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애환의 생전 사진
2011년 9월 2일은 저희 어머니 1주년 기일을 맞는 날입니다. 이날 우리 형제 셋은 침통한 마음으로 어머니 묘지를 찾아 향을 피우고 제사를 올렸습니다.
저희 어머니의 성함은 왕애환이고 1950년 7월 출생, 생전에 하남성 남낙(南乐)현 양촌(杨村)향의 평범한 가정주부었습니다. 문화지식은 없지만 시골 여성 특유의 순박함과 무던함, 근면성실만은 고히 간직하셨던 분입니다. 부모님들은 우리 형제 셋을 키우느라 고생끝에 온몸 이곳저곳 많이 아프셨지만 돈이 아까워 참고 견디며 병원 다니는 법 거의 모르며 살아오셨습니다.
1998년 7월의 어느날, 이웃에 사는 염서흠(闫瑞钦)이 저희 집에 찾아와 인근 마을에 법륜공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공을 배우면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며 약이나 주사가 없이도 병을 치료할 수 있고 그의 친척 한사람도 이 /‘신공/’덕에 다년간 앓던 풍습병을 치료했다 전했습니다.
하도 좋다기에 어머니는 실험삼아 그의 뒤를 따라 인근 마을에 가서 강의 몇번을 들었고 법륜공에서 말하는 그 따위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며 원만한다는 설교에 매혹돼 법륜공을 연공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빨리 연공으로 병을 고치기 위해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공장에 가서 연공을 견지했습니다. 얼마후 심리작용으로 자신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느껴져 연공장 출입은 물론 법륜공의 선전원까지 담당했습니다. 글을 읽지 못하면서도 책과 테이프를 수두룩하게 사 놓고 연락이 되는 친지들을 다 우리 집에 불러 함께 연공하자 그들을 권했고 글을 아는 공우를 시켜 <전법륜>을 여러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더 많은 성원을 발전시키라 공우들을 동원했습니다.
어머니의 이런 긍적적인 표현은 당연히 보도원의 칭찬을 받았고 보도원은 이렇게 견지하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진수제자로 될수 있다 어머니를 격려했습니다. 어머니는 더 발벗고 나섰고 집안일, 농사일 다 뒷전으로 밀어놓고 연공장에서 연공이 끝난 다음에도 곧바로 집에 와 계속 연공하고 침식을 잃고 연공했으며 아버지과 별거한다 야단치고 가족들을 어처구니없게 굴었습니다.
몇개월후 어머니는 몰라보게 변했고 초췌한 모습에 성격도 괴벽해졌습니다. 형제들이 법륜공에 기편당하지 말고 더는 연공하지 말라 어머니를 권했지만 어머니는 “사부가 이미 법륜을 내 배속에 내려놓았고 난 이미 대법제자로 됐는데 어떻게 연공을 그만둘 수 가 있냐”며 대노하셨습니다.
1999년 7월, 나라에서 법륜공을 취췌했지만 어머니는 그 현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홍지가 제자들을 나가서 “진상을 알리라” 선동하자 어머니와 공우들은 모여 앉아 연며칠 모의 끝에 북경에 가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북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중에 송환돼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후 얼마 동안은 가족들 권고를 듣고 다시는 법륜공을 연공하지 않기로 하고 조용했습니다. 농사일도 돕고 집안정리도 하고, 이런 변화에 우리 형제들은 한시름을 덜었다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날이 며칠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염서흠이 어머니에게 본부의 보도원이 공우들을 만나러온다 슬그머니 통지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겉으로는 별 기색을 내지 않다가 저녁이 되자 구실을 대 그의 뒤를 따라 나섰고 물건 한가방 듬뿍 들고 돌아왔습니다. 열어보니 이홍지의 초상화나, 카드, 전단지 따위들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왜 다시 그 길로 가고 이 따위를 집에 들고 오냐” 화를 냈지만 어머니는 아예 변명도 없이 가방에서 이홍지의 초상화를 꺼내 자신의 방 중간벽에 걸어놓고 경건하게 무릎을 굻고 나서 인차 문을 잠그고 가방 들고 다시 나갔습니다.
이튿날 마을 집집마다의 대문과 담벽에 법륜공전단지들이 나 붙었고 사람들 의론이 자자했습니다. 어머니가 한 짓임을 알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왜 이러시냐 따졌더니 어머니는 “그래, 나와 공우들이 붙인게 맞아, 사부님는 지금이야 말로 우리를 고험할때라 이때 나서서 이것들를 붙여야만 진정한 수련자고 사부의 제자며 사부의 점화(点化)를 얻어 하루빨리 원만한다 말씀하셨어” 아주 태연하게 승인했습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또 다시 집에서 연공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두문불출 침식을 잃고 꼬박 이틀 연공하다 쓰러져 120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고 의사는 심한 영양실조에 경미의 우울증까지 겹쳐 입원 진찰이 필요하다 말했지만 정신차린 어머니가 병원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어머니에게 업을 추가시키는 불효자라며 난생 처음으로 저한테 손찌검을 했고 주사바늘을 뽑아버리며 집에 돌아가자 물건을 챙겼습니다. 형제들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된다 권했지만 어머니는 미쳐버린 사람같이 머리를 벽에 쫗았습니다. 그 상황에 의사는 일단 집으로 모셨다가 진정된 다음에 다시 오라했고 꼭 어머니의 식사와 휴식에 신경을 써야 된다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여전히 연공, 우리가 아무리 권해도 죽어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 우겼습니다.
2008년 가을, 어머니는 기침을 쉴새없이 했고 거기에 각혈까지, 피골이 앙상한 모습 차마 보기 애처로왔습니다. 아무리 병원에 가자 권해도 “난 소업중이야. 나 지금의 공력으로 절대 병이 생길 수 없으니 너희들 걱정할 필요가 없다” 했습니다.
2개월후 어머니의 기침은 점점 심했고 각혈도 점점 더 많았습니다. 형제들이 억지로 그러는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 검진을 받았습니다. 뜻밖에도 폐암이었습니다. 의사는 당날로 입원 치료를 권했지만 어머니는 아예 자신이 암이라는 진단을 믿지 않고 우리가 못살게 군다 야단치며 치료에 전혀 협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할수없이 의사는 보수적인 치료법을 채택, 약을 떼주며 집에 돌아가 몸조리를 잘하라 당부습니다.
어머니가 약을 복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약을 가루 내 슬그머니 어머니 밥그릇에 넣었다가 들켜 밥을 다 쏟아 버리기도 했고 나중에는 밥도 잘 드시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약을 드시라 어머니 앞에 굻어앉아 빌어도 어머니는 “사부의 법신이 나를 보호할 것이니 나 상관은 말라”며 계속 강요했다간 내가 죽는 꼴 보고싶냐 까지 했습니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암세포는 어머니의 허약한 건강을 서서히 무너뜨렸습니다. 매번 병통을 참기 어려울때마다 어머니는 두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이홍지의 초상화를 향해 끊임없이 경문을 묵념, 병통을 참는 것이 소업하는 것이라며 그 시달림을 달갑게 받았습니다.
2010년 9월 2일, 어머니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 최선을 다해 구급치료를 했지만 효과를 못 보고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 어머니는 “사부님, 저는 언제면 원만할 수 있습니까”를 속삭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영원히 실현못할 /‘원만의 꿈/’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