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 19일 신화사는 “인권을 짓밟은 또 하나의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이홍지와 법륜공이 죄행을 덮어 감추기 위해 시신폐기로 흔적을 없앤 사건 진상”이란 전신원고 한편을 발표했다. 당일 저녁 CCTV초점방문취재 프로그램은 <법륜공:시신폐기로 증거를 지움, 잔인무도>란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두 매체는 동일사건으로 사천성 비(郫)현 탕원향 보춘촌 법륜공인원 류런팡(刘仁芳, 여, 1948년 출생)이 북경에 /‘호법/’하러 왔다가 하북성 삼하시 연교진의 모 임대방에서 병사한 사건을 다룬것이다. 사실을 덮어 감추기 위해 이홍지와 법륜공총부의 암시하에 류런팡은 기타 법륜공인원들에 의해 시신 폐기처분을 당했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며 바로 내가 이 사건의 조직자이며 지휘자다. 당년 <초첨방문취재>의 화면에 나도 나와 있다.
나의 이름은 조우구이펑(赵桂凤), 여, 1960년 7월 출생, 길림성 장춘시 사람이다. 대학입시시험 회복 이듬해인 1978년 나는 장춘중의학원(현재 장춘중의약대학으로 명칭 변경)침구학부에 입학했다. 1983년 대학졸업후 길림성 장춘시 중국제일 자동차회사 종업원병원에 배치받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백의천사로 일하게 됐다.
1995년 5월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진선인/’을 수련하려는 념원으로 법륜공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장춘시 제1자동차회사 2구 대산(岱山)공원 연공장의 보도원이 되었다. 법륜공수련전 나는 업무능력이 강하고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해 여러차례 선진일군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법륜공에 심취되면서 부터 누가 아무리 나한테 사정해도, 환자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나는 보고도 못본척 전혀 무관심했다. 그것이 바로 /‘소업/’이라 깊이 믿었기 때문이며 행여나 그들이 /‘업력/’을 나한테 전가할가봐 두려웠던 것이다.
법륜공에 대한 나의 충성과 정진은 법륜공 장춘총부의 긍정과 칭찬을 받았다. 그들의 조직하에 나는 연공장의 부분 인원을 거느리고 1998년 12월 4일 길림TV방송국, 1999년 7월 21일과 22일 성위, 성정부 주변에서 일으키는 소동에 참여했다.
정부에서 법륜공을 단속하자 나는 마치 제부모나 잃은듯 안타깝고 슬펐으며 정부의 결정에 극히 큰 불만을 품었다. 이홍지 경문의 독촉과 /‘정을 끊고/’ 원만하고 /‘백일비승/’ 등 사설의 유혹하에 나는 년세 계시는 부모과 어린 아이를 떼 버리고 남편을 속이고 여러차례 북경으로 가 /‘호법/’에 참가했다. 번마다의 북경 /‘호법/’에서 나는 기타 성,시 보도소소장, 부소장을 비롯한 적지 않은 법륜공핵심인물들을 알게 됐고 그들은 나를 법륜공 총부의 퉁신(童欣, 가명임, 본명은 예훙, 법륜공핵심성원 예호우의 딸)한테 추천했다. 퉁신의 직접 지휘하에 나는 /‘주신/’(筑心, 대법으로 굳고 강한 마음 다진다는 뜻)이란 가명으로 복건, 강서, 광동, 광서, 내몽고 등 20여개 성시에 가서 법륜공인원들을 동원했다. 나의 정진과 거동은 여러차레 법륜공총부의 칭찬과 긍정을 받았다. 퉁신은 직접 나한테 사부님께서 나의 /‘홍법/’행동에 아주 만족해하시니 멀지않아 곧 원만하게 될것이라 했다. 사부님의 직접적인 긍정은 나의 사욕을 더더욱 팽창시켰고 나는 마치 터지도록 바람을 불어넣은 고무공마냥 사처로 마구 튀며 법륜공인원은 어서 나오라 부추겼고 북경에 가 소란을 피우자 선동했다.
2000년 12월, 법륜공총부는 명혜망를 통해 우리 법륜공인원들에게 신기원의 신년 갑자(甲子)시 즉 2000년 12월 31일 밤 11시부터 2001년 1월 1일 새벽 1시 사이에 천안문광장에서 /‘법을 증실(证实法)/’하자는 지시를 내렸다. 곧 원만하게 될 법륜공 /‘정진/’분자인 내가 어떻게 이 /‘만고의 기연/’을 놓칠 수 있으랴? 나는 또 한번 북경에 왔다. 그러나 천안문광장은 밤에 통행단속이었으므로 우리의 /‘백일비승/’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새해 첫날의 /‘정법/’이 실패하자 우리는 또 구정기간에 천안문광장에 재차 모이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믐날 천안문광장에서 분신자살사건이 발생했다. 사후 퉁신은 나한테 “사부님은 이런 일이 발생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만약 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모든 준비는 끝났다”라 했다. 그가 말을 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는 사부님이 우리를 계속 나가서 /‘정법/’하기를 요구한다고 인차 눈치챘다.
