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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를 믿어 목숨까지 잃은 아내

2009-10-19 기원 하 다:Kaiwind Auteur:한발요

 

나의 이름은 한발요(韩发尧)이며 금년에 64세로 산동성 치박(淄博)시 장점(张店)구 조양로 14호에 살고 있다. 산동성 치박탄광경제기술개발공사 교육센터의 퇴직교원이다. 아내의 이름은 동옥방(董玉芳)이며 나보다 한살 어린 63세다. 제노(齐鲁)석유화학회사 아크릴섬유공장 종업원이었으며 2001년에 퇴직했다. 퇴직생활은 원래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즐거운 나날이므로 사람들은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라 칭한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퇴직이야말로 악몽의 시작이며 끝내는 “더없이 아름다운” 이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을 만끽 향수할 복도 없이 이 세상을 영영 떠났다.

아내는 원래 성격이 급하고 조용히 앉아있지를 못하는 성미다. 반평생을 공장에서 분주히 돌아치던 아내가 갑자기 퇴직해서 할일이 없게되자 진종일 답답해하고 울적해 있더니 1년이 채 되지않아 온몸에 아프지 않은데가 없다 했다. 아내는 자기가 병에 걸린줄로 알았다. 건강하던 아내는 진통제, 소염제, 테트라사이클린 등 비상약을 떠날줄 몰랐다.

2002년, 같은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는 방씨 성을 가진 법륜공미혹자가 슬그머니 아내를 찾아와 “법륜공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공법이고 장기적으로 연공하면 병에 걸려도 병원에 갈 필요도, 주사를 맞을 필요도, 약을 복용할 필요도 없으며” “수련만 잘하면 원만, 승천할 수 있고”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가정이 덕을 볼 수 있다”면서 “믿건말건 일단 따라 연공을 해보라”했다. 그의 유혹에 넘어간 아내는 실험삼아 법륜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들은 북경에서 대학을 다녔고 나는 출근을 했다. 텅빈집은 아내와 방씨의 절호의 연공장소로 되었다. 법륜공을 수련하기 시작해서 부터 아내의 퇴직생활은 더는 지겹지않았다. 매일 방씨를 따라 벅찬나날들을 보냈다. 이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몸에서 일어나던 여러가지 불편이 많이 완화됐다. 아내는 병이 나았다 생각했고 법륜공 덕분에 “병”이 치유됐다 생각했다. 법륜공을 반신반의하던 아내는 이때부터 정말로 믿게 되었고 더 발전하여 법륜공이 그의 퇴직생활의 전부로 되다시피했다.

법륜공에 깊이 매혹될수록 가정에 대한 관심이 적어졌다. 연공전 우리집 가정환경은 정말로 위생적이고 깔끔해서 이웃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집은 구석구석 맨 먼지였고 지저분하기 그지 없었다. 금방 퇴직해서는 휴일이면 내가 좋아하는 요리들을 신경써서 챙겨주던 아내가 연공후부터는 하루 세끼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다. 초기 나는 이런 변화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라에서 법륜공을 단속한다지만 아내가 자기 집에서만 연공하고 남한테 해를 끼치는것도 아니니 아내의 기분만 좋으면 된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가 하는 짓들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다. 병에 걸려도 절대로 병원에 가지 않았고 주사도 약도 다 거부했다. 이 때문에 아내를 권고한적 한두번도 아니고 언성을 높여 다퉈봤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내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볼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별수가 없었다. 다행이 별 문제없이 아내는 잘 뻗혀냈다. 번마다 뻗혀내고는 법륜공에 더더욱 매혹돼 갔다.

2005년 5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무렵으로 기억된다. 퇴근해 집에 들어서니 아내는 배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워 신음을 하고 있었다. 얼굴색이 백지장같이 창백했다. 깜짝 놀라 어찌된 영문이냐 물었더니 “전세에 업력이 너무 커서 스승님이 나를 도와 소업을 해준다”고 무기력해서 대답했다. 그 말에 화가 터진 나는 더는 관심도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 밤중에 아내가 아프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급해난 나는 “우리 아무래도 빨리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했다. 소리 지르던 아내는 “안돼, 안돼, 스승님이 나에 대한 고험이니까”라 했고 일단 진통제 2알만 먹어보자는 나의 제의마저 거절했다

이튿날 아침 아내는 지칠대로 지쳤다. 그러나 아픔은 점점 심해갔다. 콩알같은 땀방울이 이마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처남을 불러 120구급차로 억지로 아내를 병원에 싣고 갔다. 급성맹장염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으며 서둘러 수술을 진행했다. 수술이 끝난후 의사는 “정말 위험했네요.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맹장에 구멍이 뚫려 그 후과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을건데”라 했다. 병원에서 10일정도 입원치료후 아내는 나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번에야 정신을 차리겠지 믿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듯 도로 내가 그의 “소업”에 영향을 끼쳤다며 앞으로는 자기 “원만”을 방해하지 말라 했다. 그 말에 나의 가슴은 써늘해졌다. 보아하니 아내는 정말로 막바지까지 그 길만 걸으려나 보다. 큰 코 다치지 않고는 돌아설념하지 않는가보다. 이대로 나가다간 조만간 꼭 큰 일 나고 말텐데 생각하니 무섭기만 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흘러갔고 아내의 법륜공에 대한 열망은 식을줄 몰랐고 점점 열광적으로 번져갔다. 머리에는 온통 “소업” “상층차” “원만”등 따위들 뿐이었다. 나는 걱정과 두려움속에서 하루를 삼추같이 보냈다

