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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이 장지영을 죽였다 (포토)

2012-05-28 기원 하 다:Kaiwind Auteur:문화

 장지영 생전 사진

장지영(张志英), 1945년 8월 출생, 강소성 동대강항(东台弶港)농장에서 일하다 퇴직, 남편의 이름은 낙기우(骆其友), 농장 퇴직 간부로 전에 얼굴 중풍으로 언어 능력을 거의 상실, 아들은 대학졸업후 상해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결혼,자립했다.
 
1993년 10월, 장지영은 농장에서 일하다 옥수수를 가득 실은 덤프트럭에서 추락, 머리를 다쳐 경미의 뇌진탕을 일으켰고 퇴직후 나이가 들면서 고혈압, 심기염, 감기 등 여러 질병으로  생활상 큰 불편을 겪었다.

1998년 10월, 아들 동행하에 상해 청십자뇌과의원 뇌과 전문가팀을 찾아 회진, 여러가지 검사를 받고 난후 전문가들은 침구, 맛사지, 전자기 자극, 재활운동 등 치료방안을 제시했다. 그후 장지영은 줄곧 아들집에 체류하면서 정기적으로 재활운동 치료를 받았고 차츰 호전을 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장지영은 자전거 짐바구니에서 법륜공전단지 한장을 주었다. 법륜공은 불가 8만 4천 불문중의 하나로 우리 이 세대 인류문명 역사시기에 종래로 공개적으로 전해지지는 못했지만 선사시대에 많은 사람을 제도했다. 법륜공은 진정으로 성명쌍수(性命双修)에 속하는 공법이며 법륜공을 연공하는 사람은 동연령에 비해 젊어 보이고 몸에 있는 질병을 포함한 나쁜 물건들이 깨끗이 청리된다. 법륜공을 어느 정도 수련하면 원만할 수 있고 성불승선(成佛升仙)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법륜공을 수련하면 정말로 이렇게 많은 좋은 점이 있고 쉽게 배울 수 있다 믿은 장지영은 주동적으로 보도소와 연락을 취해 수련을 시작했다.
 
1999년 7월, 나라에서 법륜공을 취체했다. 결코 연공을 포기하지 않은 장지영은 줄곧 숨어서 연공했고 전에 다니던 연공장 공우들 모임에 드나들고 법륜공 전단지를 붙이고 배포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아들이 안후 갖은 애를 써서 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2001년 봄, 아무리 권해도 소용없자 아들은 어머니를 고향에 보내 치료를 받도록 했다.  옛날 공우들을 멀리하면 자연히 연공을 포기하고 치료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도 있었지만 년세 많으시고 언어장애가 있는 아버지 신변에서 생활을 돌봐드렸으면 하는 바램에서였다.

그러나 장지영은 결코 연공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집에서 연공, 종래로 멈추지 않았다. 주동적으로 기타 공우들과 연락하고 법륜공의 활동에 참가하면서 아들이 정기적으로 부쳐오는 강압약과 풍습에 먹는 약을 슬그머니 다 버렸다. 남편은 장지영의 연공과 치료에 신경 쓸 기력이 없고 아들은 창업에 바쁜시기라 미처 어머니의 병세를 일일이 체크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자기 부탁대로 약을 복용하고 치료를 받는줄로만 알았다. 이렇게 장지영의 건강은 날로 약화됐다.
 
2009년 12월, 장지영은 갑자기 배가 아파 진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뒹굴었다. 병원으로 보내져 검사 결과 자궁기태류었다. 의사의 설명에 따르면 기태류는 거의가 양성이며 년령이 많아지면서 악성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으므로 일단 판정되면 하루빨리 제거수술을 받아야 수술지체로 종양이 악성으로 발전되는 후과를 면할 수 있으며 선진적인 최소 침습 설비로 수술치료를 할 수 있다.
 
아들은 소주시 종양병원에서 제거수술을 받았으면 했지만 장지영은 “이것은 종양이 아니라 내가 연공으로 얻은 원영(元婴)이고 연공을 높이 한 사람만이 원영이 생길 수 있다”며 치료를 한사코 거부했다.
 
