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귀중(李贵仲), 남, 1960년 2월 2일 출생, 아버지가 일찍 장사를 시작해 어릴적부터 가정형편이 넉넉한 편이었다. 부지런하고 유능한 아버지 덕분에 특별히 부유하지는 못했어도 먹고 입을 걱정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다 1976년 5월 18일, 갑작스런 차 사고로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그의 일가 여섯식구는 가족을 잃은 아픔과 더불어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주요 노동력 상실 후 이귀중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도와 가정의 중임을 떠메고 겨우 열여섯 살 나이에 중학교를 중퇴했다. 일가 생계를 위해 그는 일이란 일은 가리지 않고 찾아했고 소년 시절의 즐거움을 박탈당했다. 수없이 불평을 하기도 하고 힘겨운 이 세상을 떠날 생각도 가끔 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조만간 생활이 개변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1983년 그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집안의 노동력이 늘어났지만 가난한 생활은 여전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두 가정의 중임을 떠메게 되었다.
1995년 이귀중은 처음으로 법륜공을 접촉하게 되었는데 함께 일하던 공우가 쉴 참에 그에게 법륜공을 소개했던 것이다. 날마다 힘겹게 고생하지 않고도 먹고 입을 걱정없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하기에 그는 어려운 생활에 실험삼아 수련을 시작했다.
초기에 이귀중은 일에 바빠 퇴근후 일찍 귀가해 휴식하느라 법륜공을 수련할 시간이 없었고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그 공우가 함께 연공하자고 여러 번 찾아왔으나 시간이 없는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로 회피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이귀중이 법륜공에 큰 열성이 없자 공우가 “이래서야 되겠니, 계속 이렇게 정성없이 연공에 노력하지 않으면 너는 원만할 수 없고 먹고 살 걱정과 병과 재난이 없는 행복한 생활은 커녕 오히려 가족들에게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법륜공의 사설을 믿은 이귀중은 더럭 겁이 났다. 그래서 낮에도 일을 별로 하지 않고 있다가 저녁만 되면 법륜공 연공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연공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위해 빚을 내 농용 트럭 한대를 사서 렌트카를 운영하면서 짬짬이 연공했고 전단지를 배포하는 일까지 맡았다.
1999년 7월, 정부에서 법륜공을 단속했지만 이귀중의 원만에 대한 갈망은 조금도 변함없이 법륜공이 좋은 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부터 그는 비밀리에 법륜공을 연공하기 시작했고 후허호터지역 법륜공단체 두목으로 발전했다.
지난 10년 남짓한 동안 이귀중은 아내, 장모, 외사촌 동생 등을 모두 법륜공핵심으로 발전시켰고 장모 고향에 법륜공 홍보물을 인쇄하는 비밀 작업실까지 설립하고 원만할 꿈과 행복한 생활의 환상에 빠져 꺼리낌 없이 법을 위반했다.
2012년, 구정을 며칠 앞두고 이귀중부부는 친척 결혼식 참석차 함께 장모의 고향에 내려갔다. 결혼식이 끝난 후 화물차에 법륜공 인쇄물을 가득 실었다. 구정전에 법륜공 인쇄물을 후허호터에 실어다 배포, 자신의 한해의 /‘공덕/’에 만족스러운 종지부를 찍고 온 가족이 하루 빨리 원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원만은 커녕 재앙만 떨어졌다.
불법인 법륜공 인쇄물을 가득 실은 이귀중은 어서 빨리 집에 도착해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 겠다는 생각에 두렵고 조급한 마음으로 과속으로 몰았다. 호탁(呼托)도로 34km까지 왔을 때 앞에서 달리던 석탄 트럭이 길을 막아 추월하려고 금방 속도를 가했는데 맞은 켠에 차 한대가 마주오고 있었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미처 차를 멈추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마주 오는 차를 피하려 핸들을 꺾으면서 도로변의 큰 나무에 차를 들이박았다. 심한 충격에 이귀중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다시 의식을 회복하니 자신이 교통경찰에 의해 인민병원으로 이송돼 누워있었다.
운전석이 나무에 정면으로 들이박지 않은 덕에 이귀중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아내와 장모는 즉사했다. 비보를 들은 그는 멍하니 병원 천장만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법륜공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 헌신했는데 얻은 게 도대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