2001년 2월 10일 나는 재차 북경에 왔고 북경시 통주구의 모 임대방에서 /‘법회/’를 열었다. 회의에서 나는 퉁신의 지시를 전달했고 법륜공인원들에게 나오라 부추기고 각종 형식으로 /‘정법/’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뒤떨어지게 되고 평생 원만할 수 없다 했다. 나의 그럴듯한 강연은 특히는 사부님의 최신지시에 대한 전달은 참석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법회/’가 끝난후 한 법륜공인원이 슬그머니 나한테 비밀이라며 말하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골머리를 꽤 앓게 됐다.
작년 년말 천안문광장의 신년 /‘정법/’에 참가하기 위해 사천성에서 온 법륜공여성원 한명이 하북성 삼하시 연교진의 모 임대방에서 병사했던 것이다. 시신은 줄곧 그대로 방치한대로 있고 몸에는 법륜대법의 휘장과 플랜카드를 지녔고 원래 집에 있을때부터 병이 있었고 도중에 그냥 기침이 심했으나 약을 먹지 않고 가족들의 권유도 마다하고 북경에 왔다 한다. 후에 병이 더 중해졌으나 사부님이 /‘소업/’시켜 주리라고만 바라다 최종 임대방에서 병사했던 것이다. 신년이 다가오자 다들 처음에는 그가 앞당겨 원만했다 생각하고 그를 방에 그대로 남겨두고 아무도 관심하지 않았다. 신년전 다들 천안문광장 /‘정법/’준비에 분주했으나 결국은 천안문관장에 도달하기도 전에 본지로 송환당하고 말았다. 그 사람은 이미 죽은지 40여일이나 됐고 방안이 더운데다 통풍도 되지 않아 만약 시신이 부패됐다면 냄새가 풍길것은 당연했다. 방 임대기한이 다 돼 오는데 시신을 제때에 처리하지 않는다면 /‘대법/’에 불리한 영향을 끼칠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난 나는 크게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10여일전에 천안문광장에서 발생한 분신자살사건으로 인해 의론이 분분하던 판이다. 명혜망은 또 분신자는 법륜공인원이 아니고 분신사건은 정부의 모함이라 했다. 물론 많은 법륜공인원들은 더더욱 명혜망의 선전을 믿고 싶었지만 한면으로 적잖은 수련자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사실 우리 핵심들도 명혜망이 분신사건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법회/’참가자중 하남 개봉에서 온 사람도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분신자 왕진둥(王进东), 호우후이쥔(郝惠君)과 류춘링(刘春玲)을 알고 있었고 그들은 틀림없는 법륜공수련자었기 때문이다. 누가 /‘정법/’의 길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 공안기관이나 정부에서 알게 될것이고 매체에 폭로시킬것이며 법륜공이 사람을 해치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될것이고 법륜공의 /‘명망/’은 더더욱 큰 충격을 받게 될것이다. 이까지 생각한 나는 그 사람에게 “이 일을 떠들어서는 절대 안된다. 이 소식을 엄밀히 비밀에 붙히라. 지금 가장 주요한것은 시신을 실어내는것이다. 의심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동시에 실내를 철처히 개끗이 청소해야 되고 법륜공과 관련된다는 그 어떤 단서도 남겨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시신을 어디로 옮겨야 좋을지? 나도 대책이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있는 7명의 핵심성원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고 토론했다. 처음 나는 병원의 태평실에 실어가자 건의했다. 다들 그리 쉽지 않다 했다. 어느 병원의 태평실이든 가고 싶으면 가는 것도 아니고 다 문을 지키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번잡한 수속을 밟아야 되고 우리가 또 어디에 가서 사망증명 한장을 작성해 온단 말인가?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사람이 죽은지 이미 이리 오랜데 어떻게 태평실 일군과 설명을 해야 할지? 누군가 아무곳이나 찾아 묻어버리자 했다. 그런데 어디에 묻으면 좋을지? 더우기 겨울이라 땅도 얼었고 땅을 판다는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고 시간도 지체할 수 없었다. 한창 토론해도 그 시신을 어디로 실어내야 가장 적합할지 뾰족한 수가 없게 되자 나는 북경의 법륜공조직을 찾아가 대책을 토론했다. 그러나 그들도 별 방법이 없다했다. 이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기 위해 나는 미국의 법륜공총부에 보고해서 지시를 받기로 결정했다.
