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0월 어느 날, 설홍군(薛红军)이란 친구가 저에게 책 한 권을 줬는데 이홍지란 사람이 쓴 <전법륜>이었습니다. 책의 요구대로 /‘수련/’하면 /‘개공(开功), 개오(开悟)하여/’ /‘정과(正果)/’를 얻는데 문제 없다고 말해주기에 단김에 그 책을 읽었고 후에 아내와 딸도 읽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세 사람은 법륜공을 연마하기 시작했고 책을 읽고 책에서 요구하는 대로 좋은 사람이 되고 문제 생기면 자신부터 반성하고 심성을 제고하는 등 서로 돕고 함께 배우며 공동 제고했습니다.
저희에게는 대법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가끔 사부의 설법 녹화를 보기 위해 아예 가게 문을 닫고 세 식구가 함께 떠나기도 해서 장사가 예전보다 못해지고 경영 열정도 점점 식어가고 법 학습이 최우선으로 삼았다. 만원 넘게 주고 산 오토바이를 만 킬로밖에 타지 못하고 잃어버렸는데 옛날 같으면 저희 부부가 아까워서 며칠 가슴을 앓았을 텐데 대법을 학습했으니 오토바이를 잃어버림으로 우리가 마음을 비울 수 있나 사부가 우리의 심성을 검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부의 말대로 언제 진 빚이라고 생각하니 불과 며칠 사이에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그후 친구의 도움에 평시 모았던 돈을 보태 128 m²되는 2층 단독건물(정원 면적이 40 m²)을 구입했는데 1998년 하반년에 이르러 관광용품을 취급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장사가 갈수록 힘들어 지고 재고 적체만 심각한 상황이라 대리판매를 하던 타 회사의 물건대금을 상환하기 위해 거주하던 새집을 팔아 대금과 차입금을 갚아야만 했습니다.
전에 저희 세 식구는 집에서만 기공을 연습하고 밖에 나가 할 생각이 없었는데 법륜공 웹 사이트에 실린 경문들은 사회에 더 큰 영향을 얻기 위해 모든 제자들이 걸어 나와 실외에서 연습하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이튿날, 저희 세 식구는 어가(御街), 번루(樊楼) 앞 기공 연습장에 가서 연공을 시작했고 이때부터 만나는 공우들이 많아졌습니다. 제가 경영하는 상점이 어가에 있었으므로 찾아오기 편리해 자주 그들과 만나 사부의 <전법륜>, 설법과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경문을 주제로 함께 토론을 벌이고 인식을 제고했습니다. 전력을 기울여 노력한 덕에 얼마 후 자타가 공인하는 고수준급 공우들 토론에도 개입할 수 있게 됐고 그들의 영향을 입어 법리에 대한 인식이 더 심화되고 인정도 받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사부에 대한 감정과 <전법륜>에 대한 감정 또한 한결 더 깊어갔습니다.
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사상업(思想业)/’이었습니다. 왜서인지 마음속 한구석에 늘 사부를 욕하는 말이 도사리고 있다가 뇌 밖으로 나오려 했는데 사부는 이것을 /‘사상업력/’이라 하고 득법(得法)을 방해한다고 했습니다. 심한 심적 고통으로 <전법륜>에서 언급한 /‘사상업/’이란 글을 수 십 번 읽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법상/’ 앞에 분향 합장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충을 털어놓고 저의 다른 공간에 있는 /‘사상업/’의 물질을 제거시켜주면 육체적 고통 10배를 더 추가해도 반갑게 받겠다고 빌었습니다. 저의 마음속에는 사부가 부모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저의 행위가 지속적으로 아내와 딸에게 영향을 미쳐 나중에는 온 가족 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함께 연마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책을 사주고 기회 있으면 녹화도 보여줬습니다.
1999년 4월 25일, 만 여명의 대법제자들이 중남해 앞에서 /‘집단 청원/’을 벌였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참여하지 못해 못내 후회하며 시련의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래서 대법을 위해서라면 일체를 서슴치 않고 다 바치리라 속다짐을 하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시시각각 자신을 일깨웠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에서 사부의 경문을 꾸준히 다운받아 공우들은 더 빈번하게 법 학습에 몰입하고 저는 돈을 들여 경문과 자료를 대량 인쇄하여 배포했습니다.
2000년 8월, 인터넷에서 <마지막 집착을 제거하자>라는 경문을 또 다운 받았습니다. “사실 이것 역시 마지막 집착을 내려놓을 시기가 온 것이다. 한 수련자로서 당신들은 이미 알았고, 또 일체 속세의 집착(인체에 대한 집착을 포함함)을 내려놓았으며 생사(生死)를 내려놓는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면 원만에 집착하는 것은 집착이 아닌가? 역시 사람의 마음이 집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처가 원만에 집착할 수 있는가?” “제자들의 고통을 나는 다 알고 있다. 사실 나는 당신들 보다 더욱 당신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사부와 대법을 위해 헌신하려는 사상이 한층 더 발전했습니다.
