었다. 행패를 다 부리고 나서 나는 김빠진 공처럼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나도 내가 왜 이 정도로 몰상식하게 변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할머니는 할머니 방에서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할머니와 남편은 나 때문에 마음이 얼마나 상했었을가?
그때부터 우리 집안은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항상 썰렁한 분위기었다. 할머니는 눈물로 세월를 보냈고 건강과 기분이 상할때로 상했다. 할머니가 나를 걱정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나는 할머니를 관심하거나 위로하려는 생각도 없이 빨리 /‘상층차/’ 하기에만 바빴다. 후에 이홍지가 <원만을 향해 나가자>, <최후의 집착을 버리자>는 등 경문을 발표했고 우리에게 /‘용감하게 걸어 나오고/’ /‘최종 원만/’을 향해 나오라 했다. 이런 경문을 보고 나는 원만의 날이 멀지 않았다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의 방식으로 /‘호법(护法)/’을 하리라 결심했다.
2001년 3월 3일, 내가 살아 있는 한 평생토록 뼈저리에 뉘우칠 이날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그날 나는 붉은 비단을 사서 집에 숨어서 혼자 플래카드를 만들고 천안문으로 갈 준비를 했다. 이상한 기미를 눈치챘는지 할머니가 나를 막아 나서며 상심한 표정으로 “니아야, 바보짓 하지 말아라!”했다. 나는 할머니의 눈길을 피하며 “나가 바람 쏘이고 들어올테니 걱정말아요”라 어물어물 대답하고는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니아야, 돌아오너라!”는 할머니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리야 날 살려라 뺑소니를 쳤다. 그런데 그 부름소리가 할머니가 나한테 남긴 마지막 한마디일 줄이야 누군들 알았으랴!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나는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서 연을 띠우고 있는 남녀노소들의 행복에 넘치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서너시간 빙빙 돌았다. 도적질이나 한 사람같이 그들의 눈길과 마추치기 무서웠으나 나는 이것이 바로 대법이 나를 고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용기를 내서 준비해 온 플래카드를 광장 밖의 나무에 걸어놓고 부랴부랴 그 자리를 떴다. 오는 길에 나는 득의양양해 났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다니, 사부가 나를 보우해 주는구나 싶었다. 원만에 대한 동경을 가슴 뿌듯이 안고 오는 길에 할머니에게 드리려고 할머니가 가장 즐겨 드시는 도향촌 생과자류들을 두루 샀다. 내가 할머니 모시고 함께 원만한다는 것을 아시게 되면 나를 나무라지 않을 것이고 화도 내지 않겠지 싶었다.
그런데 집입구에 이르자 이웃집에서 달려나와 “네 할머니 병원으로 이송됐어, 금방 넘어졌는데 아마 심상치 않은 모양이더라, 너 어서 가 보거라” 했다. 나는 머리꼭대기에서부터 찬물을 흠뻑 얻어 맞은것 같아 온몸을 떨었다. 생과자를 땅바닥에 떨어뜨린채 미친듯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나는 그럴리 없어! 할머니는 절대 괜찮을거야! 나는 대법 제자다, 사부가 내 할머니를 보우해 줄것이다! 반복 자신을 위로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거기에 조용히 누워계시는 할머니가 내 눈앞에 안겨왔다. 얼굴에 힌 침대시트가 덮혀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바보처럼 멍하니 못 박고 섰다. 남편이 할머니가 우리곁을 떠나셨다 했다. 난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가 없었다. 할머니는 여태껏 건강하셨잖아, 어떻게 간다면 가시는거야, 할머니는 어떻게 나만 남겨두고 혼자 가신단 말인가! 할머니는 조급하게 나의 뒤를 쫓느라 그만 넘어져 급성 뇌출혈사고로 급사하셨다 남편이 말했다. 나는 할머니 몸에 덮쳐 엉엉 소리내 울었다.
왜? 왜서 이렇게 됐지? 이것이 바로 내가 법륜공을 수련해 얻은 복보란 말인가? 사부의 법신이 어디를 보호했단 말인가? 할머니를 생각할때 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시간을 되돌릴 수 만 있다면 내 입으로 할머니에게 “할머니, 저를 용서해주실 수 있나요?”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라도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