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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마고우가 지각천애로

2011-10-21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정문우

나는 올해30세며 중경 북배(北碚)구에 살고 있다. 양봉(梁峰)은 나보다 한살 이상인 이웃집 죽마고우었는데 우리 양가는 서로 돕고 한가정처럼 사이좋게 지냈다. 나와 양봉은 같은 소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등교때나 방과후나 우리는 항상 함께 어울려 다녔고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양봉이 선뜻 나서서 나를 도와주고 나의 든든한 뒷심이 돼 줬다. 어른들은 나와 양봉이 장차 당연히 한가정이 되리라 생각했고 나도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참 예견하기 어렵다. 나중에 발생한 일들이 나의 꿈을 산산히 부서뜨렸다.

양봉은 어려서부터 공부 잘 했고 총명해 구역, 시에서 조직하는 경기에 나가 상들을 수두룩이 타왔다. 그러나 나는 양봉이 지원하는 고급중학교에 입학하려면 반드시 열심히 노력해야만 했다. 이때 양봉이 발벗고 나서서 나의 과외공부를 도왔다.

폭우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날, 방과후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귀가하다 뜻밖게 큰 트럭과 접촉사고를 내게 됐고 양봉은 나를 막아주느라 오른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그러고도 상심하고 자책스러워하는 나를 걱정하지 말라 위로해줬다. 수술을 받고 퇴원후 양봉의 건강은 전에 비해 많이 허약해져 자주 감기를 앓았다. 평생을 두고 양봉을 잘 내조하리라 나는 속다짐을 했다.

1998년 4월, 회사 구조조정때 동시에 일자리를 잃게 된 양봉의 부모는 돈을 모아 자그마한 식당 하나를 오픈했다. 양봉의 아버지가 주방장으로 일하고 어머니가 식재료들을 사들이고 재무관리와 경리를 맡았다. 장사는 그런대로 꽤 잘되는 편이어서 바쁠때면 양봉이 가서 식당일을 도왔고 나도 시간이 날때마다 함께 거들었다.

이번에도 양봉이 또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내가 가서 식당일을 돕게 됐다. “어이쿠! 건강이 왜 저꼬라지인지, 쩍하면 감기고 정말 걱정스럽다. 걔 건강만 좋아진다면 아무 바랄것도 없는데!” 양봉어머니의 한탄에 마침 식당에서 국수를 들던 할머니 한분이 옆으로 다가와 법륜공을 소개했다. “병이 생겨도 주사를 맞지 않고 약도 먹지 않는다”,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가정이 덕을 본다”/…/… 가방에서 <전법륜>이란 책 한권을 꺼내주며 양봉의 어머니에게 함께 연공하자 제의했다. 이렇게 양봉의 어머니가 법륜공을 연공하게 됐고 또 어머니가 아들 양봉을 연공에 동원시키게 됐다.

워낙 효자라 부모의 뜻이라면 어김없이 따르는 양봉이었으므로 어머니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법륜공을 연공하기 시작했다.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건강단련이라면 아주 좋은 일이라는 생각에 양봉의 어머니가 양봉을 권할 때 나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후 진전과정이 내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연공후 양봉의 어머니 몸에서 부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양봉의 집에 갈때마다 모자가 침대에 앉아 함께 법륜공책을 펼쳐들고 있었고 옆에서 떠들거나 방해를 해서는 절대 안됐다.  식당에서는 어머니의 그림자조차 보기 힘들었다. 어느 하루 방과후 손에 책을 들고 도정신을 해서 읽는 양봉을 만났다. “이 책이 너무 좋다. 우리가 모르던 많은 일들을 이야기했고 또 우리 알기에 맞던 많은 일들을 시정했다”, “진선인”, “좋은 사람이 되고”/…/… 그날의 양봉이 나에게 너무 서먹서먹하게 안겨왔다.