그때 법륜공 학습에 깨달음이 가장 좋은 사람으로 공인받는 유운방(刘云芳)이 여러 번 저와 주변 사람들에게 이 경문을 이야기했고 /‘대법/’ 제자의 /‘수련/’이 열화속에 뿌리 내린 연꽃과도 같다며 시련이 이미 극히 준엄한 시각에 임박했음을 암시했고 연마 과정에 /‘정법/’을 위해 천안문광장에서 분신자살을 한 상태가 나타났다며 그 경위를 디테일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설 때가 됐고 생명을 포기하는 형식으로 /‘호법/’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분신사건 후 병상에서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과정에 법륜공 총부 대변인 장이평(张尔平)이 공개석상에서 자살분신사건에 참여한 인원이 /‘대법/’제자가 아니라고 말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묻건대 어떻게 해야 /‘대법/’제자인가? 대법제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1.23/’ 천안문 집단 분신자살 사건을 두고 사오(邪悟)에 빠진 사람들의 개인 행위라며 /‘대법/’과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우리를 사오에 빠진 사람이라고 하는데 당신들은 전혀 그렇게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부의 말씀대로 저층차의 리(理)는 고층차의 리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고 대응했습니다. 믿지 않겠지만 과거 수련중에 층차가 높다고 자인하는 사람은 저층차의 사람과 함께 교류하기도 싫어했습니다. /‘대법/’을 /‘수련/’한 사람치고 다들 이런 현상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사부가 법륜공을 /‘수련/’함에 편차가 있을 수 없고 아무리 높이 깨달아도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도 웹 사이트에서는 계속해서 이른바 /‘경문/’을 다운받아 제자들을 나서라고 호소하는데 우리가 나서지 않았습니까? 다만 취한 형식이 다를 뿐입니다. 이홍지의 설법과 경문에 비추어보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일부 사람들이 층차가 낮아 인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물론 이런, 저런 이(理)들이 높거나 낮거나 할 것 없이 지금 봤을 때는 모두 터무니없는 사이비설입니다.
북경 두번 방문
자아를 포기하고 분신의 형식으로 /‘정법/’하리라는 신념을 굳힌 후 저는 2000년 10월의 어느 날 천안문광장에 가서 분신자살로 /‘호법/’하려는 생각을 유운방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당시 그는 찬성도 반대도 말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후에 들으니 학혜군(郝惠君)도 유운방을 찾아가서 같은 생각을 이야기했었다고 합니다. 한참 지나서 우리 셋은 이 일(분실자살)을 결정했고 구체적인 시간은 별도로 상의하기로 했습니다.
10월 말 무렵, 유운방이 북경에 가 본 적 없고 현지 상황을 모른다기에 제가 돈을 마련해 북경 가는 침대권 두 장을 샀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북경에 도착하자 학혜군의 딸 진과(陈果)가 중앙음악대학 정문에서 우리를 맞이했고 사전에 거처도 예약해 놓았습니다. 짐을 푼 후 저와 유운방이 천안문광장 주변을 한 바퀴 돌고 투숙지에 돌아와 진과에게 북경의 공우들을 만나 함께 상의하고 싶으니 몇 사람 불러오라고 부탁했더니 진과가 겨우 여성 공우(功友) 두 명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으나 그들이 제가 깨달은 리(理)를 받아드리지 못해 실망했습니다. 북경에 오기 전 유운방이 개봉에서는 이 사건에 참여할 많은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고 사부가 북경에서 설법한 횟수가 가장 많으므로 북경에 /‘대법/’ 리더들이 많을 텐데 광장에서 아홉 개 법륜모양 줄을 세울 수 있으면 더 없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법륜 하나에 아홉 명, 아홉 개 법륜이면 81명이 필요)
그때 저는 농담 같은 소리 하지 말라, 그리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리가 있겠냐고 생각했지만 유운방은 자신만만해서 한번 시도해보겠다며 서둘러 더 많은 사람을 찾아 상의하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많은 사람을 찾기는커녕 만나봤자 실제 목적(분신자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아홉 개 법륜, 81명 참여 계획을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지형을 살펴보고 희석재료를 파는 페인트 상점도 찾았습니다(분신에 필요한 연료).
