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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대꼬챙이로 손톱을 찌른다는 ‘혹형’

2011-10-19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유금방(구술)장동(정리)

 
전향후 건신활동에 참가하고 있는 유금방

유금방(刘金芳), 46세, 하남성 회양(淮阳)현 주집(朱集)향 양채(杨寨)촌에 살고 있다.

나는 땅 파먹고 사는 시골 사람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구차하게 살았고 결혼후에는 또 남존여비의 의식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시어머니 밑에서 생활의 고초를 겪을 때로 겪었다. 어려서부터 이날 이때까지 내 인생은 참으로 좌절도 많았고 한때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었다.

1996년 여름, 친구 소개로 나는 <전법륜> 한권을 샀고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이 스스로 없어지고 또 /‘불도신/’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자석처럼 끌렸다. 이렇게 나는 어영부영 법륜공에 입문하게 됐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는 이홍지가 우리에게 수련대오를 확대시키라 한창 지시하던 시기다. 더 많은 사람들을 수련대오에 가입시키고 이홍지를 믿도록 만들기 위해 나는 집에 돈이 될만한 나무들을 다 팔아 그 돈으로 남편 몰래 비디오, 비디오 테이프, 녹음 테이프, 책자 등을 사서 이홍지의 설법 공부에 이용했고 이웃들에게 /‘법 공부/’ 자료들을 배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법륜공에 가입하라 동원했다.

하고 있는 일에 착실하고 법륜공에 정진하고 호소력과 영향력이 컸으므로 다들  수련이 잘 됐다 나를 인정해줬다. 1997년 3월 나는 회양현 주집향 양채보도소 부소장으로 됐고 법륜공관련 자료관리를 책임졌다. 그후 점점 심취되어 이홍지는 /‘우주의 주불/’이고 이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구도한다 믿었다.

연공자들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나는 차츰 친족을 멀리 했다. 재삼 상처를 입은 남편은 나를 제쳐놓고 혼자서 가정의 중임을 떠멨다.

나 때문에 상처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나의 작은 딸애다. 1997년 12월, 나는 회양현 노대(鲁台)향에서 열리는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유를 먹고 있던 겨우 두달밖에 안되는 작은 딸의 젖을 뗐고 딸애는 분유를 먹다가 바람을 맞았다. 아이가 병이 났어도 나는 연속 며칠간 약을 먹이지 않았다. 어리고 저항력이 약해 기침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열이 났지만 나는 사부 이홍지가 딸에게 소업을 한다 믿고 애를 데리고 병원에 갈렴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서 더는 보고 만 있을 수 없었던 남편이 내 반대에도 기어이 애를 안고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당장 입원을 해야 된다 했고 일주일간 연속 점적 주사를 맞혀서야 겨우 안정됐다.

1998년의 7월께 나는 공우들과 함께 이홍지의 신/‘경문/’ <뿌리를 캐다>를 학습하기 위해 잠자고 있는 9개월밖에 안되는 딸애를 빈 집에 혼자 남겨둔채 문을 잠궜다. 침대주위을 이불로 막아놓긴 했지만 내가 집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네댓시간 지난 밤이고 딸애는 이불채로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얼굴과 상반신을 이불속에 묻은채 두다리만 버둥대고 있었다. 부랴부랴 딸을 안았다. 얼굴이 새파래서 혼자서 퍼그나 오래 운 모양이었다.

1998년 8월 소장인 나는 더더욱 법륜공 공부에 충실하고 수련대오를 확대하기 위해 우리집에 법륜공연공장을 설립하고 마을 공우들을 모아놓고 함께 /‘법을 공부/’하고 연공했다. 나는 또 회양현 남반부 5개향의 공우들이 함께 모인 법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수련 초보들에게 연공테이프를 들려주고 이홍지의 설법 CD를 보여주고 더 많은 사람들이 법륜공을 수련하도록 동원했다.

내 제수도 내가 동원하는 바람에 1998년부터 법륜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1999년 2월, 34세의 시동생이 기침과 고열증상이 나타났으나 보통 감기 취급을 하고 집에서 유행성 감기약만 먹었다. 1999년 3월 내가 그에게 법륜공의 /‘소업/’치병을 선전한 탓에 그는 치료와 약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제수는 매일 <전법륜>을 남편한테 읽어주고 법륜공을 전수했다. 2개월후 뼈만 앙상하게 남은 시동생은 얼굴에 피기라고는 없이 숨만 겨우 붙어 있었다.  

