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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지가 획책, 지휘한 “4.25”사건 회고록
    
2010-04-26  Kaiwind  筆者:진경산    

머리말: 1999년 4월 25일, 북경, 천진, 하북, 산동, 요녕, 내몽고 등 지에서 몰려온 만여명의 법륜공수련자들이 일시에 중공중앙, 국무원 소재지 중남해주변에 모이는 바람에 세계를 경악케 했다. 사후 이홍지는 사건내막을 전혀 모른다 거듭 밝혔고 법륜공조직은 이 사건이 법륜공의 조직행위라는것을 전력 부인했다. 지난 역사 진상을 밝히기 위해 필자는 여러차례 “4.25” 중남해사건 주요 조직자이며 참여자인 이창(李昌), 왕치문(王治文), 기열무(纪烈武), 요결(姚洁) 등을 방문하여 사건의 전후 맥락을 파악했다.

1. 법륜공인원들이 천진사범대학을 에워싸고 벌인 난동이 “4.25”사건의 도화선으로 작용

1999년 4월 11일, 천진사범대학에서 발행하는 “청소년과기박람” 잡지 (1999년 4월 8일, “청소년과기박람”잡지사가 천진교육학원과 함께 천진사범대학에 합병되었음)제 4기 “특별기사”에 사진을 담아 중국과학원 원사 하조휴(何祚庥)의 “나는 청소년들의 기공수련을 찬성하지 않는다”란 문장을 게재, “중국과학원 물리연구소의 연구생 한명이 법륜공수련으로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은 정신병원에 보내 구급할 수 밖게 없게 되었다. 이 학생은 병이 나아 퇴원후 또 법륜공을 연공하기 시작했고 병이 재발, 다시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홍지 선생님이 아직도 계속해서 나를 주목하고 계신다(이홍지란 법륜공의 두목임)’고 말한다. 가짜기공을 반대해 진두에 나선 이후로 나는 선후로 9건이나 되는 여러형식의 보고를 받았다. 보고는 그들의 친척, 친구들이 기공수련후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 결과 8사1상을 초래했다 적었다. 가짜기공 선전자들과 신공이능(神功异能) 고취자들이 청소년을 독해하고 있다”. 문장발표 후 일부 법륜공수련자들이 법륜공과 이홍지를 “비방”했다고 연거퍼 잡지사를 찾아와 문장철회와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4월 15일 “법륜대법연구회”에서 학습반관리와 공리공법(功理功法)해석 담당을 맡은 왕치문(王治文, 당시 중국철도물자총공사 엔지니어)은 “법륜공천진수련총부”책임자 서금방(徐金芳)과 범기준(范其峻)에게 그들을 지지하므로 사람을 보내 천진사범대학과 교섭하라 지시했다. 천진수련총부는 세사람을 파견하여 “청소년과기박람”잡지사 총편집 주소록(周绍禄), 상무부총편집 범군석(范君石)과 담판을 진행했다. 시작은 그런대로 순리로와 문제가 쉽게 해결될것 같더니 교섭과정에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 더 많은 법륜공수련자들이 몰려왔다. 잡지사측에 압력을 가하려는 시도였다.

이튿날 “법륜공천진수련총부”책임자는 왕치문 등의 지시를 받고 “청소년과기박람” 잡지사 편집부에 첫째: 공개사과로 영향을 해소할것; 둘째: 이미 발간된 당기 간행물을 즉시 회수, 소각해벌릴 것; 셋째: 그  어느 개개인이나 간행물은 이 문장을 인용하거나 전재해서는 안된다는 성명을 낼 것 등 세개 조건을 제출했다. 가혹한 조건과 과격한 언사로 인해 잡지사편집측은 이를 불동의, 이런 요구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 밝혔다. 담판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법륜대법연구회”와 “법륜공천진수련총부”의 진두지휘로 4월 19일부터 점점 더 많은 법륜공수련자들이 천진사범대학 감숙로 학교구역에 모이고 정좌를 하며 잡지사에 압력을 가했다. 4월 21일 왕치문은 또 “법륜공천진수련총부”에 “막지 말고 가고 싶은 사람은 가게 내버려두라”는 의중을 전달했다. 천진시와 주변 성,시 법륜공수련자들이 동원되어 4월 22일 정좌와 항의에 나선 법륜공수련자인원수는 3000여명에 달했다. 이로 인해 학교의 정상수업과 생활질서가 완전한 혼란에 처했다. “법륜공천진총부”는 재차 사람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상황을 “회보”했다. 왕치문은 이에 “만족”을 표시했고 또 “당신들이 낮에 가고 밤에 철거할 수도 있다”고 지시했다. “법륜대법연구회”의 부추김으로 천진사범대학 감숙로 학교구역으로 몰려온  법륜공수련자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사태가 점차 크게 악화되면서 “4.25중남해 사건”의 도화선으로 번져갔다.

