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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비박산된 한 조선족 동포가정

2009-04-20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19세기 말, 기자는 취재파일을 열며 역사의 현장을 거슬로 올라간다. 장춘시는 북위 43도05분, 동경124도18분에 위치, 총면적이 20,571평방킬로미터, 인구 487만명에 달하는 대도시이자 중국 마지막 황제 부의가 즉위해 흥성망쇠로 이어졌던 옛 만주제국 “신경”으로 불리웠으며 오늘은 건국 60여년의 건설을 거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 대륙에서 가장 발전전망이 있는 25개 도시에 속하는 도시이며 또 천하가 다 아는 “오곡물의 창고”요 “태평성새”로 불리우는 매력적인 도시임에 손색없다.

개혁개방의 물결속에 우리의 수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코리안 드림”의 열광을 안고 노무송출의 길에 올라 돈벌이에 나섰다.
그 기다란 행열속에 한때 김씨 부부와 둘째아들 김명동이도 끼여 있었다.

부지런하고 순박한 노동자로 반평생을 살아온 김씨 부부는 건설현장과 요식업종에서 억척스레 일하며 목돈을 많이 벌었다.

이들부부는 버는 족족 아껴먹고 절약해 쓰면서 큰 아들 김형에게 고신기술 개발구의 고급주택가에 109평방미터의 멋진 새 아파트를 사주었고 마음씨 착한 유설미를 며느리로 맞아들인 후 그 이듬해에 금쪽같이 귀여운 손자를 봤다.

7~8년의 한국노무로 큰 아파트도 사고 신식가구와 고급 전자제품들을 구전하게 갖춰 생활이 크게 윤택해진 김씨 부부는 몇 년전 한국 법무부의 자진귀국 프로그램에 의해 일시 귀국해 손자를 업어 키우며 한껏 향수를 누렸다. 1년 후에 한국재입국으로 다시 출국해 더욱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둘째자식까지 동반 출국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2008년 4월5일 둘째아들 김명동이를 상해에 있는 둘째 며느리 감을 맞아 올 준비로 일시 귀국시켰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이 귀국행 길이 단란하고 행복했던 김씨 부부 가족의 행운과 좋은 운세를 단 한방에 뒤집어 철저히 파산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김명동이는 작년 4월5일 장춘에서 청명절이자 생일날을 멋진 귀국 파티로 맞았다. 이틀 후인 4월7일에 형수 유설미는 기타 파룬궁 수련자들과 함께 부모님이 사준 고신기술구 아파트에서 파룬궁의 철저한 신봉자인 쇼룽 여성을 백주에 폭행, 구타해 때려 숨지게 한 끔찍한 참사를 저질렀던 것이다.

관련당국에서 심사한데 의하면 피해자 쇼룽과 가해자 유설미, 왕해붕, 고홍경, 김명동은 모두 파룬궁 수련자들이다. 당국 조사에 따르면 쇼룽은 파룬궁에 깊이 빠진 신봉자로서 가정에 불화가 생겨 늘 티격태격 했고 가족들이 권고를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해 이혼수속을 했다. 사건이 발생한 2008년 4월7일 11시경에 쇼룽은 유설미에게 전화를 걸어 이혼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고 오후 1시경, 피해자 쇼룽은 횡설수설하며 유설미 집으로 찾아왔다. 유설미, 왕해붕, 고홍파, 김명동 일행은 쇼룽의 몸에 “여우정”부체가 붙었기에 반드시 때려 잡아내야 한다며 둔기와 몽둥이 등으로 잔혹한 폭행을 가해 이같이 참혹한 수단으로 목숨을 끊어놓았던 것이다.

관련당국에서 조사한데 의하면 일찍 고중시절에 김명동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길림공학원 영어전업학부에 입학한 김명동은 2000년 즉 대학 3학년 때에 파룬궁집단 북경고발 행열에 가입했기에 장춘시 어느 노동개조소에서 1년간 노동개조를 했었다. 석방된 후에도 산동, 상해 등지에서 일하면서 2004년도에 회사의 컴퓨터로 파룬궁 홍보물을 다운로드해 살포하다가 붙잡혀 또 1년 개조를 하게 되었다. 노동개조 1년만기 후인 2006년 2월에 한국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이사이 김명동은 간혹 교회에 다니기도 하면서 파룬궁과 거리를 멀리 하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기도 했다.)

2008년 1월15일 큰 형님 김형(부인 유설미)일가 3명이 한국 서울에 와서 음력설을 쇠게 되었다. 이 기간 김명동은 형 김형과 형수 유설미로부터 파룬궁의 관련상황을 요해하게 되었고 형수 유설미의 추천과 소개로(교주 리훙쯔의 큰 제자라고 자칭하면서)교주행세를 하는 얜이라는 사람이 파룬궁에 정통한 신봉자이므로 만나보라는 충고를 받았다.