북경에 5일 체류하던 마지막 날 밤, 유운방이 개봉의 한 공우(功友)와 통화를 하고 나서 개봉에 돌아가려 했습니다. 우리가 말없이 떠난 바람에 두 가족이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찾아 다니고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습니다. 가족들이 비통해하는 마음을 상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화를 놓자 저는 이튿날 개봉에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집에 들어서자 아내가 저를 붙잡고 울었지만 위로의 말 한마디 찾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하도 꼬치꼬치 캐고 묻기에 할 수 없이 유운방과 함께 북경에 가서 공우들을 만나 법 학습 심득을 교류하고 오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해서야 겨우 풍파를 가라앉혔습니다.
그 후 사부의 경문이 끊임없이 발표되고 우리도 꾸준히 학습했는데 /‘집착/’을 비우고 걸어 나와 모든 수련자들이 천안문광장에 가서 /‘호법(护法)/’하라는 의도였습니다. 사부는 이미 걸어 나온 제자는 위대한 제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저의 아내와 딸도 천안문광장에 가서 /‘호법/’하려고 하기에 우리 세 식구가 함께 북경에 가서 호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01년 1월 6일경, 유운방이 저에게 사부의 수사본 /‘경문/’ 한 장을 줬는데 불(佛)은 그가 존재하는 우주와 그 우주의 중생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과 생명까지 바치는데 반드시 이런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법/’의 억울한 누명과 사부의 부실 죄명을 깨끗이 씻어주기 위해서라면 육체도 서슴없이 희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천안문광장에 가서 분신자살을 행할 결단을 내리고 이로써 큰 물의를 일으켜 /‘대법/’에 대한 정부의 태도 전환을 촉구하리라 결심했습니다.
2001년 1월 8일 이후, 학혜군이 수차 유운방을 찾아와 천안문광장 분신자살건을 담론했고 딸 진과도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진과도 참가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 젊은 나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찡해났습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이유로 무턱대고 막겠냐는 생각을 다시 했고 또 이로 인해 그들 모녀에 대한 공경심이 떠올랐습니다.
북경에서 실행될 분신계획을 내내 확정짓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페인트 상점에서 유운방과 한담하다가 불현듯10여 년 전 CCTV 에 방영된 만화가 생각났습니다. 섣달 그믐날 전통에 관한 신화였는데 /‘석(夕)/’이라는 악마가 속세에 내려와 난을 일으켜 천하 백성들에게 큰 재앙을 가져오고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삼키고 광풍과 홍수, 가뭄을 몰아와 백성들이 분분히 분향하고 하느님께 천신을 보내 /‘석/’이라는 악마를 다스려 달라고 빌었습니다. 나중에 /‘년(年)/’이라는 신동(神童)이 하늘에서 인간세상에 내려왔고 고전 끝에 악마 /‘석/’을 항복시켜 천하가 태평을 도로 찾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좋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 음력 30일을 /‘제석(除夕)/’이라 정하고 그 이튿날인 정월 초하루를 /‘년/’의 승리를 경축하는 날로 지정해 온 천하가 함께 경축하는 날로 정했답니다. 유운방이 듣더니 흥분을 금치 못했는데 종래로 그 토록 흥분하는 유운방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분신자살 실행 날짜를 섣달 그믐날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1월 10일 즈음, 유운방이 며칠 전에 학혜군으로부터 받은 이 일을 진행하는 경비 3000원에서 1000원을 저한테 주면서 침대권 기차표 4장을 사라고 했습니다. 또 한사람이 누군가 물었더니 유보영(刘葆荣)도 참가한다고 했는데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 파출소에서 저를 찾는 중이라 경계심이 높은 저는 기차역에서 누구에게 들킬까 봐 걱정하던 중 피뜩 유춘령(刘春玲)이 떠올랐습니다. 다들 그녀가 기민하다고 하기에 유춘령네를 찾아갔습니다. 그날은 1월 11일인데 그녀와 딸 유사영(刘思影)이 집에 있었고 지금 파출소에서 나를 찾고 있으니 1월 16일 북경 가는 침대권 기차표 4장을 사달라고 부탁했더니 통쾌하게 대답하며 누가 가며 뭘 하러 가는가 물었습니다. 저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 부탁이라고만 대답했습니다. 옆에 있던 딸 유사영도 함께 가자고 어머니를 졸랐고 (그들 모녀가 천안문광장에 여러 번 갔었고 며칠 전에 금방 돌아왔음), 그녀가 거듭 물어도 저는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깨달음이 높은 공우들이 천안문광장에 가서 분신자살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어떻게 그녀의 귀에 들어갔는지 흠칫 놀라 누구한테서 들었냐고 물었지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그녀는 자기도 북경에 가서 이 일을 할 생각이 있고 꼭 하겠다며 흥분했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감동된 나머지 그녀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딸도 듣더니 기어이 함께 가려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큰 일 났다, 어린 유사영이 어머니가 없으면 고아로 남을 것이고 함께 간다면 열두살인 그에게는 너무 잔혹하고 또 애가 감당하지도 못할 것이지만 그들이 이 일을 했다가는 대법에 막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걱정에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제가 이해관계를 잘 설명하여 유춘령을 설득시켰고 유춘령이 설 지나 꼭 데리고 가겠다고 딸을 구슬렸습니다. 