2. 이홍지가 귀국,  “4.25”사건을 직접 획책, 지휘

정보를 입수하고 좋은 기회라 생각한 이홍지는 미국에서 몰래 귀국했다. 1999년 4월 22일 “법륜대법연구회” 홍콩사무 담당 기열무(당시 (홍콩)중국유색금속공업무역그룹, 동업(铜业)유한공사 이사, 총경리)는 미국에 있는 이홍지의 통역 장이평으로부터 이홍지가 당일 저녁 미국에서 북경도착 예정이므로 공항에서 영접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항공편 도착시간을 착각하는 바람에 기열무는 공항에 나갔으나 영접을 못했다. 후에 이홍지의 재무담당 유계영(刘桂荣, 퇴직종업원)과 전화를 통해서야 이홍지가 이미 북경에 도착했고 숭문구 법화사(法华寺)16호루에 체류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홍지는 4월 22일 17시 10분 미국서북항공사의 NW087항공편으로 뉴욕에서 북경 도착) 이홍지 승낙을 받고 그날 밤 8시경 이홍지의 거처에서 이홍지와 만났다. 그는 이홍지에게 천진사범대학에서 발생한 법륜공수련자들의 집회건을 회보했다. 이홍지는 연구해 보겠노라하며 그 자리에서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또 이홍지와  4월 25일 내지 26일 경 항공권을 예매, 함께 홍콩을 가기로 약속하고 이홍지의 거처를 떠났다.

4월 23일 이른 아침 이홍지는 이창(공안부퇴직간부), 왕치문 등에게 업무회보 오라고 통지했다. 아침 8시경 기열무와 왕치문이 이홍지의 거처에 도착했다. 유계영이 이미 와 있었고 이창이 아직 미도착, 왕치문은 이홍지에게 국내 법륜공의 발전상황과 존재하는 문제들을 보고하고 특별히 천진사범대학에서 발생한 법륜공수련자들 집회사건을 회보했다. 그 사이 왕치문은 천진공안기관에서 법륜공수련자들의 집회를 막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할것인지 연구회의 지시를 요청한다는 “법륜공천진수련총부”의 전화를 받았다. 이홍지한테 문의하고 난 왕치문은: “두려울게 뭐냐, 이게 바로 시련이 아니고 뭐겠냐?”라 답복했다. 왕치문은 또 이홍지 등에게 천진시공안기관에서 수련자들을 무조건 철거하라 권하고 철거하지 않는자는 붙잡아간다 경고했다고 말했다. 이홍지는 “천진에서 사람을 붙잡기만 하면 위(국가를 말함)로 반영한다”고 말을 박았다.

23일 천진사범대학 감숙로 학교구역에 모인 법륜공수련자들 인원수가 더 많이 불어63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대부분 천리밖의 안휘, 산동, 요녕, 길림, 흑룡강 등지에서 왔다. 인원수가 많고 혼란으로 천진사범대학의 정상생활과 수업질서는 심한 영향을 입었다.