1999년 7월 나라에서 법륜공을 취체했고 TV에 법륜공수련으로 죽고 장애자로 된 사례들이 보도됐다. 고마운 이웃들이 시동생에게 이홍지는 사기꾼이니 어서 병원에 가보라 권했지만 그는 재삼 권유를 거절하고 사부의 /‘법신/’보호가 있고 사부가 자기를 위해 소업을 해주고 있으므로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했다. 1999년 8월초 시동생의 절친한 친구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억지로 그를 회양현 병원으로 이송했다. 폐결핵이고 이미 말기로 발전하여 폐에 구멍이 여러개나 뚫렸으므로 최적의 치료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치료가 불가능하다 했다. 불쌍한 시동생은 병원에 도착한 이튿날 숨지고 말았다.

시동생이 법륜공을 수련하고 약과 치료를 거부한 탓으로 생명마저 잃은 참혹한 비극이 나의 코앞에서 벌어졌어도 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가 /‘원만/’했다 믿었다. 나도 신이 되고 /‘원만/’하기 위해 이홍지의 /‘경문/’의 감언리설대로 이런 것들을 대법제자에 대한 고험으로 받아들였고 나라에서 발포한 법륜공을 취체할데 대한 법령도 무시하고 계속해서 법륜공을 수련했다.

2001년 음력 정월 17일, 나는 대법을 향한 충성을 실증하기 위해 마음을 모질게 먹고 어린 자식 넷을 떼두고 집을 떠나 항성(项城)시내에 방 하나를 임대해서 자료지점을 세우고 저금통장을 다 털어 거기에 투입했다. 나와 공우들은 지점에서 미친듯이 법륜공전단지를 인쇄해 곳곳에 배포했다. 그때 나는 전단지 한장 더 많이 배포하면 생명 하나 더 구도한다 생각했다. 2001년 10월 나는 법에 저촉되는 일을 했으므로 법적 처벌을 받았다.

구치소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 교도원은 생활상에서 나를 빈틈없이 보살폈고 번거러움도 귀찮아하지 않고 나에게 가정을 중히 여기라 거듭 권했다. 그러나 나는 귀등으로 흘러보내고 그들을 대법을 박해하는 /‘마/’로 인정하고 이홍지의 “사악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요구대로 자주 단식을 벌이고 구호를 외치는 등 과격한 언행으로 그들과 맞섰다.

2003년 12월께 구치소의 교도간부가 명혜망에서 다운받았다는 소책자 하나를 나한테 보여줬다. <구치소 경찰 유금방 박해>라는 제목으로 된 기사에 구치소의 경찰이 대꼬챙이로 내 손톱을 찌르고 담배불로 내 족심을 지지고 나는 얻어맞아 머리가 터지고 옷이 다 찢어지고 피투성이고 하지를 얻어 맞아 장애인이 되고 수차 중태에 빠졌다는 등 내용이었다.

이를 본 나는 깜짝 놀랐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의 이런 박해를 받아본 적 없는데 명혜망에서 무엇때문에 이런 거짓 보도를 하는지 너무 놀랐다. 그때만 해도 나는 법륜공을 두둔하는 입장에서 문제를 고려할때였기 때문에 감히 더 깊은 생각이나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명혜망에서 이런 엉뚱한 소식을 실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다른 사람들한테 혼란을 가져다 줄 수 있고 불량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래로 그 누구도 내 손톱에 대꼬챙이를 찌른적 없다”며 두 손을 펼쳐보이는 유금방

나는 명혜망에 이 소식을 정정할것을 요구하는, 내가 구치소에서 받았다는 박해는 부실소식이며 명혜망에 실린 내용과 같은 그런 고통은 결코 받지 않았으며 구치소에서 누구한테도 얻어 맞은 적 없다, 나는 멀쩡하므로 하루 빨리 잘못된 곳을 수정해달라는 등 내용을 적은 편지를 구치소에서 풀려나가는 공우한테 부탁해 전달하도록 했다.

나중에 내가 안 일이지만 항성지점의 공우들도 뒷이어 내 진실을 알게 됐고 명혜망에 내가 박해를 받았다는 소식을 수정할것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달리 명혜망은 정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내가 박해를 받았다는 유언비어를 곳곳에 배포하고 크게 떠들며 전파했다.

2011년 3월까지도 법륜공 산하 사이트들은 이런 거짓말로 사람들을 혼란시키고  정부에 대한 불만을 자아내려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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