2008년 4월4일에 귀국한 김명동은 4월5일 즉 생일날에 형수 유설미, 쇼룽과 함께 길림시에 있는 얜이라는 사부를 만났다. 얜이는 김명동에게 파룬궁 수련을 잘하자면 반드시 사부를 잘 공양해야 하므로 만약 진심으로 수련할 의향이 있으면 돈을 준비하라고 했다. 김명동은 즉시 한국에서 벌어온 4만여 위안을 전부 내놓았다.

유설미는 장춘시 파룬궁 수련자 왕해붕의 유인술에 넘어가 일찍 만나게 되었고 2008년 2월과 3월에 선후로 5만 위안과 13만 위안을 교주 공양 헌금으로 건네주었다. 이렇게 이들 셋은 파룬궁의 깊은 음영속으로 푹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사회에 던진 충격화제

4월8일, 장춘의 친지들로부터 급히 귀국하라는 소식을 접한 김씨 부부는 90일 재입국 하가를 받은 상태에서 영문 모른 채 고향에 왔다가 청천벽력 같은 불길한 소식을 듣고 혼절하고야 말았다.

“아 하늘아. 땅아 어쩌면 우리 두 늙은이를 두고 두자식과 며느리가 이런 길에 들어섰단 말인가”

어머니 안씨는 네 살짜리 손자를 안고 통곡하다가 몇 번이고 기절했고 그토록 강인하던 아버지 김씨는 두 주먹으로 가슴을 치면서 벽모서리에 머리를 박으며 피투성이 된 채로 자해를 시도했으나 이웃들이 말리는 통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60이 넘은 노쇠한 몸으로 애오라지 고향에 있는 아들과 손자의 뒷바라지만 해 왔던 늙은 부부는 전생에서 아무런 죄도 지은 적 없었건만 무정한 세월은 가련하고 참담한 그들에게 영원한 고통만 안겨 주었다.

법은 엄정하며 공정한 것이다. 두 아들과 며느리는 악성종양과 같이 악착스레 침투하면 떨어지지 않는 암세포마냥 이단종교로 금지되어 온 파룬궁을 신봉하거나 수련하면 법을 피해나갈 수 없음을 깊이 새겨둬야 할 것이다.
 

◇깊은 자책감을 가지고 단위와 집에 보낸 편지.

김씨 부부의 가족으로부터 본 심각한 교훈과 사회에 끼치는 이단종교의 그 위해성은 우리 동포사회에 주는 경종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김형, 김명동 두 형제와 유설미(큰 며느리)가 수감,판결받기까지에는 자식교양을 소홀히 한 단순한 부모들이 우리 주위에 적잖게 있다는 것과 오로지 자식의 뒷바라지만 하면 된다거나 금정만능주의가 팽배해 재부나 물질 즉 돈만 많이 벌어주면 부모임무 완성이라는 부모들의 방임태도도 오늘날에 와서 심히 반성해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그리고 젊은 청소년 세대들은 호기심과 신비감으로 얼떨결에 이단종교 책자나 녹음테이프, 동영상들을 접해 아무런 생각 없이 훔쳐보던데로부터 가족, 사회, 회사에 불만 또는 보복심리가 작간해 수렁텅이에 빠지게 된다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상술한 세 사람의 피해 사례에는 몇 년전부터 시장에서 떠도는 파룬궁 책자와 영상물을 가만히 보던 중 나쁜 교주가 침투되어 선동하면 쉽게 믿고 따르는데서 저도 모르게 파룬궁 신봉자나 수련자로 전락되어 범죄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또 하나의 큰 충격은 자기가 벌어 온 돈이나 부모님이 부친 돈을 아무런 의심이나 방어책이 없었다는 점이다. 즉 나쁜 교주들의 교묘한 감언이설과 설교를 미신하고 완전히 매료됨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교주에 의탁하는 환상적이고도 황당한 텅빈 영혼으로 구걸하는 식의 “돈 상납”으로 김명동이 4만여 위안, 며느리 유설미가 18만 위안에다 2000달러를 사기당한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취재한 기자는 현재 중국에서나 한국땅에서 아직도 꽤많은 단순하고 어정쩡한 동포들이 이단종교 활동이 중국에서 금지된지 10여년을 넘긴 오늘에도 파룬궁 신문과 동영상, 책자들을 나눠보며 이단종교에 홀려 가정이나 사회에 극히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준절히 느끼고 있다.

/기자 설흔, 박도. 중국 장춘에서

http://www.kcn21.kr/paperews/print.php?newsno=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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