그날 회의는10시경 까지 진행되다 왕치문이 출근해야되므로 기열무가 차로 왕치문을 실어다 주었다. 가는 길에 기열무는 또 이홍지의 거처로 돌아오라는 왕휘충(王辉忠, 이홍지의 기사)의 전화를 받았다. 11시 지나 기열무가 다시 이홍지의 거처로 돌아오니 이홍지, 이창, 유계영과 왕휘충 등이 함께 있었다. 이창은 이홍지를 만나자 천진사범대학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보고했고 이창은 천진에서 사람을 붙잡기 시작하므로 북경에서는 많은 수련자들을 조직해 위로 반영해야된다 했다. 이에 이홍지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한다. 지난번 북경TV때 더 많은 사람들이 갔었으면 언녕 문제가 해결되었을텐데”라 했다(1998년  5월 24일 북경TV “북경특쾌”에 “자격증이 가짜 기공을 깨끗이 쓸어버릴 수 있을가”란 프로그램을 방영, 프로그램은 한 박사가 법륜공수련 후 주화입마(走火入魔)되어 반신불수되었다는 사례를 언급하며 정부관련부처에 “기공사” 자격심사제도를 도입하여 “자격증”을 발급할데 대한 건의를 했다. 이 일로 천여명의 법륜공수련자들이 북경TV를 에워싸고 난동을 피웠다. 사후 이홍지는 조직무능으로 사건을 더 크게 만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법륜공북경수련총부”의 부총책임자 이설군을 물러나게 했다. 이번에 이홍지는 천진사범대학잡지사 사건을 이용하여 한차례 더 큰 풍파를 일으켜 “법륜대법”의 합법화를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이창이 공안부로 공안부영도들 찾아가자 제의하자 기열무는 “공안부의 상급 영도기관을 찾아가야지, 국무원에 가서 총리를 찾아야된다”했다. 이홍지도 이를 찬성하며 “학원들이 자발적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 연구회는 나서지 말라, 정치에 참여가지 말라”했다. 식사후 이홍지의 거처를 떠날때 이홍지는 이창에게 어서 서둘러 처리하라 특별히 당부했다.

이홍지의 직접 지시를 받은 이창은 4월 23일 오후 1시 30분경 수도체육관 남로 1번 30문 15호의 엽호(叶浩, “법륜대법” 연구회핵심, 공안부퇴직간부, 당시 이미 캐나다로 이민)의 집에서 “법륜대법연구회”의 왕치문, 요결(북경화전부동산회사 직원), 우장신(于长新)과 북경총부의 탕학화(汤学华), 유수인(刘树人), 학가봉(郝家凤), 유지춘(刘知春) 등을 불러놓고 회의를 열었다. 기열무도 참석했다. 이창이 천진에서 발생한 사건을 통보하고 이홍지의 결정을 전달했으며 각지의 학원들에게 총리에게 정황을 반영시킬 뜻을 제출하며 법륜공수련자들 모두에게4월 25일 새벽 중남해에 모이라 통지할것을 요구했다. 그는 또 “천진문제 해결뿐아니라 홍법과 호법을 위해서라”고 특별히 강조했다. 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그들은 24일의 “학법예회(学法例会)”를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법륜공북경총부”의 각 보도소 책임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4월 23일 저녁 6시경, 회의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기열무는 서둘러 차를 몰고 이홍지거처에 들러 오후 이창이 소집한 회의정황과 계획실천정황, 구체조치들을 회보했다. 이홍지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3일 밤, 정상적인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천진시 공안국은 연며칠 철야 천진사법대학 교육학원을 에워싸고 있던 법륜공수련자들에게 자리를 뜰것을 권고했다. 각종 뒤골목 소식들이 끊임없이 전해퍼졌다. 공안국에서 45명을 붙잡아 갔다니, 13명을 붙잡아 갔다니, 붙잡아 가지 않았다느니 확인할 수 없는 유언비어들이었다. 당일 밤 22시경 “법륜대법연구회”의 핵심들은 또 엽호의 집에 모여 그날 진행되는 두번째 회의를 가졌다. 회의에서 이창, 왕치문은 “천진경찰들이 사람을 붙잡아갔고 죽은 사람도 있고 실종된 사람도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했다. 이창, 왕치문, 기열무, 요결 등은 이소매(李小妹)와 맹경국(孟庆国)을 천진에 파견하여 정황을 파악하게 하기로 토론결정했다. 회의는 또 중남해에 “청원을 제기할” 세가지 요구 즉 1. 천진공안기관에서 붙잡아 가둔 사람을 당장 풀어놓을 것; 2. 법륜공에 편안한 환경을 제공해 줄것;  3. 법륜공관련서적 출판을 허용할 것 등을 연구토론 결정했다.

