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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언니가 이렇게 우리곁을 떠날줄이야

2011-02-14 기원 하 다:Kaiwind Auteur:고금생

나의 이름은 고금생, 요녕성 요양시 태자하구 동경릉향 농민이다. 둘째 언니 이름은 고금령, 1958년 출생, 소학 학력으로 방직공장 종업원이고 소박하고 정직한 형부와 딸 하나를 두고 나와 한 마을에서 살았다. 그러나 8년전 언니는 무던한 남편과 공부하고 있는 딸을 두고 이 세상을 영영 떠났다.

 


 
둘째 언니 고금령

1997년 5월 한 마을에 살고 있는 몇몇 법륜공수련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둘째 언니네 집을 드나들며 언니보고 함께 연공하자 졸라댔다. 처음 언니는 병도 없이 멀쩡한데 그걸 배워 뭘하냐 싶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러버렸다. 그러던 그가 그들의 반복 권유끝에 차츰 /‘백일비승/’,/‘성선성불(成仙成佛)/’을 믿게 됐고 독실한 법륜공신도로 변해 버렸다. 가부좌 자세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언니는 어디서 얻어 왔는지도 모를 큰 돌 두개를 두다리 위에 얹어놓고 연공했고 법륜공의 교의에 무한한 매력을 느꼈다. 시간을 아껴가며 /‘법을 학습/’하고 연공했으며 <전법륜>에 심취되여 법륜공의 “진선인에 비추어 좋은 사람이 되고 고층차로 승화하고 명리정을 버리면 성불(成佛)할수 있다” 큰 기대를 안고 이홍지/‘대사/’가 자기를 /‘법륜세계/’로 초도(超度)하여 유유자적한 신선생활을 누릴수 있기만을 기다렸다.

수련후부터 그는 집안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종일 밖에서 공우들과 함께 연공과 심득을 교류하지 않으면 집에 앉아 이홍지의 책을 보고 녹음을 들었다.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질녀의 공부에 큰 관심을 보이여 매일 방과후 숙제를 재촉하고 공부감독에 바쁘던 언니였건만 연공후부터는 숙제관심은 물론 공부성적이 어떻는지도 묻지 않았다.

법륜공을 수련해서부터 언니는 남편과 딸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과도 정을 멀리했다. 한번은 고열을 앓는 내 아이를 촌보건소에 주사 맞으러 보내야 되는데 마침 그날 비료를 산 날이라 단돈 100원이 없어 부랴부랴 언니네 집에 달려가 돈 100원을 꿔달라 했으나 언니는 들은둥 만둥, 형부가 200원을 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수련후 몰라보게 변해버린 언니에게 형부도 여러번 연공하지 말라 권했건만 그때마다 언니는 형부와 걸고 들어 가정불화를 일으키군 했다.

1999년 7월 국가에서 법륜공을 단속한후 함께 연공하던 사람들중 대부분은 진상을 알고 나서 연공을 그만뒀다. 하지만 언니는 벼랑끝에서 멈추지 못했다. 이홍지의 “생사를 내려놓고” “나가서 정법과 호법을 하라”는 등 사설의 유혹으로 언니는 동네 다른 한 법륜공수련자와 함께 “진상을 알린다”는 명의로 마을에 전단지를 붙히고 도로변 담벽에 표어를 쓰고 지어 외지에 가서 전단지를 배포하고 현수막을 걸었다. 오로지 법륜공밖게 모르고 매일매일 법륜공수련을 통해 원만하기만을 바라는 그때의 언니가 동네사람들 눈에는 귀신에게 미쳐버린 사람으로 보였다.

2001년 5월 언니를 돕기 위해 촌위원회는 지원자를 조직하여 그에게 설복교육을 진행했다. 그러나 언니는 교훈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부의 고험을 이겨냈다 믿고 계속해서 집에 숨어서 법을 학습하고 연공했다. 동년 8월 언니는 원만을 동경하며 가출까지 했고 그후 2년간 종무소식이였다.

그러던 언니가 2003년 8월에야 재차 시 모공원에 모습을 드러냈고 행객들에게 전단지를 배포하다 정신잃고 쓰러졌다. 120구급차로 시 제3인민병원에 실려가 검진을 받은 결과 백혈병말기였다. 딸이 어머니에게 의사 분부대로 치료를 받으라 울며 빌었으나 언니는 한사코 주사와 약을 거부했고 사부가 자기를 도와 소업을 하고 자기는 곧 원만비승한다며 우리들을 자기 원만을 파괴하는 마(魔)라 했다. 할수없이 나와 형부는 그를 집으로 데려올 수 밖게 없었다.

집에 돌아온 언니는 묵묵히 온돌에 가부좌하고 앉아 연공만 했다. 당연히 병은 신속히 악화됐고 2003년 12월 45세 젊은 나이에 영영 눈을 감았다.

(Kaiwind.com, 201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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