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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베테랑기자’의 반성
    
  2010-05-24  Kaiwind  筆者:규옥연

나의 이름은 규옥연(逵玉娟)이며 여, 금년에 43세, 전문대 학력이다. 전에 나는 하남성 남양시 백화상점의 회계었고 1996년부터 법륜공을 연공하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법륜공 사이트인 명혜망의 충실한 독자, 그리고 ‘베테랑가자’로 활약했다. 2000년부터 2004년간 나는 명혜망에 <법륜대법은 남양에서> <우리일가는 신앙을 견지하는 바람에 박해를 받아 남편과 딸이 억울하게 7년 도형을 받았다> <하남 법륜대법제자 우풍금 박해 진상> <하남 남양시 13대법제자 불법형과를 당하다> 등 20여편의 기사를 올렸다. 아래에 나는 명혜망에 올린 이런 기사들을 소개한다.

1967년 5월 나는 신강 카스(喀什)시 한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나는 성격이 온순하고 착하고 조용히 공부에 열중했다. 1989년 10월 아버지를 따라 본적인 하남성 남양시로 돌아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남양시 백화점에 회계로 입사했다. 1년후 결혼, 애를 낳고 아기자기한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언제 법륜공에 매혹되었는지 법륜공을 수련하라 ‘입이 닳도록’ 나를 권했다. 여러차례 법회를 ‘경청’하고 은연중에 영향을 입어 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법륜공의 충실한 신도로 돼버렸다.

2000년 7월 20일 나는 다른 4명의 남양 법륜공수련인들과 함께 차를 대절해 북경으로 갔다. 천안문광장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정좌연공을 벌여 남양으로 송환당했다. 북경에서 돌아온후 나는 자기가 한‘층차’ 더 승화했고 공력도 ‘제고’됐으며 ‘원만’과 더 가까워 졌다고 느꼈다. 바로 이때 공우 유여(刘丽)가 나보고 심득문장을 써 정주의 마락(马乐)이란 사람한테 넘겨주면 인터넷에 올려줄것이고 그러면 더 한층 높은 층차로 승화된다 했다. 흥분한 나는 학교 시절의 자신의 습작실력을 믿고 우쭐해서 당장 대답을 했다.

만물이 정적에 깃든 깊은 밤, 지식을 연마하기 위해 밤잠을 새우며 공부하던 과거의 나는 이때에 명혜망을 위해 책상에 마주앉았다. 흥분을 억제할 길 없었다. 나는 내가 두차나 북경에 갔던 경과를 단숨에 내리적었다. 정주의 마락한테 넘겨준지 얼마 안돼 나의 문장이 명혜망에 발표됐다. ‘희소식’을 접한 나는 격동으로 마구 뛸것만 같았다. 필경은 나의 심혈과 지혜의 결정이 아닌가! 일각도 지체할 수 없어 나는 집 근처의 PC방을 찾아 인터넷을 뒤졌다. 사이트를 연 나는 좀 의혹스러웠다. (<하남 남양 대법제자 우풍금 박해 진상> 원래는 내가 북경에 간 경력을 쓴것인데 북경에도 가지 않은 우리어머니 경력으로 고쳐졌다) 이게 어디 내가 쓴 문장인가. 경찰이 어떻게 나를 때리고 어떻게 북경에 간 법륜공수련자들을 때렸으며 수갑을 채우고 발로 내 머리를 걷어차고 등등, 쓰지도 않은 내용을 그들이 제멋대로 과장해서 추가했던것이다. 볼수록 부끄러워났다. 거짓이 아니고 뭔가? 나는 유여를 찾아가 다짜고짜로 “도대체 웬 일인가? ‘진, 선, 인’을 추구하는 우리 수련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고 따지고 들었다. 유여는 아주 담담한 어조로 나를 너무 흥분하지 말라며 타이르기 시작했다. “소연아, 넌 지금 이미 대법제자다. 반드시 호법을 위해 기여를 해야된다. 네가 하는 모든 것들을 사부님은 다 지켜보고 있단다. 너의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사부님이 다 기억하고 계신다” “너의 그 문장은 명혜망에서 문학적인 예술가공을 했을뿐이다. 이 역시 호법의 수요다! 명혜망의 문장들은 다 이렇게 쓴다. 너 어서 생각을 바꿔야 겠다. 그렇지 않다간 지금까지 한 모든 일들이 다 헛수고로 되고 말겠다!” 그의 말에 나는 짚이는데라도 있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여는 원고료라며 나의 손에 50원을 슬쩍 쥐어줬다. 그러고 나서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매일 명혜망의 문장들을 샅샅히 뒤져 읽기 시작했다. 과연 유여의 말과 같이 ‘박해’를 적발비판하는 문장들은 문장마다 피비린내를 풍기고 상식을 벗어나게 과장하기를 비기면서 엮어졌다. 난 갑자기 깨닫았고 달통이 되고 담이 커졌으며 모지락스럽게 글을 써 내려갔다. ‘적발비판’ 문장을 쓸때면 ‘기묘한 구상들이’ ‘샘솟듯 떠올라’ 명혜망을 통해 연거퍼 숱한 ‘시한폭탄’을 터뜨렸다. 성적이 탁월한 나는 명혜망의 베테랑기자로 임명되었고 중점 ‘육성’인원으로 선정됐다.

취재와 습작에 미친 나는 남편이고 아이고 다 뒷전으로 제쳐놓고 그들을 ‘호법’대임을 완성하는 도상의 짐으로 여겼다. 남편이 부재중인 어느날 내가 골똘히 원고를 쓰고 있는데 아들이 옆에 와 자기 숙제를 봐달라 칭얼댔다. 내가 머리도 쳐들지 않자 어린 아들은 눈물이 글썽해서 ‘엄마. 아빠도 안계시는데 엄마가 나의 숙제를 좀 봐줘요, 난 선생한테 혼나고 싶지 않으니깐요”라며 나의 옷깃을 당겼다. “물러가. 귀찮게 굴지 말고!” 발로 아들을 걷어찼다. 그 바람에 아들은 앞 이마를 침실문에 들이 박았다. 이마가 터져 붉은 피가 아들의 여린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광경을 보고도 나는 화를 삭히지 못한채 아들을 삿대질하며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재수없는 놈, 네놈때문에 내 쓰려던 내용이 다 날아났다. 난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테다”며 손에 잡히는대로 비자루를 들고 아들을 향해 내리쳤다. 아들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고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교란을 제거하기 위해 난 이혼증 한장만 달랑들고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집을 나와 명혜망의 기자로 됐다.

2004년 나는 법을 위반하여 형벌을 받았다. 방교(帮教)간부와 경찰의 도움과 교육으로 난 법륜공의 속박에서 깨끗이 벗어났고 뉘우치는 태도가 좋아 2008년에 미리 석방됐다. 난 오랫만에 남양으로 돌아왔다. 전 남편은 이미 재혼을 했고 집도 없고 일자리도 없는 나는 혼자서 등불이 가물가물 꺼져가는 백하강변을 헤매며 회한의 눈물을 마음껏 뿌렸다.

가장 어려울때 현지 사교반대지원자들이 열정적으로 지원의 손길을 내 밀었다. 일자리를 연락해주고 최저생계보장대우를 향수할 수 있는 수속을 협조해주고 원래 다니던 직장의 체제개혁에 참가할수 있도록 협조, 기업체제개혁 보상금도 탔다. 음영에서 걸어나온 나는 다시 새로운 가정을 이뤘고 ‘보금자리’를 목숨같이 아끼며 살아가고 있다.

(Kaiwind.com, 201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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