4월 4일 아침 7시경, 기열무는 이홍지거처를 찾아가 천진에서 일이터질것 같으니 홍콩에 가는 일정을 앞당겨야 되지 않겠나 물었다. 잠간 생각하더니 이홍지는 짐을 쌌다. 기열무가 면허증을 지참하지않아 이홍지가 직접 운전을 했고 기열무, 유계영과 함께 그들은 공항으로 출발, 공항에서 10시 20분 홍콩행 CA111항공편 티켓을 구입, 이 항공편이 기계고장으로 뜰수 없게 되자 이홍지는13시30분 홍콩행 CA109항공편을 바꿔타고  홍콩에 도착, 홍콩 강이가든(康怡花园) 기열무의 집에 투숙, 가는 길에 이홍지는 기열무에게 이창, 왕치문, 탕학화 등에게 위로 정황반영시 “법륜대법연구회”사람들은 막후에서 조직만 하고 앞에 나서지 말라 전하고 왕치문에게 지방 법륜공보도소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알리라 전하라고 강조했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강조했다.

3. “법륜대법연구회”의 동원과 조직하에 법륜공조직은 중남해주변에 모이기로 비밀리에 획책

4월 24일 오전 8시 30분, 북경 동성구 장경관호동(藏经馆胡同) 7호에서 “법륜공북경총부” 인원들과 각 구,현보도소 핵심들이 모인 “학법예회”가 열렸다. “학법예회”는 “법륜대법연구회”에서 이홍지의 명령을 전달하고 법륜공수련자들을 지휘하는 일종의 중요한 조직형식이다. 이번 “학법예회”가 그들이 “4.25”불법집회를 위한 제3차 회의었다. 회의석상에서 기열무는 이홍지가 떠나기전 남긴 말들을 이창과 그들 몇몇 핵심들에게 전달했다.

24일 오후 이창, 탕학화, 요결, 학가봉, 유수인 등은 재차 엽호의 집에서 4월 25일 중남해에 “청원을 제기”할데 대한 토론 회의를 가졌다. 이창과 왕치문이 이홍지의 요구대로 “4.25”행동방안을 구체적으로 지시, 중남해에 모이는 구체시간을 4월 25일 새벽으로 확정했다. 나이가 많고 경력이 풍부하며 공안부에서 오래동안 근무했고 대형활동 조직경험이 있는 이창이 회의를 주재했다. 회의에서는 또 각 보도소소장들이 중남해 현장 책임을 맡고 안전, 교통, 질서와 위생 등 담당자를 별도로 인원지정하기로 결정했다. 정황이나 문제가 생겼을때 제때제때에 바로 처리할 수있게 현장 연락자 지정을 포함해서, 그리고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지 않고  플래카드를 들지 않고 전단지를 뿌리지 않으며 과격한 언사는 삼가하고 대외에 “법륜대법연구회”와 보도소 명의를 사용하지 않기로 책략을 확정, 회의는 또 “법륜공북경총부” 부책임자 유지춘이 북경 각 구, 현통지를 책임지고 왕치문이 지방 통지를 책임지기로 결정했다.

회의는 이홍지가 이번 집회을 위한 통일된 입장 “호법을 위해 이는 마지막 원만의 기회다”를 전달했다. 동시에 각 구,현지부를 통해 대법수련을 위한 편안한 환경을 쟁취 이 본신 역시 “홍법”과 “호법”이므로 다들 자각적으로 “홍법”과 “호법”에 참여하고 이번 행동은 자원이고 개인행위며 개인이 책임을 진다는 등 뜻을 수련자들에게 알릴것을 요구했다.

