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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평의 죽음(포토)

2012-05-11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소양범


 이의평 생전 사진

 

2012년 구정, 몇날 며칠동안 구질구질 내리는 비로 음침하고 을씨년스러워진 날씨가 사람들 마음을 더 서글프게 만들었고 이의평(李毅平)일가의 마음은 빙점으로 내려앉았다. 이의평이 돌아간지 1주년이 되지만 시간은 결코 가족들의 아픈 마음을 덜어주지 못했다.

이의평, 1952년 출생, 생전 절강공상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항주(杭州)시 상성 (上城)구 소영(小营)가도에 살았다.

1992년, 40세의 이의평은 병원검사에서 당뇨병환자로 판정됐다. 이때부터 당뇨병이 그의 심병으로 됐고 갖은 방법을 다 써보고 많은 보건품을 복용했지만 별 효과 없었다.

1996년 6월 어느날, 이의평은 고중때 동창 황소란(黄素兰)을 통해 병이란 업력이므로 병이 생기면 당연히 소업을 해야 되고 법륜공을 수련하면 사부가 신체를 청리해 줄 수 있으므로 약을 복용하지 않고도 병이 치유된다는 등 소개를 받았다. 뜻밖의 희소식이라 당장에서 <중국법륜공>, <전법륜>과 연공에 관한 녹음테이프 한세트를 구입하고 황소란이 시키는 대로 짬만 나면 녹음테이프를 듣고 <전법륜>을 베끼고 가부좌 연공을 했다.

1997년 3월부터 이의평은 약을 중지하고 몸이 아무리 불편해도 병원검진을 거부하고 치유의 모든 희망을 소업에 기탁, 집에 이홍지사진과 법륜공휘장을 높이 걸어놓고 매일 정례모배했다. 대학교 선생인 이의평은 연공을 시작해서 얼마지나지 않아 인차 항주 황용(黄龙洞)동 연공장의 보도원으로 됐고 정진하고 층차에 오르기 위해 5만원을 들여 이홍지 서적과 설법자료, 비디오 테이프 등을 구입해 공우들에게 나눠줬다.

1998년 2월, 남편 좌소보(左小宝)가 직장 수요로 외지로 전근했고 19세의 아들 좌상(左祥)도 상해로 공부하러 떠났다. 이의평은 가족들의 간섭없이 매일 전력으로 법륜공을 공부하고 연공했고 자신의 체내 업력이 하루 빨리 철저히 제거되기를 기대했다.

1998년 9월 20일, 이의평은 법륜공이 항주에서 조직한 제1차 수련심득교류회에서  아래의 말을 남겼다. “저는 법륜공만 공부하고 연공할 것이며 믿을 것입니다. 사부님이 /‘금후 연공과정에서 당신은 여러가지 마난(魔难)에 부딪치게 될것이다. 이런 마난이 없으면 당신은 어떻게 수련할 것인가? 사람은 실천속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심성을 마련(魔炼)해야만 심성을 제고할 수 있다/’ 했으므로 저는 연공인의 표준에 따라 마난중에서 단련을 받을 것이며 개인 이익을 중요히 여기지 않고 원만에 이르는 그날까지 용맹하게 정진(精进)할 것입니다.”

1999년 7월, 나라에서 법에 의해 법륜공을 취제, 그러나 이의평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후 몇 년간 이의평은 법륜공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더러 더더욱 정진하여 법 공부와 연공을 유일한 정신기탁물로 삼고 법륜공 사설에 깊이 빠져 당뇨병을 업력으로, 사부가 원만을 향해 나가라 그에게 안배한 고비와 고험이라 깊이 믿었다.

2004년초부터 이의평은 병가를 내고 집에서 출근하지 않았다. 매일 스케줄을 빡빡하게 짜고 아침에 법 공부와 연공을 진행하고 오후에 인터넷에서 신경문을 다운받아 반복으로 읽고 저녁 11시, 12시경에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프린트한 것들을 들고 항주, 소흥 등지의 상점들에 붙이고 배포했다.

2004년 3월, 오랫동안 약을 복용하지 않은 탓으로 혈당이 높아지고 시력 감퇴, 발이 붓기고 연공하다 쇼크를 일으켜 병원에 보내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겨우 목숨을 건진 이의평은 가족들과 의사의 눈을 피해 병원을 떠났다. 친지들이 사처로 애타게 찾아다녔고 결국 집에서 가부좌하고 앉아 연공하는 이의평을 발견했을 때 아들은 화가 터져 두눈을 치켜떴다. 그 상황에서도 이의평은 “나의 병은 속인들의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결국은 사부에게 의지해야 되고 소업을 해야 된다” 했다.

그후 이의평의 남편과 어머니 고련영(高莲英)이 여러차례 권유했지만 이의평은 그들의 권고를 들은척 만척 여전히 자기 고집을 부렸다. 미친듯이 연공을 했지만 건강상태는 하루하루 약화됐고 약을 복용하라 권하면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얼버무려 넘겼고 정 재촉하면 죽음으로 협박했다.

2009년 8월, 이의평은 심한 당뇨병 합병증으로 생명이 위기에 이르렀다. 가족들이 억지로 그를 항주 적십자병원에 보내 응급치료를 받았고 100여일간이나 입원치료를 받았다. 이래도 그는 정신차리지 못하고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 원인이 사부의 법신이 보호해준 덕이라 했다. 퇴원후 이의평은 금방 약을 중지했고 여전히 연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2010년 5월, 이의평의 공우 한명이 병사했다. 가족들은 이의평이 이번에는 생각을 달리하고 수련을 포기할 것이라 믿었지만 이의평은 공우의 죽음이 연공과 법 공부에 정진하지 못해 조성된 것이라 했다.

2010년 12월, 어머니는 딸이 가슴 아파 그를 해남에 불러 휴양시켰다. 병세는 이미 위중했고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됐고 극도로 수척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픔을 참으며 연공을 견지했고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병원에 가자해도 거절했다.

2011년 1월 9일 오전, 이의평은 어머니집에서 가부좌 연공하다 갑자기 호흡을 멈춰 해남시 인민병원에 보내졌고 맥박과 혈압을 측정한 의사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응급차에서 숨을 거뒀던 것이다.

14년 동안이나 법륜공에 심취됐던 이의평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생명의 대가만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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