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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유혈사건 “신(神)”화된 가정 재조사

2014-11-05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시회군 이일범

 

전능신이 중국 신도가 백만에 달한다 공언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즈가 2012년 전했다. 하자/그림   

편집자의 : 산동 초원() 유혈사건이 발생한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남방주말 기자가 하북성 무급(), 산동성 초원, 연대(烟台)를 방문, 처음으로 범죄 용의자 장립동(立冬)의 매제, 장립동의 아내(다섯 식구 가정에서 유일하게 전능신을 믿지 않은 사람) 등을 만났다.   

우리는 한 평범한 가정이 치부의 길에서 유혈사건을 저지르기까지의 /‘()/’화 또는 철저히 재구성되는 삶의 궤적을 애써 환원시키고 나아가 전능신의 교의와 조직이 신도들의 정신세계와 행위 논리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려고 했다.   

우리는 종교계 인사, 전문가와 인터뷰를 가지고 이 가정 성원들의 특수 행위방식에 대한 분석과 정통교회 교의와 신앙방식과의 대비를 통해 종교 이단과 폭력행위 관계를 해독했다.   

전능신을 믿기 전 장립동은 기독교의 도움으로 /‘구원/’되려 시도했고 기도 과정에서 눈물까지 흘렸다. 작은 딸을 데리고 교회에도 네 댓 번 다녀갔고 문천(汶川) 지진 때 교회를 통해 500 원을 헌금했었다.   

장범()은 북경 방송대학에 다녔고 /‘전문대학에서 본과/’로 승진하는 2년간의 공백기에 전능신을 접했다. 그녀는 성격이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타인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며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장범의 어머니는 딸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흘렸다.   

장립동의 아내 왕려()는 이 가정에서 유일하게 전능신을 믿지 않은 사람이다.  아주 이성적이고 가정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라는데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이상한 징조 

/‘5.28/’ 살인사건이 금휘() 아파트단지 여수원(水苑)12호동의 주민들에게는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사전에 이미 이상한 조짐이 보였다.  5 27일 신비스러운 101실의 강아지가 갑자기 죽었던 것이다.   

그 강아지는 몸집이 크고 성격이 온순한 허스키인데 평시에 강아지를 끌고 산책하는 주인은 어떤 때는 야구 모자를 쓴 /‘까까머리/’이고, 더 많이는 그의 큰 딸이다. 이상스러운 부녀였다. 큰 딸은 전혀 웃을 줄 모르는 표정이고 /‘까까머리/’/‘굳어버린 송장/’이라고 이웃이 말했다. 무표정하고 초점이 흐려진 눈길, 마치도 영원히 자기 세계에서 사는 사람 같았다.   

이 집에는 또 헐렁한 바지를 입기 좋아하는 남자애와 안경을 착용한 처녀애가 더 있었다.   

5-6년간 거주했지만 이 집 식구들이 스스로 외부인과 말을 건넨 적이 없고 그들이 거주하는 101실은 일년 내내 커튼이 처져있고 안에는 늘 사람이 있는 것 같지만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불안감이 늘 /‘까까머리/’를 휩쌌다. 2013년 후반 년 그가 흰색 카이엔을 새로 구입했는데 차 간판(YVD110)도 경찰 신고 전화와 같은 번호였다. 절도가 우려돼서인지 그의 집 문앞 바깥 벽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고 감시 카메라 1미터 미만의 거리에 광 감응 탐조등이 설치돼 있다. 어두운 장벽이 내리 드리울 때마다 눈 부신 흰 불 빛이 맞은 켠 건물를 직사했다. 지금도 이 등은 밤마다 켜져 있다.   

그날 아침 허스키가 12 101앞 복도에 쓰러져 있었고 온 몸에 피투성이었다. 놀란 이웃이 신고를 했는데 조사 결과 개가 주인한테 얻어맞아 죽은 것으로 확인되어 경찰이 더 추궁하지 않았다. 이것이 고의 살인사건의 전주곡일 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까까머리가 바로 훗날 전국을 경악시킨 장립동이다.   