당시 일반 법륜공인원은 법륜공총부와 연락을 그리 쉽게 취할 수 없었으므로 직접 총부와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면 대단한 것으로 여겼다. 내가 그때 그토록 호소력이 있은것은 물론 내가 정진한것도 있지만 더더욱 중요한 원인은 내가 수시로 법륜공총부와 연락할 수 있고 총부의 지시를 직접 전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 도청과 비밀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주로 비밀홈페이지를 이용하여 총부와 연락했다. 암어(매번 통화후 다음번 통화암어를 약정)를 맞춘후 통화형식으로 교류를 진행, 내가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기에 홈페이지 주소를 수시로 동행하는 바이예(白野, 남, 장춘시 사람, 당시 장춘중의학원 학생)에게 넘겨줬다. 매번 바이예가 연락을 다 한후 나는 통화만 했다. 그러나 그날 마침 바이예가 옆에 없었다.
때문에 나는 저우건정(周根正, 남, 우루무치 사람, 신강법륜공총부 부소장)더러 법륜공총부의 국내담당자를 찾아달라 했다. 직접 사부님과 연락하여 이 사건을 해결 처리할 수 있는 조언을 들으려 했던것이다. 그러나 저우건정은 미국담당자과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
이때 옆에 있던 사람(종모, 이름은 모름)이 나에게 두 담당자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중의 하나가 미국 법륜공핵심인물 장위(张宇)었는데 만난적은 없지만 통화를 여러번 했기에 잘 아는 사이라 할 수 있었다. 전화가 이어진후 인사도 나눌 겨를없이 나는 직접 그에게 이홍지를 뵐 수 있나? 물었다. 그는 무슨 일이냐 물었다. 나는 한가지 아주 중대한 일이라 했다. 그는 전화 녹음을 할테니 나를 잠시 기다려 달라했다. 녹음 준비를 끝낸후 나는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말했다. 마지막에 나는 “사부님,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는 형사사건에 말려들게 됩니다”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위는 이홍지의 지시를 전달했다. “사부님이 3일전에 이미 이 일을 알았다. 사부님도 별수없다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라” 그 말에 나는 찬물을 끼얹어 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사부님이 우리를 고험하기 위한것이다라는 생각을 다시 했다. 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토론해서 결정하자, 아무튼 사부님이 이미 알고 계시니까, 일심으로 정법을 위한것이라면야 /…”
우리 7명이 각자 나눠서 막 준비를 서두룰때 미국에서 또 한통의 전화가 그 핸드폰으로 걸려왔다. 나는 부랴부랴 전화를 들었다. 입도 열기전에 대방은 “매번 우리가 이런 골치아픈 일에 봉착할때마다 이런것들은 모두 개인 행위다"라 간단히 한마디 말을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때 바쁘고 머리가 띵해 더 많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후에 나는 일이 생기면 혼자서 책임지고 법륜공과 관련된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그 전화의 참뜻을 알 수 있었다.
각자 분공대로 2월 11일 저녁무렵 정씨과 강씨 두명 법륜공인원이 택시를 타고 연교진에 가서 현장을 살피기로 하고 시신을 버릴 지점선택을 책임지기로 했다. 현장에 도착해서야 그들은 시신이 있는 방 출입문은 강판으로 만든 방범용 철문이고 창문도 다 닫겼으며 안에 들어갈 수 없음을 발견했다. 이 정황을 안 나는 이웃이나 경비나 집주인과 연락을 취해 키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는 한편 우리집결처에서 누가 그 방에 있었는지 방 키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봤다.
2월 12일 오후 2시경, 우리는 끝내 그와 한방을 이용했던 다른 법륜공인원으로부터 방키를 얻었다. 키를 얻은후 우리 일행 7명은 마씨성 법륜공인원이 제공하는 푸캉차를 몰고 다그쳐 하북성 삼하시 연교진의 그 임대방을 찾아갔다.
방면적은 120평방메터 정도였고 카텐은 꽁꽁 쳐진대로고 실내는 아주 지저분했으며 시신은 이미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것에 미처 신경쓸새도 없이 어서 빨리 /‘대법/’을 파괴하는 /‘마/’의 시신을 실어내고만 싶었다. 우리는 망자 몸에 지닌 법륜공휘장 하나와 /‘법륜대법이 좋다/’라 쓴 플랜카드를 찾아내고 사전에 사들고 온 비닐을 땅에 펴고 이불과 함께 시신을 감아 테이프로 윗몸과 다리를 몇번 묶고난 다음 자동차트렁크에 가로 눕혀 실었다.