어머니가 이토록 중독됐으리라고는 생각밖이라 입이 마르도록 권했지만 소용없고 또 억지로 기어이 어머니에게 수술을 받으라 할수도 없어 우선은 어머니를 동대시 인민병원에 입원시키고 차츰 생각을 돌리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장지영은 아들이 상해에 업무처리하러 간 틈을 타서 집으로 도망쳐 왔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장지영은 즉시 공우들을 찾아갔고 공우들과 함께 자기가 /‘원영/’을 얻은 즐거움을 나눴다. 공력을 높혀 원영을 어서 키우고 빨리 /‘원만성불/’되기 위해 그는 또 공우들을 자기와 함께 연공하자 했다.
 
뒤늦게야 어머니가 병원에서 도망했고 치료를 거부한다는 말을 들은 아들은 조급한 나머니 여러 친지들을 불러 함께 어머니를 권했다. 그렇지만 고작하는 소리가 친지들 모두가 자기 연공을 방해하는 /‘마/’고 자기는 이런 친지들을 아예 인정하지 않으며 “법륜공을 연공하는 사람은 반드시 육친의 정, 우정을 버려야만 층차에 오를 수 있고 원만할 수 있다” 였다.
 
할수없이 아들은 상해 큰 병원을 찾아가 전문가의 자문을 구했다.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면 이 병은 양성 종양으로 아직 악화는 되지 않았지만 통제하지 않으면 자궁에 상해를 가져오며 파열, 대출혈 등 상황을 유발할 수 있는 병이다. 수술치료가 가장 효과적이나 본인이 수술을 원하지 않으면 임시 약으로라도 종양이 제멋대로 자라지 못하도록 차단을 시켜야 했다.
 
아들은 전문가의 말대로 먼저 약으로 차단시키고 병세발전에 따라 상응한 치료를 진행하려 했다. 약을 거부할 것이라고 짐작한 아들은 도우미를 찾아 옆에서 시중들게 했고 특별히 약이라 하지 말고 보건품이라 말하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치료, 통제 효과가 생기기를 바랬다.
 
약물 치료를 통해 얼마간 통제되자 아들은 재차 그와 수술을 제의했고 장지영은 여전히 딱 잡아뗐다. “내가 무슨 약을 쓴다고 그래, 엄마 지금 멀쩡하잖아, 수술을 받지 않고 약을 먹지 않아도 저절로 나았잖아, 이홍지 대사한테 감사드려야 할 일이고  나를 구해준 법륜공에 감사해야 될 일이야”
 
아직도 어머니가 제정신 차리지 못하자 아들은 약덕에 요즈음 병세가 호전됐다 이실직고했다. 그 소리에 어머니는 침대에 쓰러져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부님, 제가 일부러 당신을 속인게 아닙니다. 아들이 저를 속였습니다. 모든것이 제가 육친의 정을 철저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복으로 되풀이했다.
 
2010년 3월부터 장지영은 단식으로 아들의 모든 치료조치에 항의했고 말끝마다 아들을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여전히 매일 손에 <전법륜>을 펼쳐들고 이홍지의 초상화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반복해서 중얼중얼했다.

2010년 8월 장지영은 재차 복통을 이기지 못하고 쇼크를 일으켰다. 아들이 그를 병원 응급실로 이송했고 진단을 마치고 난 의사는 기태류가 악화되기 시작했고 종양이 확대되어 반드시 수술을 받아야지 그렇지 않을 경우 생명위험이 있다 했다. 아들이 무릎을 굻고 앉아 울며 수술받으러 가자 애걸했지만 장지영은 기어이 그건 종양이 아니라 몸에 자란 원영이며 절대 수술을 받지 않는다 했고 원영이 점점 커가고 원만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다 은근히 기뻐했다.
 
그러나 원만은 결코 다가오지 않았다. 2011년 3월, 구정후 장지영은 종양파열, 출혈, 감염 등 합병증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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