사건 발생 후 이웃들은 종래로 웃을 줄 모르는 여성이 장입동의 큰 딸 장범이고 안경을 낀 처녀애 장항()이 장립동의 둘째 딸이며 남자애 장×은 겨우 12세라는 등 내역을 점차 알게 되었다.  TV에 나오는 그 여영춘(迎春)이라는 여인도 본적 있는데 자주 드나들었지만 101실에서 밤을 지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두 전능신교 신도들이다.   

전능신교는 일명 /‘동방번개(闪电)/’라고도 하며 지난 세기 90년대에 흑룡강성 철도노동자 조유산(赵维)이 창설했고 1995년에 중국 정부가 사교로 규정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 2012년의 보도에 의하면 /‘동방번개/’가 중국에 수 백만 명의 신도가 있다고 공언하는데 기독교 단체는 전능신 신도수가 백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측한다고 밝혔다.   

전능신교는 기독교 교의를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전능신교는 신이 예수 이후 두번 째 /‘도성육신(道成肉身)/’을 이루어 한 중국 여성의 몸으로 내려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 여성이 전능의 신이고 주된 업무가 신도들을 이끌고 마귀 사탄을 때려 엎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신도들은 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일체를 헌신해야 했다.   

장범이 개를 때려 죽인 원인이 그날 밤 여영춘이 몸이 불편했는데 /‘사악한 영혼/’이 그녀를 /‘습격/’한 것 같은데 /‘습격자/’가 다름 아닌 그들이 기르고 있는 애완용 강아지라 단정하고 때려죽였다고 신화사가 전했다. 장립동의 매형 유금동()은 무극에 있을 때 장립동이 개를 유난히 좋아했고 기르기도 했다고 회억했다.   

/‘남방 도시보/’는 소식통의 말을 빌어 개를 죽인 후에도 장범과 여영춘이 계속 가슴 아프다고 하여 다른 사람이 달려들어 머리가 어지럽다고 소리지를 때까지 장범을 들어 땅에 메쳤고 그제서야 그들이 악마를 쫓았다며 외출하여 악마를 찾아 죽여버리려고 시도했다고 전했다.   

이튿날 밤 여섯 사람을 태운 카이엔이 나봉로(峰路) 159호의 금도(金都)백화점 1층 맥도날드 식당으로 향했다. 뒷이어 전국을 경악시킨 유혈사건이 산동 초원에서 발생했다. 

 

장립동은 기독교의 도움으로 해탈을 시도했으며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남방주말 기자 시회군/사진   

영수()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9년 전 장립동의 큰 딸 장범이 제일 먼저 전능신교를 접했다. 남방주말 기자가 장범의 학력을 조회한 결과 장범은 2002년 원 북경방송대학 영어전공(전문대학)에 입학했고 2004년에 졸업했다. 2년 후 북경방송대학(이미 중국전매()대학으로 개명)에 재 입학하여 2008년 뉴스학(광고) 본과를 나왔다. 전문대학을 마치고 본과 입학을 기다리는 2년 공백기간에 장범이 전능신을 접했음 직하다.   

2007년부터 /‘동방번개/’(전능신)가 대학생과 중학생들을 겨냥, 대학생들과 중학생 신중들을 통해 자기들의 활동과 조직능력을 제고시키려 시도했다고 매체에서 전했다.   

입교 2년 후 장범은 장립동과 남동생, 여동생을 신도로 만들었다. 신화사 보도에 따르면 2008년 장범은 인터넷에서 산동 용구()사람 여영춘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이 전능신에 대한 인식이 같아 점점 가까워졌다. 2009년 장범과 가족들이 선후로 하북 무극에서 산동 초원으로 이주했다.   

남방도시보가 인용한 초원 기독교도들의 말에 의하면 전능신교는 약 1996년에 초원에 전입했고 주로 현지 기독교회에서 신도들을 포섭했는데 한 때는 형편없이 발광적이었다고 한다.   