4월 24일 오후, 이창, 기열무 등 “법륜대법연구회”의 핵심들과 “법륜공북경총부” 책임자들은 엽호의 집에서 “4.25”불법집회를 위한 제4차 회의를 가졌다. 이창은 계속해서 “사부님이 이런 일은 마지막이라 했으므로 다시는 더 기회가 없을 것이다”라는 이홍지의 지령을 전달했다. 이번 회의에서 그들은 “4.25”행동의 현장지휘  조직분공을 더 세밀히 확정했다. 이창, 기열무가 총지휘를 맡고 왕치문이 지방과의 연락을, 유지춘이 북경 각 구,현과의 연락을, 요결이 현장 연락을 책임지기로 결정하고 유수인이 인터넷을 통해 대외선전원고들을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회의는 “지휘부”를 서성구 월단가도지장암(月坛街道地藏庵)에 위치한 요결의 집에 설치하고 민족문화궁주변 가명(柯明)의 집에 연락처를 설치, 진동월(陈东月), 이월추(李月秋) 등을 중남해 현장에 파견, 상황파악후 제때에 “지휘부”에 보고하기로 분공했다. 마지막으로 이창은 총부이상 책임자들은 그 누구도 중남해 집회현장에 가지 않기로 반복강조했다.

회의분공대로 당일 왕치문은 “법륜대법연구회”명의로 하북, 산동, 요녕, 천진, 내몽고 등지의 법륜공조직책임자들에게 “천진에서 일이 터져 북경으로 정황설명 준비중이므로 참가할 수 있는 학원들을 참가시키도록 하라” “사부님은 이번이 마지막 원만의 기회라 하셨다” 등 내용의 전화를770여통이나 해댔다. 그리고 법륜공수련자들을 조직하여 4월 25일 새벽 북경 중남해부우가(府右街) “호법”집회에 참여시키라 요구했다.

이홍지의 의도는 빠른 시간내에 “법륜대법연구회”를 통해 법륜공각총부 책임자들에게 전달됐고 각 총부 책임자들은 또 각 지부, 보도소를 통해 연공자들에게, 층층히 전달했다. 이렇게 “4.25”행동은 만단의 준비를 갖춘셈이다.

4. 이홍지는 홍콩에서 “법륜대법연구회”를 원격조종, “4.25’사건을 지휘

4월 24일 21시 40분, 중남해 북문에 첫팀 약 40명의 법륜공수련자들이 나타났다.

아침 7시, 중남해 서문 부우가일대에 정좌장면이 형성, 25일 오전 인원수가 이미 만여명에 달했다. 오후, 그 인원수가 점점 더 많아져 18시경, 사람들이 북해공원 앞문 단성밑에 까지 줄을 이었다. 이때 부우가의 교통은 완전차단상태었다.

사전계획대로 25일 이른 새벽 이창, 왕치문, 기열무, 유지춘 등 20여명은 육속 월단에 위치한 요결의 집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중남해 현장과 핸드폰으로 빈번히 연락을 취하고 지속적으로 명령을 발포하고 지휘했다. 중간에 이창은 직접 중남해 서문 현장에 도착,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을 보고 아주 흡족해했다.

9시 45분경, 현장의 4명 법륜공대표가 중남해에 들어가 국가신방국(国家信访局) 업무일군들과 “대화”를 진행, 그러나 대표로 파견된 사람도 무엇때문에 이런 활동을 벌이는지 제대로 말을 못했다. 이에 다른 네사람을 바꿔 다시 들여보냈다. 역시 뭘 하려는지 제대로 밝히지 못한채 금방 나와버렸다. 현장 지휘를 맡은 주덕승(周德承)은 “법륜대법연구회”와 북경총부에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파견해달라 요청했다. 이창, 왕치문, 기열무 등이 토론하고 그 결과를 홍콩의 이홍지한테 지시 요청후 원래 얼굴을 보이지 않기로 결정했던 이창, 왕치문, 등 5명이 대표로 중남해에 들어가 “대화”를 진행하기로 결정, 이홍지의 동의가 떨어지자 이창은 서둘러 기사를 불러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위는 회색 양복, 아래는 누런 경찰복 바지차림으로 가죽 핸드백을 끼고 중남해로 갈 준비를 했다.