어느덧 나와 양봉은 고3에 진입했고 공부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때다. 전에 양봉은 언제나 중경의과대학을 지망하겠다 했고 내 성적으로는 가망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양봉과 같은 대학을 다니고 싶었다. 내가 아직도 그 꿈을 간직하고 있냐 물었을때 너무나도 뜻밖의 대답이었다. “이전의 나는 너무 멍청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고 다친 사람을 부축하려 했지만 지금에 와서 알고보니 사람이 병이 생기는 원인은 업력때문이므로 연공하면 소업되고 병도 자연히 낫게 되는 법이니”. 그 말에 나는 재차 눈앞의 양봉이 이전의 양봉이 아님을 실감했다. 어려서부터 꿈이 의사였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다 뒤집혀졌으니.

고3후학기 양봉의 성적은 직선으로 내리금을 그었고 테스트성적도 번마다 좋지 않았다. 그래도 양봉의 어머니는 매일 양봉이를 데리고 집에서 가부좌 연공을 했고 아들이 자기와 함께 /‘원만/’하기만을 기원했다. 장사고 공부고 다 뒷전으로 밀렸다. 양봉의 부모사이에 여러번 싸움이 벌어졌고 양봉의 담임도 이대로 방치하면 전도를 망친다 양봉이 등교하지 않은 원인을 수차 전화로 물었다.

결국 양봉은 1999년 대학입시시험을 포기했다. 나는 외성의 모 대학에 입학하게 됐고 이때 나라에서 법에 따라 법륜공을 취체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양봉에게 알려줬더니 양봉은 국가에서 잘못 알고 있다 말했다.

대학 입학후 나는 가끔 양봉의 아버지를 통해 양봉의 소식을 들었다. 양봉은 법륜공에 심취되어 병에 걸려도 약을 먹지 않는다 했고 기침이 심하지만 약을 거부하고 어머니와 함께 여기저기 다니며 전단지를 배포하고 아무리 말려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했다.

그후 명절때나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때면 양봉이를 찾아갔지만 번마다 양봉은 나를 낯선사람 취급을 했다. 양봉의 부친도 철저히 절망한 나머지 자신의 무기력을 한탄하며 2002년말 식당을 양도해 버리고 외지로 일하러 떠났다.

2003년 7월 나는 순리롭게 대학을 마쳤다. 양봉과 함께 있기 위해 나는 취직이 가능한 현지의 좋은 일자리도 포기하고 중경으로 돌아왔다. 흥분해 양봉이네로 달려갔더니 그가 폐병에 걸렸다는 소식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봉은 이미 가냘플 정도로 수척해졌고 기침을 그치지 않았다. 병원에 가라 권하자 그는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라 나무랐다. 다시 양봉의 어머니를 찾아갔지만 이러는 내가 양봉한테 해를 미치게 되고 나와 양봉은 같은 층차의 사람이 아니므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 했다.

양봉은 여전히 앓는 몸으로 매일 어머니와 함께 가부좌 연공을 했고 병원진료도 받지 않고 약 한알 먹지 않았다.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고 기침이 심해졌으며 가끔 피고름을 뱉아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양봉의 어머니는 연공을 다그쳐야만 소업으로 아들의 병이 낫게 되고 건강이 회복된다며 매일 양봉이를 자기와 함께 연공하도록 했다.

2004년 5월 6일, 양봉은 재차 가래가 섞인 피를 흠뻑 토하고 나서 혼절해 쓰러졌다. 경악중에 양봉의 어머니는 그제야 응급센터를 불렀다. 시한부 폐암말기 환자었던 것이다. 내가 병원에 달려갔을때는 양봉이 병원에 입원한지 이미 3일째되는 날이었다. 혼미상태에 빠진 양봉을 보며 나는 거침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길 없었다. 양봉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 조용히 누워있었고 병실에는 오르내리는 호흡기 소리만 들려왔다/…/…

2004년 5월 10일 오후, 양봉은 영원히 호흡을 멈췄다. 겨우 24세밖에 안되는 아까운 나이에, 양봉의 어머니는 그 충격에 정신이상에 걸려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후 나는 한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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