2007년 11월, 은근히 걱정해오던 일이 끝내 발생하고 말았다. 당시 나도 이미 퇴직해 집에 있었고 아내가 매일 아침 화장실에 머무는 시간이 특별히 길다는것을 발견했다. 나는 아내가 이 시간에 화장실공간을 이용하여 또 뚱딴지 같은 법륜공을 수련하겠거니 생각하고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아침은 아내가 화장실에 머무는 시간이 특별히 길었다. 내가 아침상을 차려놓고 한창 기다렸으나 아내는 나올줄 몰랐다. 이상한 생각이 든 나는 화장실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눈앞의 광경이 나를 놀랬다. 아내의 얼굴색은 하얗게 찔려있었고 변기우에 쓰러지다시피하고 까딱도 않고 있었다. 나는 부랴부랴 아내를 안아일으켰다. 변기에는 벌겋게 피가 묻어나온 대변이 그대로 있었다. 아내가 침대에서 조금 정신을 차린후 대변에 피가 묻었는데 어찌된 영문이냐 물었다. 아내는 이런 상황이 몇개월간 지속됐다고 했다. 때문에 전세에 “업력”이 너무 커서 연공으로 “소업”하려 했으나 몇개월이 지나도 증세가 경감되지 않고 도리여 점점 더 심해갔다고 했다. 아내의 말을 들은 나는 “정말 미쳤구나!”고 펄쩍 뛰었다. 다짜고짜로 택시를 불러 아내를 싣고 병원으로 달렸다. 이번에 아내는 더 거절하지 않았다.

이틀간의 검진을 거쳐 위장암 말기로 암세포가 이미 확산되었다는 진단이 내렸다. 의사는 조기진단으로 제때에 치료를 했으면 조기 위장암은 치유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는 편작(扁鹊), 화타(华佗)가 살아계신다해도 살려줄 가망이 거의 없다했다. 지금 할수 있는 일이란 어떻게 생명을 연장하냐의 문제라 했다. 이대로 방치하면 3-4개월, 아무리 과학적인 치료를 받는다해도 길어 2년을 넘기지 못한다 했다. 아내는 그나마 견식이 있는 사람이라 나는 상황을 속일 수 없어 여실히 알려줬다. 몇년간 “소업”할수록 “업”이 더 많아져서 아내도 언녕부터 법륜공을 의심했는지 아니면 생명에 대한 갈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인지 나의 말을 다 듣고나서는 묵묵히 눈물만 흘렸고 최종 입원치료를 동의했다.

이번 입원치료에 아내는 무척 말을 잘 들었다. 그러나 이미 지체된 병이라 의사도 마음뿐이지 별 방도가 없었다. 아내의 병은 여전히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거듭했다. 2009년 3월 8일 오전, 아내는 거울속의 말라버린 자기를 들여다보며 생명이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는다는것을 예감했는지 자기가 구술하고 그의 여동생의 대필로 아들한테 유서 한통을 남겼다(주: 우리의 외독자 아들은 아내의 부추김에 넘어가 법륜공을 수련, 인터넷을 통해 법륜공 반동선전을 전파하여 유기징역 4년을 언도받고 지금 섬서1소 감옥에 수감중). 이때부터 아내의 병세는 내리막길을 줄달음쳤다. 하루가 다르게 심해갔다. 생명의 마지막 시각에 아내는 나의 손을 잡고 미약한 소리로 “여보. 당초에 당신의 말을 듣지않고 오늘 이 지경에 이른것을 후회하오. 아들을 해치고 당신을 고생시키고 나를 망가먹고, 옆에서 돌볼사람이 필요한 당신과 장가도 가지 않은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아들이 정말로 걱정되오. 내가 간후 당신은 꼭 아들을 사람을 해치는 법륜공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줘야하오. 제발/…/…”우리 두 노인은 쏟아져나오는 눈물로 말을 더 이을수가 없었다.

아내는 꿈에서 깨여났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2009년 3월 25일 아내는 영영 눈을 감았다. 그가 그렇게 걱정하던 나와 아들의 곁을 영영 떠났다.

별첨: 아내가 아들한테 남긴 유서

진아야:

엄마는 가기전에 유서 한통을 남긴다. 너의 이모의 대필로 말이야.
엄마는 죽기전에 너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구나. 왜냐하면 우리모자들 사이의 인연은 이미 다 끝나버렸으니까.
나는 네가 이번 겁난을 통해 교훈으로 잘 받아들였으면 한다. 앞으로는 절대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고 돌아온후 철저히 회개하여 새 삶을 살거라. 모든 일에 심안을 길러야 되느니라. 그래야만 앞으로 실수를 안할 수 있어.
집에 돌아온후 너의 이모와 외삼춘과 연락을 취하거라. 중요한 일은 번마다 그들과 상론하고 그들의 의견을 많이 들어 보거라.
차후 한가지 특기를 잘 키우는것을 입신(立身)의 근본으로 삼거라
집에 있는 동안 아빠한테 효도를 잘 하거라. 아빠는 너를 사랑한단다.

 동옥분
                        
2009년 3월 8일

(Kaiwind.com, 200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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