금휘아파트단지 여수원(이하 여수원으로 칭함) 외에도 장립동은 백 킬로 떨어진 연대시 래산()구 해천사계화성(海天四季花城, 이하 사계화성으로 칭함)에 거처를 마련했다. 2년 전에 구입한 그 집은 장립동의 아내와 장모가 살았고 장립동과 둘째 딸, 아들 그리고 허스키가 어쩌다 그곳에서 잠깐 머물군 했다. 큰딸 장범은 여수원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   

여수원은 신도들이 /‘영수()/’하는 곳이다. 신화사 보도에 따르면 사교에 가입한 후 장씨 일가는 정상적인 생활수요 외에 외부와 거의 연락을 끊고 매일 집에서 사교 서적을 읽고 영수 필기를 적고 서로간에 사교사상을 주입시켰다.  영수/’는 신도들에 대한 전능신교의 기본 요구이다. 전능신교는 신도는 반드시 진실한 마음을 조용히 신 앞에 받쳐들고 의식적인 배합을 해야 한다/…/… 모두가 개인적인 영수시간이 있어야 하며 /‘영수/’모든 사물을 피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조용히 신 앞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반드시 개인의 영수 필기가 있어야 하고 신에 대한 숭배, 신화에 대한 인식과 영적인 감각을 기록해야 한다.” (전능신교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在肉身显现)> 책에서 인용)   

/‘

신도들에게 /‘영수/’가 아주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런 영수를 하면 할수록 성령이 이끄는 길로 갈 수 있고 더더욱 신의 축복을 받아 영()이 더 강해진다” “들인 공이 많으면 많을수록 마음이 신에 더 귀속될 수 있다.”   

사건 발생 전 장립동의 /‘영수/’ 생활은 단기적으로 중단되었다. 사계화성에서 1개월 남짓 거주했는데 미국에 사는 친척 한 분이 귀국했기 때문이다. 사계화성에 이리 오래동안 체류한건 처음이다.   

사계화성의 이웃인 장여사는 언녕 장립동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 있기만 하면 종일 그 지프차만 만지고 한겨울에도 예외가 없었으며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비상 조명등을 켜고 차 밑에 누워 손질했다.   

장립동은 차에 능통했다. 어느 한번 장여사의 사위가 차 시동이 걸리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는데 그가 주동적으로 다가와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었다. 초원사건 후 사위가 그때 일을 다시 상기하며 속이 뜨끔했다. 딸이 옆에서 당신 조심해. 그 사람이 세뇌 시키고 싶어서야라고 농담했다.   

남방도시보 기사에 따르면 이웃 한명이 전에 장립동과 불쾌한 일이 발생했는데 그때 장립동이 무슨 물건을 빌리러 왔는데 그 사람 정신착란 있는 줄 알았다. 사고방식이 이상하고 흉했으며 자기한테 빚진 사람 취급을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어둠이 깃들면 장립동네 문밖 벽에 설치 탐조등이 켜진다. 지금도 여전하다. (남방주말 기자 시회군/포토)   

치부 

무급현 동관(东关)촌 촌민 이의성()의 인상에 장립동은 보통 내기가 아니고” “머리가 비상하며” “어떤 상황에도 정확히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으며” “잘 양성하면 고급 간부로 될 수 있는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립동이 초원 유혈사건을 저지른 행위에 대해 느낌이 아주 이상했다”. 그는 지어 TV를 통해 들은 그 상상도 못할 말들이 장립동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한 말이라고 추측했다.   

장립동은 1959년에 태어나 초중 학력으로 20세 때 산동 청도 북해함대 건축공병대에서 위생원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해군인 장립군이 배를 타지 않았고 바다로 나간 적이 없다고 전우 주군()이 말했다.   

마음속의 아쉬움을 보완하기 위해서인지 장립동이 지은 애들의 이름은 모두 바다와 연관된다. 그 중 작은 아들 장×의 이름은 더욱 그의 웅대한 지향을 기탁했다.   

이웃 마을에 사는 주군은 장립동이 교만하다고 말했다. 장립동은 군 생활 때 벌써 탈모하기 시작해 보기 흉하다고 아예 까까머리를 하고 늘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그 후 계속 이런 모습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장립동은 동관에 돌아와 면방직공장에 근무하기도 했다. 후에 장사하며 축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장립동의 형 장동지(冬至)가 촌 지부서기를 역임하는 동안 장립동이 동관촌 여러 공장의 부산물을 도맡아 구입했다고 이의성이 말했다. 그런데 그가 공장에서 실어내는 물건들은 위에는 폐품이고 밑에는 완제품이었다.” 장입동이 동관의 여러 공장을 말아먹었다고 훗날 장동지가 말했다고 한다.   