약 오후 13시, 이창, 왕치문, 학가봉, 주덕승, 유수인 등 “법륜대법연구회”의 5명 대표는 관련부처의 담당자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북경시위원회 영도 이지견(李志坚) 등을 만났고 법륜공의 청원내용을 요약 말했다. 시위원회 영도는 위로 반영한다하고 나갔다. 다음은 국무원 부비서장과 대화, 나중에 다시 국가신방국 세명의 국장과 대화를 진행했다. “법륜대법연구회”의 5명대표는 관련부처에서 “지지하지도, 선전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는 법륜공문제에 대한 국가정책을 지키지 않으므로 중앙에 반영하기를 바라며 천진측에서 천진사범대학 문제를 해결할것과  국가에서 “전법륜” 등 서적출판을 허용할것을 요구하고 법륜공에게 합법적이고 편안한 연공환경을 마련해달라고 반영했다. 국가신방국 영도는 이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법륜공측에 중남해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무조건 철거시켜야 된다고만 요구했다.

대화는 저녁 21시까지 지속되었으나 결과를 보지 못했다. 국가신방국의 영도는 이튿날 다시 와서 계속 이야기하자 했다. 중앙에 문제반영하려는 목적을 이미 달성했다고 생각한 이창은 한면으로 날이 어두워진후 이렇게 많은 법륜공인원들이 사고라도 생겨 책임을 질가봐 걱정되어 모인 살람들을 철거시키자 제의했다.

이홍지는 홍콩 기열무의 집에서 전화로 “법륜대법연구회”을 원격조종,  25일 이른 아침 또 “법륜대법연구회”핵심들에게 중남해집회정황을 전화로 문의했다. 애초 사건 시작때부터 줄곧 북경의 지휘부와 ‘핫 라인”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지시를 내렸고 현장활동을 원격조종했던것이다. 북경 “지휘부”도 지속적으로 이홍지에게 전화회보를 하고 지시를 요청했다.  25일 당일 그들 사이에는 전화 20여통이나  빈번히 오갔다. 통화과정에서 그는 여러차례 “지방사람들을 많이 오게 하고 더 많이 오게하라” 요구했다. 기열무는 현장정황과 관련문제를 바로 바로 이홍지한테 보고했다. 현장에 만여명이 모였을때 그는 전화로 이홍지한테 알렸다. 이홍지는 “좋아, 지방학원들이 많은가?”고 물었고 두팀의 대표들이 중남해에 “대화”하러 들어간후 기열무 역시 바로 이홍지한테 보고했다. 이홍지는 “OK” 했다. 중앙판공청, 국무원판공청신방국에서 “법륜대법연구회”와 “법륜공북경총부”에서 사람을 파견하라 할때도 그는 바로 이홍지한테 지시를 요청했고 이홍지는 “당신을 찾아 이야기하자는데 왜 안가!”라 답복했다. 그 기간 멀리 홍콩에 있는 이홍지는 수차 지휘부 기열무에게 중앙에 압력을 가한 결과를 다그쳐 물었다. 이홍지의 지령을 받기전에 중남해주변에 모였던 불법집회 수련자들은 그 누구도 감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북경시 정부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자리를 뜨라는 통고발포 시 기열무는 즉시 이홍지한테 보고하고 중남해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철거시킬것인지의 여부를 물었다. 이홍지는 “대표들이 나왔는가?”고 물었다. “아직 나오지 않았다” 대답하자 이홍지는 철거하지 못한다 말을 박았다.


21시경, 이창, 왕치문 등이 나온후 기열무는 재차 이홍지에게 보고했다. 이홍지는 “대화가 어땠는가?”물었다. “내일 계속해서 대화하기로 했다”고 대답, 중앙판공청, 국무원판공청신방국 담당자들이 법륜공수련자들의 불법집회를 즉시 중지할것을 요구하자 그는 또 즉시 이홍지에게 당일 밤 철거해도 되는냐 물었다. 이홍지는 “이창이 철거하라면 철거하라” 했다. 기열무는 이 지령을 받고 지휘부에 “다들 철거하란다”고 통지했다. 이때에야 지휘부는 법륜공인원들에게 철거하라 통지했고 “북경제자들은 고상한 품성을 함양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대법제자들을 집에 데리고 가 재워달라”했다.

