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명의 생전 사진
호남성 원릉(沅陵)현 대합평(大合坪)향 대합평촌에 살고 있는 장지화(张志华, 1967년 4월 28일 출생)입니다. 저의 형님은 장지명(张志明, 1965년 12월 10일 출생), 여동생은 장지평(张志萍, 1969년 12월 22일 출생)입니다.
제가 12세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15세 때 어머니가 일하시다 논두렁에서 쓸어져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3자매는 서로 의지하며 살았고 형님은 아빠 노릇 어머니 노릇을 하면서 우리 둘을 보살폈습니다. 아껴먹고 쓰며 우리를 공부시켰고 고생스레 우리들을 키워주고 결혼까지 시켜줬습니다. 그러나 형님은 저와 여동생의 행복을 위해 평생 결혼도 못하고 과로에 지쳐 온 몸에 병만 늘었습니다.
1997년 7월 형님은 배가 아파 현인민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더니 만성위염에 담결석, 고혈압으로 진단이 났고 의사는 입원치료를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2000원 입원비를 낼 수 없어 위강녕(胃康宁), 강압령(降压灵), 소염리담편(消炎利胆片) 등 약만 떼 갖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튿날 귀가도중 형님은 현 체육장을 지나는데 /‘의무수공(义务授功), 거병건신(祛病健身)/’이란 현수막을 걸어놓고 숱한 사람들이 모여 연공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속에는 현성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한 마을 사람 이성발(李盛发)이도 끼여 있었고 형님을 보자 이 공이 법륜공이라는 공인데 강신건체뿐만 아니라 소업으로 병을 없앤다 했습니다. 병치료에 마음이 급한 형님은 마침 돈 없이도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을 얻은 줄로 알았습니다.
이튿날 형님은 집안일을 대강 인수하고 짐 싸들고 부랴부랴 현성으로 떠났고 그들과 함께 연공하고 체육로 근처에서 방 한칸을 임대하고 거주했습니다. 시골사람의 부지런함으로 인차 근처의 건축현장에서 일자리도 찾았고 이때부터 그는 현장일을 하면서 연공하고 법을 공부했습니다.
연공에 성심껏 부지런한 형님은 곧 법륜공의 전부 공법을 익혔습니다. 말과 행동이 깔끔하고 시원스러운 형님은 연공장의 보도원으로 됐고 연공 음악을 틀어주고 자료를 배포하고 새로 가입한 성원들의 공법을 지도했습니다.
1999년 나라에서 법륜공을 취체, 이때 형은 이미 이홍지의 사설에 깊이 매혹돼 소업으로 병을 치료하고 /‘진, 선, 인/’을 수련하고 대법제자는 반드시 나가 정법을 해야 한다는 이홍지의 부추김으로 몸에 병이 있으면서도 나가 일하면서 숨어 연공하고 홍법하고 진상을 알리고 전단지를 배포하는 등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저희들이 형의 건강과 처경을 많이 걱정하고 수차 권했지만 형은 듣지 않았습니다.
2004년 5월1일, 형님은 흐리터분해서 병색이 완연한 낯색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형님은 복통을 참다 못해 두손으로 배를 누르며 식은 땀을 줄줄 흘렸습니다. 제가 “법륜공을 연공한지 몇 년인데 아직도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연공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말이 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촌 보건소에 가자 권했지만 형님은 “나 이거 병이 생겨서가 아니야, 전세에 쌓은 업력이 너무 중한 탓인데 오직 연공을 통해야만 업력이 없어져, 걱정말아, 연공하면 곧 나을거야” 했습니다. 형님은 집에서 온 밤 연공했고 병이 점점 심해 구토와 혼미까지 일었습니다. 병통에 시달리는 형님을 옆에서 보는 저의 가슴은 정말로 아팠습니다.
이튿날 새벽 저는 매부를 불러 삼륜오토바이를 임대해 억지로 형님을 현 인민병원으로 이송시켜 치료를 받도록 했습니다. 정밀검진후 의사는 저에게 “자네 형의 병은 충만형 담결석인데 담낭에 염증이 생기면서 황달계수가 높아져 반드시 입원해서 담낭절제 수술을 받아야 된다” 했습니다. 저와 동생이 친척들을 찾아가 돈을 꿔서 담낭절제 수술을 받도록 했습니다. 성공적인 수술로 형님의 건강은 곧 회복됐습니다.
퇴원 후 형님은 자기를 병원에 보내지 말았어야 되는데 수련계획을 방해한 탓으로 자신이 법륜공수련에 성심껏 전심하지 못하고 정진하지 못하고 층차에 오르지 못하게 만들어 체내의 업력이 날이 갈수록 많아져 정화되지 않고 층차에서 떨어지게 됐다 저와 동생을 책망했습니다.
2010년 4월 23일 밤, 이웃집 리량이 식후 산책 나왔다가 형의 집앞을 지나는데 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창문 틈으로 들여다 봤더니 땅에 앉아 연공을 하고 있는 형님의 낯색이 말이 아니더니 잠시후 흰거품을 토하며 쓰러지기에 사람 살려요를 외치며 120응급차를 불렀고 달려온 이웃들과 함께 안으로 잠긴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 응급차로 형님을 현 인민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진단결과 혈압이 180/100mmHg, 3급 고혈압까지 오르면서 심장박동 과속으로 쓰러지게 됐으며 제때에 응급치료를 받지 않았더라면 사망의 위험이 있었을 것이라 했습니다. 다행히 응급치료를 통해 병은 통제되었습니다.
의사가 의식을 회복한 형님에게 반드시 입원치료를 받아야 된다 했을 때 형님은 “나는 수련인이다. 사부의 법신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 약이나 치료가 필요없으며 입원도 필요없다. 당신들이 나한테 주사를 놓았는데 사부님이 탓하는 날엔 당신들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며 병원에서 나와버렸습니다.
리량의 전화를 받고 저와 동생이 그날 밤 택시로 현 인민병원에 도착했을 때 형은 이미 종적을 감춘후었습니다. 우리가 재차 리량을 앞세우고 형님이 살고 있는 임대방을 찾아갔을 때 방문은 잠겨있었고 형님은 행방불명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저와 동생은 근처에 여관을 잡고 그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병원에 보내 계속 치료를 받도록 하려 형이 일찍 돌아오기를 바랬고 연속 3박3일 지켰지만 여전히 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농사철이라 저희들은 어쩔 수없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 후 저와 동생은 여러번 시내에 들어가 형님을 찾았지만 번마다 헛수고었습니다. 리량은 형이 원래 임대방을 물리고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그 거처를 잘 모른다 했습니다. 형님은 성심껏 법륜공을 수련하기 위해 거처까지 옮기며 저와 동생을 피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던 일이 끝내 생기고 말았습니다. 2011년 4월 25일 오전 9시, 경찰의 연락을 받고서야 저는 체육로 4호 5동 101실에서 이미 눈을 감은 형님을 보게 됐습니다. 형님은 소파에 비스듬히 쓰러진 채 다리를 꼬고 앉았고 온몸의 일곱구멍에서 피가 흘렀는데 눈뜨고 보기 끔찍했습니다. 법의관의 감정결과 형님은 가부좌 시간이 너무 오랜 탓에 혈압이 갑자기 오르면서 뇌출혈을 일으켜 숨졌고, 아까운 46세 젊은 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