마을 건축 금속공장이 폐업한 후 장입동이 수완을 부려 80만원에 구매했는데 무극을 떠날 때 그 공장부지를 1500만원에 전매했다고 한다.   

20세기 90년대 무극은 한때 전국에서 이름난 의약 도매 기지였다. 그때 당시 현 당위원회의 지도하에 동관촌의 일부 땅을 떼내어 동관의약도매시장을 만들었는데 장립동도 매장을 한개 구입하여 어간유 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건축 금속공장의 낡은 건물을 의약품 장사군들에게 창고로 임대하여 임대요금을 챙기다가 후에 가짜 약이 팔리는 바람에 시장이 강행으로 철수되었다. 경찰이 출동하던 그날 밤 장립동이 몰래 창고 전원을 차단하고 철거행동을 방해하려 시도했다고 이의성이 털어놓았다.   

의약품시장이 철거된 후 장립동은 공장건물을 의류시장으로 개조하고 1 미터 길이의 매대를 년 요금 3000원씩 임대 놓고 선불금을 받았다. 그런데 한 두 달 후 의류시장도 문을 닫았다.   

장입동의 공장건물은 곧 새로운 용도로, 다단계 판매자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 해에 성황을 이뤘던 다단계판매 정경을 이의성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심취자들이 일제히 노래 부르고 구호를 외쳤으며 강단에 선 사람이 당신은 타향에서 잘 지냅니까물으면 숱한 사람들이 큰 소리로 좋습니다!”를 일제히 외쳤다.   

장립동은 또 /‘신세기/’라는 민영학교를 꾸렸었는데 학생 유치를 둘러싸고 다른 민영학교와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이의성이 말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결국 장립동이 이겼고 상대방한테서 보상을 받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됐다.   

마을에 같은 또래의 친구가 거의 없는 장립동이건만 주변에 늘 숱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깡패 배경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장립동이 정부나 집체로부터 이득을 챙겨먹으려 했지만 개인한테는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이의성도 승인했다. 동네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다 들어주었다. 때문에 사건 발생 후 동관촌에 장립동의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구원 

장립동의 매제 유금동의 소개에 따르면 2000년경 동업하던 면유공장의 지분 문제로 장립동과 장동지 두 형제 사이가 벌어졌다.   

장동지가 공사를 시작하려 하고 장립동이 현장에서 벽을 쌓아 올리며 막아나섰다. 쌍방이 대치를 벌이던 어느 날 밤, 장립동이 공장안에서 네 사람한테 억류당하고 물매를 맞고 온 몸에 상처를 입고 병원에 오래 입원했었다고 유금동이 전했다.   

상처 입은 후 장립동이 형님을 법에 고소하려다 친척들의 권유로 포기했다. 대신 그는 모든 친척들이 형님 일가와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출했다.  친척들이 겨우 대답해서야 형님이 법적 책임 추궁을 면했다. 그러나 실제로 친척들이 형님 일가와 인연을 끊을 수 없었으므로 장립동은 이로 인해 다른 친척들과 멀어졌다고 유금동이 말했다.   

장립동은 끝까지 형을 용서하지 않았다.  2010년 장동지가 사망하여 조카가 그를 찾아왔지만 장립동은 끝까지 형의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형과의 반목이 장립동 일생에서의 가장 큰 좌절이었다. 형의 비호도 비호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존엄을 잃었다. 매를 맞은 후 장립동은 줄곧 고민에 빠지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 사람을 만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고 유금동이 말했다.   

2009년 장립동은 가족을 데리고 동관촌을 떠나 산동 초원으로 이사했다. 연대시 소속인 초원은 장립동의 아내 왕려의 고향이기도 하다. 동관촌을 떠나면서 장립동은 친척들과 작별인사도 없었다. “그때는 가는 거도 좋다. 형제간 사이가 이토록 불편하고 괴로운 데 산동에 가서 요양하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다고 유금동이 말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장립동이 무극을 떠난 것이 아주 비정상적이며  장사에 이골이 난 사람이 어째서 그런데 걸려들었는지?” 장립동이 전능신교를 믿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유금동이 말했다.   

가장으로서 장립동이 어째서 딸의 말을 듣고 초원 유혈 사건에서 사람을 때렸는지 유금동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 그리고 보도에 어머니를 /‘악령의 왕/’으로 보고 만나면 죽이겠다고 한 장범의 행위는 그를 더 경악시켰다.   