당시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죽은 여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죽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의 가족들이 이 사정을 알기나 하는지? 전혀 무관심했다. 더 많이 걱정한것은 방에 남긴 법륜공서적과 플랜카드였다. 나는 두사람을 방에 남겨 실내 청소를 시켰다. 법륜공인원이라는 신분과 시신폐기처분 증거를 덮어감추려 했다.
차는 편벽한 길에서 몇십키로를 달려 북경시 통구주까지 왔다. 우리는 사전에 선택한 지점을 찾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사전조사를 갔던 사람이 거짓말을 한게 뻔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차에서 우리와 원래 선택했던 곳을 찾지 못한다 했기 때문이다. 길목에 있는 카메라에 우리차 번호라도 찍힐가봐 걱정돼 우리는 큰 대로를 달리지 못하고 시신을 끌고 사처로 돌아다닐 수 밖게 없었다. 돌고 돌다 보니 또 제곳으로 되돌아왔다. 한 사람이 “강을 찾아 강에 버리고 말지요”라 건의했다. 다들 그 의견이 좋다 했다. 17시경 차를 통주구 고구좡(高古庄)촌 량수하북안에 갖다 댔다.
“왼쪽강변에 관개용 갑문이 있는데 냄새가 지독하므로 여기에 버리고 말자!”라 차를 운전하던 마씨가 건의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사람이 없고 물도 깊었으므로 별 이의없이 그대로 했다. 오물에 떠 내려가는 시신을 볼때 내 마음은 조금 불안했다. 우리가 그를 대법을 파괴하는 /‘마/’로 간주했다 하더라도 아무튼 시신폐기처분이란 그리 광채롭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헤여질때 나는 재삼 그들에게 “이 일은 그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된다.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신신당부했다.
통주구의 집결처에 돌아온후 바이예가 나한테 종이 쪽지 한장을 넘겨주며 퉁신이 전달한 총부의 요구라 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명혜망은 법륜대법의 창구고 그는 국내 정법행동의 제일인이며 국내 핵심인원은 후비군을 양성해야 한다는 등, 나더러 제2세대, 제3세대 핵심을 발전시키고 구체 연락처를 알려줌으로써 우리들이 잡혀 들어가더라도 그가 계속 중국내 행동을 지휘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뜻임을 알아차렸다. 지금 보니 그들의 마음이 정말로 지독하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너무 고지식한 탓에 나같은 /‘고층차/’의 대법제자는 경찰이 잡지 못할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계속해서 나가서 사람을 동원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동북고향에 가 한바퀴 돌고나서 다시 집결처의 핵심들과 남방 등지로 동원가기로 약속했다. 떠나기전 나는 저우건정을 통해 미국의 장위와 연락을 취해 “지난번 말했던 일은 이미 원만하게 해결됐다고 사부님께 전해달라” 알렸다.
북경을 떠나 요녕성 무순시에 도착한지 일주일도 채 되기전에 나는 법륜공인원을 통해 나의 통주 집결처가 이미 공안기관에 들통났고 시신폐기처분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중 나를 제외한 전부가 이미 잡혀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들이 꼭 나를 물어내리라 추측했고 퉁신과 연락하여 어떡하면 좋으냐 물었다. 그는 나에게 /‘예비분/’임무 완성후 비상수단으로 출국할 수 있도록 그들이 도움을 제공해주겠다 했다. 그러나 2001년 4월 16일 이홍지의 곳곳에 없는곳 없다던 법신도 곧 원만하게 될 나같은 정진분자의 몸에서 현령하지 못했다. 결국 나도 감숙성 란주시의 집결처에서 공안기관에 꼼짝달싹 못하고 잡혔다. 나는 공안기관의 취조에 협조하지 않고 사천, 북경, 장춘 경찰측에서 시신폐기처분 사건에 대해 물었을때도 질질 끌며 제대로 여실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10년후의 오늘, 내가 입밖에도 내기 수치스러웠던 시신폐기처분 사건을 적는 원인은 지난 나날 나는 정신적으로 양심적으로 정말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돌아간 사람과 돌아간 사람의 가족과 친인에게 깊은 사과와 사죄를 한다. 나는 또 모든 법륜공매혹자들이 나를 거울로 삼아 이홍지와 법륜공의 죄악을 철처히 간파하고 하루빨리 각성되어 사회와 친인들의 품속으로 어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Kaiwind.com, 2010-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