그런데 딸이 더 세게 떼를 썼고, 유춘령이 자기가 책임지고 딸을 설복시킬테니 이번에는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유춘령 집에 기차표 찾으러 갔는데 그녀가 자기 모녀도 같이 가려고 기차표를 샀다고 말했습니다. 재차 그들에게 이해관계를 설명하고 표를 물리라고 강요해서야 그녀가 할 수 없이 표를 물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날인 1월 16일 밤, 저는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하려고 여동생 집을 찾아갔습니다. 둘째 여동생과 셋째 여동생 그리고 딸의 남자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눈치라도 챌까 봐 저는 남쪽 근교에 사는 공우 집에 가서 잠시 피신해 있을 것이라 했고 비감한 표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속은 쓰렸습니다. 문을 나서는 순간 뭉클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가족들이여, 당신들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지만 가까스로 참고 삼켰습니다. 원만을 /‘수련/’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부가 그와 관계되는 사람을 함께 천국세계로 제도해간다고 한 사부의 말이 피뜩 떠올랐습니다. 저는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어머니여, 가족들이여, 기다려 주십시오. 사부의 말을 잘 들으면 틀림없습니다. 수승(殊胜)할 시각이 멀지 않았습니다. 모질게 버리고 떠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털어놓을 수 없지만 때가 되면 당신들은 내가 한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법/’에 대한 인식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고는, 입으로만은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대법/’을 수호하기 위해 반드시 속세의 정을 비워야 합니다. 저는 남경항가(南京巷街) 남단까지 걸어가서 택시를 타고 곧바로 역전으로 향했습니다.
역전에 도착하여 잠시 후 설홍군도 학혜군을 바래다 주느라 택시를 타고 역전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설홍군에게 홈 입장권을 사주고 설홍군이 학혜군의 짐을 기차에 올려다 줬습니다. 그런데 열차간 입구에서 차에 오르고 있는 유사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기분이 극도로 불쾌해진 저는 기차 안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퉁명스럽게만 대답하고 북경에 도착했을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북경에 도착해서도 계속 이게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데리고 학혜군이 알려준 대로 387번 버스를 타고 중앙음악대학 정문에서 내려 진과를 기다렸습니다. 진과가 나와 우리 일행을 데리고 대학내 식당에 들어가 아침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북경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공우집을 찾아갔습니다. 저와 유운방이 밖에서 기다리고 잠깐 후 젊은 청년이 나와 우리를 데리고 문두구(门头沟) 성자(城子)역에 갔습니다. 다시 차에서 내려 미리 예약한 어느 단지내의 큰 아파트(방 두 개, 거실 두 개, 거실은 칸막이로 막았음)로 우리를 데려다 주었는데 여성들이 안쪽 방과 거실을 사용하고 저와 유운방이 바깥쪽 방을 사용했습니다. 짐을 푼 후 저희는 단지 입구의 슈퍼에서 식품과 야채류를 수두룩이 구입했습니다. 갈 때 일행이 갖고 간 돈이 8000원 정도였습니다.
우리를 데리고 온 청년은 우리가 그곳에서 몇일 머물다가 다른 /‘대법/’ 제자들처럼 천안문관장에 가서 한번 떠들다 북경을 떠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이때 유운방이 청년에게 북경 공우 몇 사람을 더 만나 상의하고 싶다고 했고 그날 저녁 청년이 다시 찾아와 저와 유운방, 진과를 데리고 차를 타고 어느 식당을 찾아갔는데 5명의 북경 공우들이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까지 합해 총 9명이었습니다. 저와 유운방은 북경에 온 실제 목적을 말하지 않고 일단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았는데 결국 그들의 /‘깨달음/’이 아직은 설법의 표현에만 머물러 있었고 그 중 유수근(刘秀芹)이란 사람의 깨달음이 특별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두 시간 채 되기도 전에 저는 유운방에게 더 말하지 말라는 눈치를 보냈습니다. 끝나면서 유수근이 저에게 연락처를 남겼고 기타 사람들의 연락처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날 유수근이 택시를 불러 우리 세 사람을 거처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