장립동이 사고쳤다는 소식을 듣고 주군은 본능적으로 그럴 리 없다”, 장립동이 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반응했다. 그러나 TV에서 본 사람은 틀림없는 장립동이고 또한 그의 입에서 상상도 못할 이상한 말들이 나왔다.  이 자식 정신착란이야.” 주군은 일찍부터 장립동의 두뇌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여럿이 모여 이야기 하는데 그는 엉뚱한 다른 일을 궁리한다고 했다.   

건강문제가 수 년간 줄곧 장립동을 괴롭혔다. 20여년 전 장립동이 차 사고를 당한 적 있는데 머리에서 피가 많이 흘렀고죽을 번 했다고 유금동이 말했다. 후에 그는 또 현기증이라는 병에 걸렸었는데 눈만 뜨면 어지럼증이 심해 설 수 없어 병원에도 입원했고 와사증도 왔었다.   

전능신을 믿기 전, 고민하던 장립동은 기독교의 도움으로 해탈을 시도했었다.   

무극현 서관(西)교회 책임자 주란()의 소개에 따르면 2006년 여름의 어느 수요일 오후, 장립동이 서관교회를 찾았다. 마침 주란이 기도를 할 때었는데 장립동이 자리에 앉아 조용히 들었다. 기도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날 자기가 눈물을 흘렸다고 훗날 장립동이 주란에게 말했다고 한다.  평판이 좋지 않은 장립동이 예배당을 찾은 후 기독교 신도들 사이에 분쟁이 일었다. 장립동이 주를 믿는다면 자신은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신도도 있었다. 그러나 주란은 장립동 같은 사람이 주를 믿고 회개한다는 일은 아주 귀한 일이므로 교회가 그를 거절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했다. 설득을 해서야 그 신도가 반대하지 않았다.   

 

장립동이 서관교회를 네 댓 번 찾았는데 어떤 날은 작은 딸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러다 무슨 영문인지 다시 가지 않고 세례도 받지 않았다.  2007년 구정에 주란 등 교도들이 장립동의 집을 찾아가 권한 적이 있다. 후에 그녀가 얼마 동안 외지에 나가 있었고 그 후 다시 장립동을 만나지 못했다. 후에 장립동이 교회에 한 두번 다녀갔고 구원 아니된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구원/’은 기독교의 전문 용어인데 신도들에게는 주를 믿으면 반드시 구원된다. 그러나 전능신은 주를 믿어 구원된다는 말은 시대에 떨어지고오직 전능신 말세의 죄를 제거하는 업무를 접수해야만 진정으로 /‘구원/’된다고 한다.   

장립동은 주란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진지해 보였는데 주를 믿는다면 좋은 신도로 될 사람이었다고 주란이 말했다.  년 문천 지진 후 장립동이 교회를 통해 500원 기부했다고 주란이 말했다. 아마 이것이 장립동이 정통교회와의 마지막 접촉이었을 수 있다   

2008

/‘복음/’ 

큰 딸 장범은 장립동의 자랑이었다. 2002년 북경방송대학에 합격되어 저조기에 처한 아버지의 체면을 살렸다. 그러나 유금동은 장범의 성격이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사람들과의 교제를 싫어한다는 눈치를 벌써 챘다. 후에 장범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왕려의 무의식간의 말을 들었다. 안면 때문인지 왕려가 이에 대해 입밖에 더 내지 않았고 친척들도 묻기 불편하여 가끔 관심의 차원에서 장범의 혼사를 물었지만 번마다 왕려가 나중에 보자고 했다.   

가족성원들 중 유일하게 초원 유혈사건에 개입되지 않은 사람이 왕려이다. 따라서 다들 그녀에 대해 호기심을 품고 있다.   

사건 발생시 왕려는 연대의 집에 거주했다. 이웃들 보기에 그녀 역시 이상한 사람이다. 평시 거의 은거하다시피 하고 종래로 스스로 이웃들과 말을 건네지 않았다. 초원 유혈사건 후에도 왕려는 그냥 집에 있으면서 누가 와서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는다고 유금동이 남방주말 기자에게 말했다.   