이홍지가 손수 획책, 지휘한 “4.25”중남해불법집회사건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4월 26일 새벽 6시경에야 이창 등이 중앙영도를 만나지 못했다는 상황을 안 이홍지는 기열무한테 전화로 “어제 중앙영도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이창이 왜 다 철거시켰느냐?”질문하며 당일 계속해서 지방에서 온 법륜공인원들을 중남해로 모이도록 하라 요구했다.

8시경, 이창, 왕치문, 기열무 등은 선후로 요결의 집에 도착했다. 기열무가 “어제 철거하지 말았어야 되는데 사부님이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중앙영도들을 만난줄 알았고” “사부님이 ‘사부’의 명의로 지방학원들에게 계속 상경하라고 알리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다들 다시 중남해로 모이라 요구한다”했다. 기열무는 또 “수련자는 두려울게 없다. 죽음도, 필요에 의해서는 피도 흘려야 된다. 피를 흘려야 좋다!”라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수련자들이 다 흩어졌고 북경공안부문에서 조치를 취해 국면을 통제했을 때다. “법륜대법연구회”는 재차 법륜공인원을 대규모로 중남해에 규합시킬 여력이 없었으므로 그만둘 수 밖게 없었다.

기열무는 요결의 집에서 이창, 왕치문 등과 오후에 어떻게 신방국에 정황을 반영할것인가를 토론 후 오전 10시경 비행기로 홍콩으로 떠나 중남해집회의 전부 경과를 이홍지에게 상세히 회보했다. 그제야 이홍지는 국태항공사 CX103 항공편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으로 떠났다. 5월초 기열무는 또 이홍지를 동반해 시드니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했다.

이튿날 오후 역시 이창, 왕치문 등 “법륜대법연구회”대표 십여명이 국무원 신방국을 방문하여 수련자들이 받는 차별대우 문제에 대하여 청원의 형식으로 대화를 진행할것을 희망, 국가신방국의 업무일군이 그들을 상대했고 원칙대로 공정하게 처리,  반나절 이야기했지만 결과를 얻지 못했다.

4월 말 이홍지는 미국 “월가일보” 상해주재 기자  Craig.S.Smith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막후에서 법륜공수련자들을 중남해로 모이도록 조종했다는것을 부인했고 금번 행동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밝혔다.  5월 2일 이홍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오스트레일리아국가방송국, “시드니모닝 헤럴드”, A.F.P 등 매체 기자들과의 인터뷰때에도 “북경에서 발생한 일을 사전에 나는 전혀 몰랐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호주로 오는 도중이었다” “이 일을 완전히 알게 될때는 브리즈번에 와서다” 등 사건과의 관계를 전력 회피했다.

이홍지의 이런 고의적인 거짓말은 당년의 충실한 추종자었던 이창 등의 커다란 분개를 자아냈다. 요결은 필자 취재시 “사부님이 이것이 마지막 원만의 기회라 거듭 말하는데 누가 원만을 바라지 않겠는가?” “이 사건은 완전한 기만책이다” “처음부터 마직막까지 완전 기만책에 불과하다. 이홍지는 터무니없는 사기군이다”라 논했다. 

2008년 5월 이창은 기자의 인터뷰에 “남자 대장부가 북경에 왔는지 안왔는지 자기 태도를 밝힐것이지…….(이런 행위는)개인, 역사, 그리고 많은 법륜공학원들에게  너무 무책임한 일이다. 개인 품성으로 보아 이렇게 해서는 절대 안된다”라 응했다.

기열무: “이홍지가 자기는 북경에 오지 않았었다 하는데 전적으로 틀린말이다. ‘4.25’사건은 긍정코 이홍지가 획책했다. 그가 아니면 누구든 이 일을 결정못한다. 그는 이 사건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Kaiwind.com, 04-25-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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