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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서효영의 죽음

2011-08-08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울운

서신매(徐新妹), 47세, 절강성 호주(湖州)시 남심(南浔)진 심남(浔南)촌 사람, 1987년 23세 때 한 마을에 살고 있는 목공 총각과 결혼, 2년후 그들의 아들이 태여났다. 다른 집 애들은 3개월이 지나면 안아세울 수 있는데 아들은 7-8개월이 지나도 품에 누워만 있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한 결과 뇌성마비라는 판정이 내렸다. 사처로 다니며 치료에 애썼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최종 요절되고 말았다.

3년후 딸 효영이 출생했다. 딸애의 출생이 이 가정에 드리웠던 짙은 구름을 말끔히 쓸어가고 불행했던 이 가정에서 오랫만에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부지런하고 알뜰한 서신매의 손길로 일가 생활도 날로 좋아졌다. 그러나 효영이 7세 되던 해에 병원에서 만성 간염이라는 진단이 떨어졌다. 부부는 다시 딸을 위해 동분서주, 일정한 치료를 거쳐 딸의 병은 어느 정도 완화됐다. 그러나 너무 허약한 탓에 효영은 계속 여러가지 통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들을 잃은 고통을 체험한 부부는 날로 조마조마 하기만 했다. 혹여 딸을 재차 잃을가봐 병 치료에 갖은 애를 썼고 기적이 발생하여 딸이 건강하고 즐겁게 자랄 수 있기만을 기대했다.

1999년 정월 12일, 이날은 강남 옛 고을인 남심 특유의 장날이다. 떠들썩한 징소리 북소리에 사자무용 까지 공연됐고 옛 고을의 남녀노소가 다 구경에 동원됐다. 서신매도 딸의 손을 잡고 인파를 따라 인민광장까지 왔다. 바로 이때 누군가 그에게 인쇄가 조잡한 책자 하나를 안겨줬다. /‘법륜공은 소업거병/’,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가정이 덕을 본다/’라 써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이 확 트였다. 마치 건강하고 활발한 딸의 밝은 미래가 내다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온 서신매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전법륜>, <법륜대법의해> 등 서적을 구입해서 단숨에 내리 읽었다. 비록 문화수준이 높지 못했으나 사부가 한 말 일체를 철석같이 믿고 이홍지에게 충실하는 신도로 됐다. 그는 이홍지의 /‘경문/’에서 묘사한 /‘갖고 싶은 걸 다 갖는/’ 원만세계에 깊이 매혹돼 법륜대법 수련을 통해 꼭 딸의 병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 독실하게 믿었다. 전에 아들을 잃은 원인은 아들의 업력이 너무 중하기 때문인데 내가 제때에 아들에게 소업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법륜대법이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뭔가! 공력을 키우기 위해 그는 딸을 도와 소업할 뿐더러 딸에게도 자기를 따라 연공을 하라 시켰고 함께 소업을 했다. 이렇게 딸도 그의 영향으로 법륜공수련자로 됐고 다시는 주사를 맞거나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이웃들에서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분분히 “병을 더 지체하지 말아야지, 병이 악화되면 어쩌려고!” 걱정했다. 그러나 서신매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효영은 병이 없고 업력반응이므로 소업을 해야 한다 깊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우리애는 주사도 약도 필요없고 법륜공만 연공하면 즉시 완치된다” 우겼다.

이홍지의 /‘소업거병/’ 사설의 유혹으로 서신매는 여러 사람이 걱정해서 하는 말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딸의 치료를 중지했다. 그는 밤낮을 이어가며 법륜공 연습에 박차를 가했고 효영이 좀 정신이 나 하는 날이면 애를 자기집 울안에서 책을 보며 연공하게 했다. 그는 딸에게 “열심히 수련을 해야 만 더욱 정진할 수 있고 사부의 더 많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말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효영은 업력이 없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장기적으로 치료를 거부한 탓으로 소화불량, 구토, 복사, 고열, 간부위 통증 등으로 점점 수척해지고 종일 누워만 있었다. 그래도 서신매는 법륜공이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며 가족들이 복을 받는다는 /‘신기효능/’을 깊이 믿었다.

2002년 2월 친지들의 반복 권고끝에 남편도 효영이를 그냥 이대로 두는게 아니라며  서신매에게 연공을 포기하고 함께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자했다. 그러나 그는 미친듯이 남편한테 덮쳐 죽어라 때리기 시작했다.,

딸의 업력이 내려가지 않는 원인이 바로 남편이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고 남편의 잡생각이 자기 정념을 상쇄하고 딸의 업력을 더 중하게 만들었다 했다. 그는 이것이 바로 사부가 딸을 고험하는 것이고 자기를 고험하는 것이며 “우리들이 고생스레 몇년간 수련했는데 그래도 딸은 견지왜 왔지 않는가? 그런데 당신이 지금 포기하라 하면 그것은 보응을 받을 일이라” 했다.

2003년 6월부터 서신매는 어디에서 이홍지의 신경문을 얻어왔고 딸을 소업시키려면 반드시 심성을 제고해야 하고 층차를 제고해야 하며 나가서 진상을 알려야 하고 세인을 구도해야 된다 했다. 그 동안 그는 부지런하고 살뜰하던 서신매로서가 아니라 살을 맞은 것 처럼 쯤만 나면 앉은뱅이 의자를 들고 남심인민광장에 가서 가부좌 연공을 했고 다른 사람들을 붙들어 앉혀놓고 이홍지의 경문을 읽었다.

그러나 소원과 달리 2004년 12월 효영의 병세는 악화되기 시작했고 간부위의 심한 통증과 지속적인 고열증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서신매는 사부가 딸을 보우해 준다 믿고 소위 /‘호신부/’를 탁자우에 올려놓고 고두참배를 했다. “사부님 보우해 주시옵소서, 사부님 보우해 주시옵소서, 당신은 연공인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시지 않았습니까......”를 념했다. 이웃들에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라 권했으나 서신매는 미친듯이 이웃들을 쫓아냈다. 속수무책으로 벌벌 떨고만 있던 남편이 갑자기 퍼뜩 정신차리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딸을 안고 뛰쳐나갔다. 주치의사는 서신매부부에게 효영의 간염이 치료 지체로 간암(말기)으로 발전했다 했다. 그래도 서신매는 “이게 다 우리 잘못이다. 우리가 사부한테 충성을 못했기 때문이고 수련층차가 제고되지 못했기 때문이지 결코 사부가 우리 효영이를 보우해주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우겼다.

비록 1개월간의 수술, 방사선 치료, 화학약물 치료를 거쳤지만 암세포가 확산되는 바람에 효영이는 2005년 1월, 12세의 어린 나이에 영영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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