2014 6 26, 남방주말 기자가 아파트 관리실 전화를 통해 왕려와 연락을 취했는데 신분을 밝히자 흠칫했다. 친척들에게 전달할 말이나 필요한 도움이 없는가는 물음에 왕려는 필요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왕려 중학교 동창인 주군()은 그녀를 /‘온순/’하다고 평가하며 장립동이 전에 꼭 아들을 바랬는데 연속 딸 둘을 낳아 한때 장립동이 이혼하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왕려에 대한 이의성의 인상은 무척 이성적이고 가정을 아낄 줄 아는사람이다. 장립동이 스캔들을 터뜨려도 왕려는 좋을 대로 하라지, 나한테만 잘하면 된다는 태도였다.   

왕려가 20년 전부터 교를 믿기 시작했는데 전능신이 아닌 /‘복음/’이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이의성이 말했다.   

/‘복음/’은 하북성 무극에서 아주 유행하던 지하 종교이며 정식 명칭이 /‘문도회()/’이다. 여신도들이 기도할 때 머리에 타올을 두르기 때문에 일명 /‘몽두회(头会)/’라고도 한다. 1995년 전능신과 함께 사교로 규정되었다. 무극에 /‘문도회/’의 신도들이 전능신보다 많고 지어 기독교도들 보다도 많다고 기독교도가 남방주말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남방주말 기자가 관련자료를 열람하면서 전능신의 교의가 /‘문도회/’ 교의와 비슷하며 두 교가 모두 사교 /‘호함파(呼喊派)/’에서 분파해 나온 것임을 확인했다.   

무극 기독교도 왕벽운(王碧云)도 단기간 /‘복음/’을 믿었다. 사람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는 것이 /‘복음/’의 가장 큰 특징인바 이를 테면 병을 앓는 환자에게는 /‘복음/’을 믿으면 병을 치유한다고 하고 돈 없는 사람에게는 /‘복음/’을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하고 지어 /‘복음/’을 믿으면 애가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고 그가 소개했다. 일단 /‘복음/’을 믿으면 기타 신도들을 포섭할 임무가 있고 그 임무를 완성해야만 원래 기약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기에 일부 심취된 신도들이 종일 나서서 전도하고 지어 가출까지 한다.   

어머니 임종전까지 /‘복음/’을 믿으라 권하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고 이의성이 남방주말 기자에게 말했다. 장립동의 형 장동지도 암에 걸린 후 /‘복음/’을 믿었지만 결코 /‘구원/’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동방번개/’는 주로 기독교도들을 상대로 신도들을 포섭하고 /‘복음/’은 아무나 /‘끌어/’들인다. 하지만 /‘복음/’/‘동방번개/’보다는 흡인력이 크지 못하다고 왕벽운이 남방주말 기자에게 소개했다.   

무극현 종교국 국장 우인동(牛印同)  문도회 신도수가 기독교도 보다 많다는 말을 부인했지만 구체 숫자를 털어놓지 않았다. 초원 유혈사건 발생 후 현지 기독교회가 무극현 종교국에 사회적으로 전능신 사교를 적발하고 정통 기독교 명분을 바로 잡아줄 것을 제안해 왔다.   

초원 유혈사건 후 해천사계화원 주민 장여사는 장립동 집에 살던 할머니를 걱정했다. 장립동의 장모인 그 사람이 장가네에서 유일한 /‘정상인/’이라고 그는 말했다. 

할머니는 해방 전에 중학교를 나온 문화가 있는 상냥한 분이다. 사고 발생 1개월 전 갑자기 거기를 떠났는데 떠나기 전 장여사에게 산동 임기()에 사는 언니집에 갔다가 8월 달에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후에 장여사는 할머니가 사위 때문에 화가 나서 떠났는데 늘 장립동이 눈에 거슬린다고 나무랐고 장립동도 별로 장모를 달가와 하지 않았으며 딸도 어머니더러 아무 것도 참견하지 말라고 권해서 이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점차 고립되었다는 소문을 이웃들을 통해 들었다.   

장여사의 기억에 5 25일날 장립동과 그의 찌프차가 보이지 않았고 3일 후 TV에서 장립동을 보았다. 수갑을 찬 장립동이 취재진 앞에서 법이 두렵지 않다. 나는 신을 믿는다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이의성, 유금동, 왕벽운, 왕려, 주란 등이 가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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